[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천제(天祭)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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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천제(天祭) - 6
  • 엄광용 전문 기자
    엄광용 전문 기자 novelky@hanmail.net
  • 승인 2021.11.12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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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마사희(馬射戱), 덕흥리 벽화고분(德興里壁畵古墳) 널방 서벽

 

6. 교시(郊豕)

 

대왕 사유는 태백산 천지의 폭포 밑에서 유숙하며 목욕재계부터 했다. 천제에 참여하는 제주(祭主)인 대왕을 비롯하여 축관(祝官)·헌관(獻官)·집사(執事) 등 제관들은 모두 3일 동안 목욕재계를 통해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데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물은 칼끝으로 찌르는 듯 차가웠다. 몸이 물을 거부했지만, 마음은 칼끝 같은 아픔도 인내로 받아들였다. 목욕재계를 하는 제관들은 모두 그저 묵묵히 웅덩이에 들어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속세의 때를 벗겨냈다.

마침내 삼월 삼짇날, 천제를 지내기 위해 대왕을 위시한 제관들과 전렵 행사에 참여했던 고구려 군사들은 생포한 멧돼지와 제물들을 짊어지고 흘러내리는 폭포의 물줄기를 따라 태백산으로 올라갔다. 모두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천지 근처의 달문(闥門)에 이르렀다. 천지의 물이 북쪽으로 트인 달문을 통하여 수직의 폭포를 이루며 장쾌한 소리로 흘러내렸다.

달문 언덕에서 내려다본 천지는 그대로 하늘을 담고 있었다. 둥실둥실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까지 그대로 보일 정도로 물은 투명했다. 수심을 짐작할 수 없는 짙푸른 빛깔의 물이 하늘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형국이어서, 땅과 하늘 사이의 서기(瑞氣)가 어떤 영적인 교감을 나누고 있는 듯이 보였다. 천지를 둘러싼 톱니 같은 산과 능선들은 마치 지상의 신들이 시립해 있는 것처럼 경건한 자세로 천지의 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구려 군사들은 곧 천제를 지내기 위해서 석축으로 된 천제단에 각종 깃발부터 세웠다. 먼저 천제단 내부에 해와 달과 북두칠성을 그린 기를 꽂았다. 동쪽에 세운 해 깃발 안에는 삼족오(三足烏)가, 서쪽에 세운 달 깃발 안에는 토끼가 각각 그려져 있었다. 또한 제단 외곽에는 28수의 기와 각종 염원을 담아 글로 쓴 깃발들을 세웠다. 이들 깃발들에는 각각 상징하는 별자리들이 그려져 있었고, 동·서·남·북·중앙의 5방을 상징하는 색깔로 표시되어 있었다. 동쪽에 배치한 깃발은 파란색, 서쪽에 배치한 깃발은 하얀색, 남쪽에 배치한 깃발은 빨간색, 북쪽에 배치한 깃발은 남색으로 테두리를 마감했다. 그리고 제단 안의 중앙에 세운 깃발은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이 같은 모든 깃발들은 바람 부는 방향을 따라 기폭이 짖어질 듯 세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천제에는 반드시 살아 있는 멧돼지를 교시로 쓰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천지를 향해 나무로 짠 제단을 설치한 후 가장 먼저 생포한 멧돼지를 산 채로 그 위에 올렸다. 그 다음 산과 들에서 채취한 나물과 음식들을 비롯하여 바다에서 잡은 생선 요리 등 각종 제물들을 진설했다.

한편 대왕 사유를 비롯한 제관들은 백의(白衣)를 입었으며, 모두들 제단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시립해 있었다.

먼저 천제의 제반 절차를 관장하는 집례의 안내에 따라 하늘의 신을 맞이하는 영신제가 시작되었다. 흰옷을 입은 신녀(神女)가 제단 앞으로 나와 하늘의 신을 부르는 기도를 올리고 나서 곧 무희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무희들 중 두 명은 황색 저고리를, 다른 두 명은 적색 저고리를 입었다. 그리고 모두 적황색 바지에 검은 가죽신을 신고 있었으며, 소매는 길고 넓어 만세 부르듯 공중으로 들어 올리면서 하늘 한 자락을 덮었다. 네 명이 쌍쌍으로 함께 마주 서서 춤을 추는데, 무희들의 길고 넓은 소맷자락이 먼 하늘을 향해 손짓하는 형용을 연출했다. 그것은 천신을 부르는 몸짓에 다름 아니었다. 악공들은 제각기 오현금·쟁·필률·횡취·소·고 등을 들고 연주를 했다. 그 웅장한 소리는 하늘로 퍼져 올라가 천신을 부르는데, 이때의 춤은 신들을 영접하는 대향연의 무대 공연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신녀가 천지신명을 부르며 주술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제관들 뒤에 선 추수는 이러한 영신제의 광경을 바라보면서, 무희들의 몸짓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사라지곤 하는 멧돼지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는데, 나무판 위에 묶여 있는 멧돼지가 자꾸만 몸을 뒤틀며 다리를 버르적거렸기 때문이다. 전렵행사 때 멧돼지를 생포한 그는 교시 담당이었다. 그때부터 천제를 지내는 날까지 사흘 동안 멧돼지를 잘 보호하여 제단 위에 올리는 것이 바로 그의 책무였던 것이다.

제관들은 모두 무희들의 춤사위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멧돼지가 저 혼자 버르적거리는 걸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다만 추수만은 노심초사하며 멧돼지의 네 발을 묶은 밧줄이 풀리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분명히 단단하게 묶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는데 어찌하여 밧줄이 풀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신성하게 진행되고 있는 천제를 중단시키고 감히 제단 앞으로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추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구에게 그 위기의 사태를 알려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런데 멧돼지의 동태를 유심히 살피는 또 한사람의 눈이 있었다. 바로 해평이었는데, 그는 묘하게 얼굴을 찡그리면서 히죽히죽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저 녀석이?’

추수는 순간 해평을 의심했다. 멧돼지를 제단으로 옮길 때 해평이 나서서 그를 도와주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아마도 그때 살짝 멧돼지 다리를 묶은 밧줄에 칼침을 놓았을지도 몰랐다. 사냥할 때 멧돼지 생포의 공을 놓친 그로서는 충분히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마른 침을 꼴깍 삼킨 추수는, 만약을 알 수 없어 어깨에 메고 온 밧줄로 된 올가미를 손으로 확인했다. 바로 그 순간 네 다리를 묶은 밧줄이 풀리자 멧돼지는 벌떡 일어서더니 제단에서 뛰어내려 한창 춤을 추고 있는 무희들 사이로 내달았다.

“아아앗!”

“어머나!”

“교시가 도망친다!”

무희들은 놀라 갈팡질팡하고, 제관들은 어찌할 줄 몰라 허둥거리며 그저 소리만 질러대고 있었다. 천제를 지내는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멧돼지는 제관들 사이를 뚫고 나갔다. 눈알에 벌겋게 핏발까지 선 멧돼지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바람에 다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어느 사이 멧돼지는 사람들을 벗어나 능선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나무도 없는데다 작은 풀들만 자라고 있었으므로 도망가는 멧돼지가 육안에 잘 띄었다. 그때 멧돼지보다 더 동작이 빠른 사내 하나가 능선을 향해 뛰어올라가고 있었다. 바로 추수였다. 그는 어느새 어깨에 메었던 밧줄로 된 올가미를 오른손에 거머쥐고 빙빙 돌리면서 도망가는 멧돼지를 향해 돌진했다.

휘리리릭!

밧줄 날아가는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도망가던 멧돼지 목에 여지없이 올가미가 걸렸다. 멧돼지의 힘이 어찌나 센지 밧줄을 잡은 추수의 몸이 질질 끌려갔다. 때마침 그는 삐죽 솟아오른 바위가 보이자, 냅다 몸을 날리면서 거기에 밧줄을 휘감아 더 이상 멧돼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고정시켰다.

멧돼지는 꽥꽥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렸다. 네 발로 땅을 차는 바람에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추수는 멧돼지에게 달려들어 빠른 동작으로 다리를 잡아챘다. 그는 순식간에 밧줄로 멧돼지의 네 다리를 묶었다.

멧돼지를 등에 짊어지고 천제단을 향해 걸어오는 추수를 보고 제관들 사이에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들 자칫하면 완전히 망칠 뻔한 천제를 다시 지낼 수 있게 된 것에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미 교시가 영신제를 진행하던 중 도망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날의 천제는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왕 사유의 얼굴빛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번뜩이는 눈빛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교시가 도망치는 사건 때문에 천제의 엄숙한 분위기는 이미 망친 뒤였다. 그렇다고 천제를 도중에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 천제는 모두들 침묵하는 가운데 집례의 안내에 따라 제반 절차를 진행했다. 교시의 목을 단도로 찔러 생피를 받아내 대왕을 비롯한 제관들이 돌려가며 나누어 마시는 의식도 매우 엄숙한 가운데 경건하게 치러졌다.

천제가 끝나고 나서 대왕은 일자(日者)를 불렀다. 일자는 천문(天文)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관리였다. 일자는 부들부들 떨려오는 몸을 애써 참으며 대왕 앞으로 나갔다.

“그대는 오늘의 일을 어찌 생각하는가? 교시가 도망을 쳤다가 잡혀왔다. 이는 필시 상서롭지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왕 사유가 근엄하게 물었다.

일자는 스스로 입을 잘못 놀리면 당장 여러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사안임을 모르지 않았다. 교시는 천신에게 희생(犧牲)으로 바치는 신성한 동물이므로 귀하게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책임자야말로 매우 준엄한 징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폐하! 우리 고구려는 건국 이래 교시가 도망친 일이 유리대왕 때 두 번, 산상대왕 때 한 번, 그렇게 세 번 있었사옵니다. 유리대왕 19년에 교시가 달아나 뒤를 쫓게 하여 교시의 다리를 끊어 겨우 잡았으나 천제에 올리기 전에 신성한 희생의 피를 보게 했으므로, 교시를 잡아온 자들 두 명은 목숨을 잃었사옵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1년에도 교시가 달아났는데, 위나암에 이르러 온전하게 사로잡았사옵니다. 교시가 달아난 곳이 길지라 하여 도읍을 옮겼는데, 거기가 바로 지금의 국도인 국내성이옵니다. 산상대왕 12년에는 교시가 달아난 것을 주통촌의 여인이 붙잡았는데, 모두들 귀인이라 여겼사옵니다. 대왕께서는 왕후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었사온데, 바로 주통촌의 여인에게서 아들을 얻어 태자로 삼았사옵니다. 그 태자가 다음 왕위를 이은 동천대왕이시옵니다.”

일자의 목소리는 자주, 그리고 몹시 떨려서 나왔다.

“교시가 도망친 역사를 말하라고 했더냐? 오늘 일어난 일이 상서로운 것이냐, 아니면 그렇지 못한 것이냐를 묻고 있질 않느냐?”

진노한 목소리로 대왕이 일자를 꾸짖었다.

“대왕 폐하! 하여, 말씀드리옵니다. 오늘 교시가 도망을 쳤으나 다행히도 추수란 자가 용맹하고 슬기로운 지혜를 가져 희생에 상처 하나 입히지 않고 잡았사옵니다. 상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사옵니다. 교시가 도망을 쳤다는 것은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나타내는 전조(前兆)이옵고, 다행스럽게도 희생에 상처 하나 입히지 않고 사로잡은 것은 그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는 예시(豫示)이옵니다.”

일자가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그러하면 오늘의 일은 앞으로 좋은 일이 일어날 조짐이란 말인가?”

“네, 그러한 줄로 아뢰옵니다!”

일자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도다. 짐이 오늘 도망치는 교시를 다시 생포한 추수라는 자에게 큰 상을 내려야겠다. 추수는 어디 있느냐?”

대왕은 곁에 있는 내관에게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보검을 가지고 오라 일렀다. 자루에 금박으로 쌍용이 새겨진 환두대도였다.

불려나온 추수가 대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일전에 엄심갑을 하사받았사온데, 또 보검을…….”

추수는 몸부터 덜덜 떨렸다. 대왕이 내리는 보검을 받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심갑은 그대의 몸을 보호하고, 이 보검은 몸을 아끼지 않고 적을 무찌르는 데 쓰라는 것이다.”

무릎걸음으로 대왕 앞에 다가간 추수는 허리를 급히 숙이며 보검을 머리 높이에서 받쳐 들었다.

“황공하옵니다!”   

“그대 때문에 오늘 기분이 좋구나.”

천제 지낼 때 이지러졌던 대왕의 용안이 활짝 피었다. 일자의 말 한 마디가 그렇게 대왕의 마음을 바꾸어주었다. 사실상 죽을 운수였던 추수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도 일자의 긍정적인 해석 덕분이었다. 거기에 대왕이 내리는 큰 상까지 받았으니, 추수로선 지옥과 천당을 오간 하루였다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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