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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볼수록 이상한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 (6)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1.01.03 22:59
  • 수정 2021.06.22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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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 그거 진짜야? 삼국유사를 쓴 일연도 속은 거 아냐?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은 滿이 왕이 되었다고 했고, 사군을 설치했다고만 적었다. 기자가 조선후가 된 것 같은 글은 사기 송미자세가에 나와 있다.

 

史記 권38 송미자세가 宋微子世家에서 “ (주)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 그 뒤 기자(箕子)가 주나라를 조현해 옛 은허(殷虛)를 지나게 되었는데, (중략) 은(殷)나라 유민들이 이를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기자가 은나라 사람임을 짐작케 하고 주나라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케 하는 구절이며 “신하로 삼지 않았다” 보다는 “신하가 아니었다”가 직역에 가깝다. 제후는 신하인가 아닌가? 신하로 보는 것이 일반적임으로 신하가 아니었다는 표현은 제후 즉 신하가 되지 않았다로 해석해야 한다.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一]而不臣也.

[一]索隱潮仙二音.地因水爲名也 색은 주)땅으로 인하여 물이 이름이 되었다.조선수 혹은 조수가 따로 있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가능한 부분이다.

其後箕子朝周,過故殷虛,感宮室壞,生禾黍,箕子傷之,欲哭則不可,欲泣爲其近婦人,[一]乃作麥秀之詩以歌詠之.其詩曰:「麥秀漸漸兮,禾黍油油.[二]彼狡僮兮,不與我好兮!」所謂狡童者,紂也.殷民聞之,皆爲流涕.[三]

[三]集解杜預曰:「梁國蒙縣有箕子」 집해 주) 양나라 몽현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

 

사마천은 기자가 조선후가 되었다면 조선열전에 기록하였을 것이다.

 

조선열전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를 나누어 본다.

1-1) 기자가 제후가 된 조선과 滿의 조선은 다른 조선이다. 누가 본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주된 조선과 제후인 조선으로 구분할 수 있다.

1-2) 기자가 제후가 된 조선과 滿의 조선은 같은 조선인데 사마천이 고의 혹은 실수로 사기 내에서 분리해 놓았다.

2) 기자는 조선의 제후가 된 적이 없다.

원문장을 해석하면 기자는 아예 조선에 가지 않았으니 기자와 조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가 되지 않았다(乃封, 箕子於朝鮮, 而不臣也)’로 해석하더라도 기자는 무왕(武王)의 신하가 되는 것을 거부했기에 조선에 봉해지지 않았다.

사마천 사기 이후의 역사서로 인하여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많다.

이원환은 사기 원문 그대로만 해석하고, 조선열전에 쓰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기자와 조선은 별 관계가 없다는 2)이론을 지지한다.

조선이 중국 사서에 등장한 회수를 분석한 논문에서 오현수는 중국 역사서를 변조하여 기자동래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의심한다.

周 교체기라는 매우 한정된 시간에는 무려 14회라는 많은 회수가 기재되어 있지만, 300~400년간의 西周時代에는 단 1회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아스럽다. 이상한 현상은, 이 시기 ‘조선’과 관련되어 언급되는 기사가 공히 ‘기자의 조선 지역으로의 동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라서 의구심은 더욱 커진다.” (2012.9 오현수,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발간 대동문화연구 79집 “箕子 전승의 확대 과정과 그 역사적 맥락 ― 중국 고대 문헌을 중심으로”)

오현수의 논문은 ‘기자’ 관련 기록  뿐만 아니라 ‘조선’에 대한 기록이 漢나라 건국 전후하여 광범위하게 삭제되거나 변조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고 본다.

 

상서대전 과 사기 이후의 역사서 (1281년에 쓰여진 삼국유사는 기자의 조선을 인정한다)를 근거로 기자가 조선의 제후가 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원환은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송미자세가에서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만난 연대를 편의상 대략 기원전1,100년 경으로 보자.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가 기원전 100년 경, 사마천도 전해 들은 이야기와 책을 보고 저술하는데 기자가 기원전 100년경의 조선의 선조라고 확정적으로 쓸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기자의 조선과 滿의 조선이 동일한 왕조였다고 하면 기원전 1,100년과 기원전 100년 사이 1,000년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기원전 100년에 사마천이 다녀보아야 얼마나 많이 다닐 수 있었을까?

결국 누군가로부터 듣거나 기존에 있는 글을 모아서 다시 쓴 결과일 것이다.

궁궐에서 공무원으로서 역사를 쓰던 사마천이 기자가 조선후가 되었다는 사실이적혀 있는 책을 보았거나 전해 들었으면 쓰지 않았을 리 없다.

기록이 없던 전승이 없던 좌우간 역사가 전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사마천이 기자가 조선후가 되었다는 사실이 적혀 있는 책을 보았거나 전해 듣지는 못했지만 그런 사실이 존재했거나 후대 전사자 (베껴 쓴 사람)이 고의 혹은 과실로 사마천의 원본과 틀리게 기재한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생각해 볼 수는 있으나 아예 송미자세가와 조선열전으로 편제를 달리한 것을 보았을 때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기자조선을 부정하고 나면 고조선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문헌적 근거가 없다고 반론할 수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가 기자조선을 인정했는데 이를 부정함으로써 기자조선 이전의 단군조선도 부정하는 주장을 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실제 단군조선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환단고기 등을 위서(가짜)라고 주장하면서 일제식민사학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역사 서적을 포함해서 고대의 서적이 그 시대에 만들어졌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고대의 무덤 속에서 책이 발굴된 적은 없다.

중국의 고전이라는 시경, 서경, 논어 등 모든 책들이 그 시대에 만들어진 그대로 글자 틀리지 않게 2021년까지 전해져 왔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환단고기, 부도지 등을 통째로 가짜라고 한다면 삼국사기, 삼국유사도 통째로 가짜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중국 역사서도 통째로 가짜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책이 만들어지고 전해지고 베껴서 사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당초 글자와 틀린 글자가 나올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실수 뿐만 아니라 고의로 특정 문구나 글자를 삭제하거나 삽입한 부분을 찾아내어  진실에 가깝게 복원되도록 해석하는 것이 역사학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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