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하빕, 이전 무패로 은퇴한 복서 록키 마르시아노

기영노 전문 기자
  • 입력 2020.11.02 11:0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UFC 무대에서 페더급과 라이트급을 석권했었던 하빕 누루마고메도프가 지난 2020년 10월 25일 아부다비에서 열린 UFC 254 대회에서 잠정 챔피언 저스틴 게이치를 2라운드 트라이앵글 초크로 제압한 직후 은퇴를 선언했다.

하빕은 게이치를 꺾은 후 "나에게 아버지 없는 경기는 의미가 없다"고 말하며 은퇴를 밝혔다. 하빕은 종합격투기 데뷔 후 29승(UFC 13승 무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하빕의 아버지 압둘마납은 지난 7월 초 ‘코로나19’로 사망했었다.

'검은 별'

검은 별은 프로복싱(격투기 포함) 세계에서는 패배를 뜻하는 별이다. 복서(격투기 선수)라면 누구나 달고 싶지 않은 별이지만 선수 생활을 하는 한 어쩔 수 없이 달아야 하는 별이다. 더구나 큰 펀치 한방이면 아무리 우세한 경기를 벌이다가도 역전패를 당하곤 하는 헤비급 복서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프로복싱 헤비급 역사에 무패로 선수생활을 마감한 선수가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짠돌이 복서 록키 마르시아노다.

록키 마르시아노는 49전 전승, 43 KO승의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아웃복서의 대명사 고 무하마드 알리, 무쇠주먹 조지 포먼과 마이크 타이슨도 모두 몇 개씩의 검은 별을 달았지만 록키 마르시아노는 완벽한 복싱 이력을 갖고 있다. 록키는 체격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타고난 파워와 다양한 펀치로 상대선수를 쓰러트려 나갔다.

록키는 1923년 9월1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브릭턴에서 이탈리아 이민 2세로 태어났다. 록키가 처음 택한 것은 야구였다. 그러나 포수 였던 록키는 훈련 캠프에서 에러를 자주 범해 쫓겨났고, 곧바로 복서의 길로 접어들었다.

록키는 1947년 3월17일 홈 요크에서 리 메이슨과 프로복싱 데뷔전을 가져 3회 KO승을 거뒀다. 그 후 1949년 5월2일 지미 에번스를 3회에 KO 시킬 때까지 불과 22개월 동안에 무려 16연속 KO승을 올리며 헤비급 무대를 평정해 나갔다.

 

록키가 세계 챔피언이 된 것은 프로데뷔 5년만인 1952년 9월23일 이었다. 상대 선수는 당시 WBA 헤비급 챔피언 조 윌코트였다. 이 경기는 지금도 헤비급 사상 명승부 가운데 한 경기로 회자되고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 무시니 펄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록키는 1라운드에 윌코트의 레프트 훅을 맞고 다운되었다. 그 전까지 다운을 모르던 록키는 생전 처음 강펀치를 맞고는 페이스가 크게 흔들렸다. 록키는 2라운드에서도 자기 페이스를 찾지 못해 불리한 경기를 했다.

그러나 3라운드부터 록키의 반격이 시작됐다. 4라운드를 거쳐 5라운드까지 록키가 약간 우세한 경기를 벌였다. 그러나 챔피언 윌코트도 만만치 않았다. 6라운드부터 다시 기운을 차려 록키를 압박해 나갔다. 링은 피범벅이 되었다. 윌코트는 왼쪽 눈이 찢어졌고, 록키는 머리가 터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7라운드가 시작되면서부터 갑자기 록키가 로프를 잡으며 쩔쩔 매더니 이후 12라운드까지 비실 거렸다.(나중에 록키는 7라운드가 시작되기 전 월코트의 매니저가 윌코트의 글러브에 석유젤리와 후추를 가미한 와셀린을 발라 자신의 눈을 맵게 했다며 고소를 했다)

록키가 7라운드부터 불리한 경기를 벌여 이제 판정으로 가면 챔피언 윌코트의 타이틀 방어는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13라운드에 접어들면서 윌코트는 이제 록키를 보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로프 쪽으로 몰아 붙였다. 그러나 순간 록키의 라이트가 윌코트의 턱에 작렬했고, 그것으로 경기가 끝났다. 월코트는 자신이 억울하게 패했다고 생각했는지 이듬해인 53년 5월15일 리턴매치를 요구해 다시 싸웠지만 이번에는 1라운드 KO로 무너지고 말았다.

록키가 무패로 선수생활을 마쳤다고 해서 약한 상대만 골라 싸운 것은 아니었다. 51년10월26일에는 역사상 최고의 헤비급 복서라는 조 루이스를 8라운드 KO로 꺾었고, 당시 최고의 복서라는 에자드 찰스와는 두 차례 만나 각각 KO와 판정을 이겼고, 라이트 헤비급에서 체급을 올린 아치 무어 에게도 9라운드 KO로 이기는 등 세계타이틀 매치만 7차례나 치렀다. 아치 무어가 무참히 쓰러지자 더 이상 그의 상대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록키는 싸울 상대가 없어서 링에 오르지 못했다.

록키는 복서로서는 무결점 선수 였지만 이탈리아 출신답게 돈 관리를 너무 철저히 해서 핀잔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겪어온 가난 때문이었다.

록키는 당시로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170만 달러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수십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돈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철저한 돈 관리 때문에 젊은 나이에 요절을 했다.

69년 8월말, 데스모인스에 사는 친구가 9월1일, 46세를 맞는 록키의 생일축하연을 열어주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문제는 록키의 교통편이었다. 록키는 원래 여객기를 타려 했으나 데스모인스로 돌아가는 건축업자의 경비행기에 동승을 한 것이다. 비행기 삯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록키가 탄 '세스나 147기'의 목적지는 록키가 초대받은 곳에서 약 40km 떨어진 뉴턴 공항이었다. 그러나 그 비행기는 뉴턴 공항에 도착하기 불과 수분 전에 추락하고 말았다.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