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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용 일본에서의 재기는 또 하나의 미스터리

기영노 전문 기자
  • 입력 2020.08.31 14:51
  • 수정 2021.06.2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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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수로서 일본 프로야구에서 재기에 성공했던 임창용 선수(사진=위키백과 갈무리)

임창용 투수의 일본에서의 재기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창용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2010시즌 1승2패35세이브(방어율1.46)을 기록(3년간 96세이브)하며 2011~3년까지 3년 동안 총액 15억 엔(206억)의 대박을 터트렸다.

일본에서 평균 5억 엔(약 68억)의 연봉은 일본 정상급 마무리 투수였었던 후지카와 규지(전 한신 타이거즈 4억 엔)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은 것이다.

한국에서 퇴물 취급을 받으며 쫓겨나다시피 일본으로 간 지 불과 2년 만에 일본 프로야구를 평정한 것이다.

임창용 선수는 9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 첫 해는 승패 없이 2패(방어율 5.85)만 기록, 그저 그런 신인투수 였다.

그다지 많지 않은 언더핸드 투수이고, 빠른 볼을 던지고 있지만 제구력이 불안 하고, 투구 운용이 너무 단조롭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임창용은 이듬해인 96년에 7승7패(3.22)로 가능성을 보이더니, 97년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97년 성적은 14승8패 26세이브(2.33)로 초특급 투수 반열에 올라섰다. 승수, 세이브 수, 방어율 3부문 모두 프로야구 최고투수로 활약을 한 것이다.

98년에는 1점대 방어율(1.89)을 기록하며 8승7패34세이브를 기록, 전설적인 투수 선동열 급 활약을 했다. 99년 해태에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되어온 첫 해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면서 13승4패 38세이브(2.14)를 기록, 삼성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2000년에 또 다시 1점대 방어율(1.52)을 재현하면서 5승4패30세이브를 기록했다. 2001년 14승, 2002년 17승을 올리며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 시리즈 첫 우승에 크게 기여를 했다. 2002년 시즌 직후에 열린 2002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병역문제도 해결했다.

2003년 13승을 올린 후 선동열이 수석 코치 겸 투수 코치로 영입 된 후 다시 마무리로 전향을 했다.

임창용은 마무리로 복귀한 후 첫해인 2004년 2승4패 36세이브(2.01)를 기록한 후 자유계약(FA) 자격을 얻어 구단에 이승엽 급의 연봉을 요구했다가 미운털이 박혔다.

당시 임창용은 이승엽이 56개의 홈런(당시 아시아 신기록)을 치면서 타자로서 최고의 플레이를 했다면, 자신은 마운드에서 에이스 급 활약을 했기 때문에 구단이 자유계약 선수로 풀린 이승엽을 붙잡기 위해 제시했던 만큼의 연봉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삼성의 반응이 너무 싸늘했다. 웬 100억원? 이승엽과 임창용은 차원이 다른 선수로 취급을 한 것이다. 성적도 대구 출신의 이승엽이 더 뛰어 나지만 이승엽은 프렌차이즈 플레이어로 한국을 대표하는 타자이고, 임창용은 광주 출신의 선수로 언제 팀을 떠날지도 모르는 그저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임창용이 김응룡 감독과도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도 작용을 했다.

임창용은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는 김응룡 감독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해태에서 삼성으로 오는 과정에서도 김 감독의 입김이 작용을 했다.

임창용은 2002년 대구에서 벌어진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8회에 강판당한 후 분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글러브를 내팽개치며 ‘김 감독 실 문’을 발로 걷어찼던 사건 이후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소원해 졌다.

임창용은 2005년 초부터 팔꿈치 통증을 참아가면서 마운드에 올라 5승8패(6.50)를 기록했지만 그 후 팔꿈치 수술을 받으면서 급격히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임창용은 팀에서 필요로 할 땐 팔에 통증을 느껴도 핑계대지 않고 등판했다. 그러다 선동열 감독이 임창용을 엔트리에서 제외시키면서 수술을 결심하게 되었다.

당시 임창용은 일본 프로야구 진출을 노렸었다. 일본 프로야구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3년간 6억 엔을 받기로 거의 합의 하기에 이르렀으나, 어찌된 일인지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고 지지부진 하다가 취소가 되고 말았다.

일본에서도 임창용의 팔꿈치 수술 받은 것을 알고는 영입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삼성 라이온즈 팀 분위기는 임창용에게 배타적이었다.

당시 김재하 단장은 “설사 임창용이 일본 진출에 실패 하더라도 우리 팀에 재영입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임창용은 기량을 떠나서 사생활에 문제가 있는 선수다. 초일류 기업을 삼성 그룹은 다른 것은 몰라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선수는 곤란하다면서, 2004년에 있었던 사생활 물의 건”을 들고 나왔다.

당시 삼성 측에서는 사생활 물의와 팀의 이미지 실추를 이유로 임창용에게 벌금 380만원을 물렸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임창용은 다시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었다. 2년간 18억 원(계약금 8억 원 연봉 5억 원)으로 당시 프로야구 랭킹 3위에 해당하는 고액이었다.임창용은 팔꿈치 수술 받은 이후 첫해인 2006년 겨우 1승(4.50)에 그쳤고, 2007년 5승7패(4.90)을 올렸지만 삼성에서는 수명이 다 한 선수로 봤었다.

임창용은 일본행을 결심할 당시 통장 잔고가 거의 제로에 가까웠었다.

10년 이상 프로야구선수 생활을 하면서 수십억을 벌었지만, 그동안 씀씀이도 헤펐을 뿐 만 아니라 광주에 있는 가족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낌없이 지원을 해줬다. 그리고 대구에 남아있는 아파트를 팔아서 삼성에게 위약금 2억 원을 내니까 그야말로 빈털터리가 된 것이다.

이제 임창용은 일본에서 성공을 하지 않으면 국내 프로야구 계에서는 설자리가 없게 되었다.

임창용은 ‘배수의 진’을 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2년 계약, 연봉 1500만 엔의 헐값이었다.

임창용은 프로야구를 시작한 이후 가장 혹독한 동계훈련을 거쳤다. 훈련 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단 1시간을 하더라도 집중력이 높아졌고, 공을 한 개 던지더라도 혼을 실어서 던졌다.

과거 전성기 때 처럼 150km를 넘나드는 강속구를 되찾을 수는 없지만 공 끝에 힘이 실리고 10년 이상 갈고 닦은 노하우까지 더 해저 위력적인 공이 나왔다. 특유의 뱀 직구도 더욱 꿈틀거리며 미트를 파고들었다.

임창용은 마운드에만 올라서면 난공불락의 철벽이었다.

상대팀에게 좀처럼 점수를 내주지 않았고, 상대 타자들이 안타를 뽑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미스터 제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만약 야쿠르트 스왈로스 팀이 요미우리 자이언츠 같은 강타선을 갖춘 팀이었다면 50세이브도 가능했을 것이다.

임창용은 선동열, 이종범, 조성민, 정민태, 정민철 등 그동안 일본에 진출했던 어떤 선수 보다 ‘성공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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