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백선엽 장군과의 인연 한 토막

천원석 칼럼니스트
  • 입력 2020.07.17 23:52
  • 수정 2020.07.17 23:5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선엽 장군이(이하 백선엽) 향년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죽음은 박원순 시장의 죽음과 맞물려 대전 현충원 이장 여부를 두고 진보와 보수간의 전선을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기어코 안철수 국민의 당 대표는 백선엽을 홍범도 장군과 동급에 올려 놓고 대우해야 한다고 말하고 여기에 원희룡 지사도 가담해 논란을 더욱 키워 버리고 말았다. 백선엽에 대한 내 나름의 평가는 있지만 따로 밝히지는 않고 단지 10여년 전 내 인생에 그와 잠시 스쳐간 일이 있어 잠시 소환해 본다. 

2011년 6월 23일, 달력을 살펴보니 목요일이다. 그날 오후 3시에 용산 전쟁 기념관에 자리잡고 있는 백선엽의 사무실을 찾았다. 당시 이명박 정권하에서 KBS는 이승만과 박정희에 이어 백선엽을 구국의 영웅으로 만들기에 여념이 없을 시절이었다. 3권으로 된 마치 전쟁화보와도 같은 그의 자서전인 '나를 쏴라'가 출간된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고, 마침 6.25도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기에 직접 백선엽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라는 차원에서 당시 내가 활동하고 있던 독서클럽 모임에서 저자와의 만남이란 타이틀로 추진했던 면담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당시 백선엽은 명예 오성장군으로 추대되어서 나라로부터는 전쟁기념관에 사무실과 함께 예비역 대령을 비서로, 현직 군인을 수행 기사로 제공받고 있었다. 면담에 앞서 그의 수행비서였던 예비역 대령은 우리에게 몇가지 주의 사항을 주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곤란한 질문'은 삼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말한 곤란한 질문이 무엇이었겠는가? 그의 간도 특설대 경력과 빨치산 토벌 및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사항들일 텐데 솔직히 그 질문들 빼고 나면 백선엽 한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면담은 한시간 반 정도 이어졌던 듯 하다. 놀랐던 점은 당시 나이가 90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치지 않는 체력이었다. 6,25시기만 되면 곳곳에서 쏟아지는 강연 요청으로 바쁜 터에, 당시 의도적으로 진행된 백선엽 영웅 만들기로 인해 정말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하고 있었다. 우리를 만나기 전에도 오전에 이미 한 차례 강연을 소화하고 온 참이었으며 우리의 면담이 끝나면 공군 회관에서 또 한차례 강연이 계획되어 있었다. 우리같은 일개 독서토론 모임이 당시 그와 면담 일정을 잡은 것 자체가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백선엽은 전혀 지친 기색없이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는 정말 노회한 사람이었다. 비록 수행 비서의 당부가 있었을지라도 어렵게 얻은 기회이니만큼 그냥 덕담이나 하고 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미리 준비했던 나름 날선 질문을 이야기가 차츰 무르익어 가는 도중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던졌다. (백선엽과의 만남을 위해 그의 자서전 3권짜리 총1500페이지를 완독하고 갔었다.) 순간 곁에 있던 수행 비서가 경직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백선엽은 우리의 질문이 어떤 것이든 이미 준비된 답안이 있었다. 그와의 면담은 몇 사람이 차를 마시며 나누는 담소라기 보다는 대중을 앞에다 두고 준비된 정답지를 읽는 듯한 독백에 가까웠다. 질문과 답은 완전히 겉돌고 있었고 차츰 사무실의 분위기는 점점 건조해져만 갔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본인이 직접 서명한 자서전을 선물로 받고 같이 사진을 찍는 것으로 면담은 아쉬움을 남긴 채 마무리를 지울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사무실을 나오면서 들었던 생각은 '비겁하다'라는 것. 당시에도 참 씁쓸한 맛이 남던 알맹이 없던 면담으로 기억될 뿐이다.

수많은 오욕을 남기고 결국 그도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그의 삶은 역사가 평가하리라. 단지 그의 영면을 빈다.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