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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국가대표 컴퓨터 링커 1호 박병철 사망소동의 진상

기영노 전문 기자
  • 입력 2020.07.1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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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씨가 전봇대를 들이 받는 엄청난 교통사고를 낸 것은 맞다. 그러나 박병철은 부활(?)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1979년 박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뒤 트로피를 받는 박병철(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 갈무리)

 

1985년 12월21일 한 조간신문은 “지난 19일 전 국가대표 링커 박병철 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사회면 1단 기사로 실었다.

기사내용은 박 씨가 경기도 광주에서 성남으로 승용차를 몰고 가던 중 전봇대를 들이받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고, 시간은 새벽 4시경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박 씨가 전봇대를 들이 받는 엄청난 교통사고를 낸 것은 맞다. 그러나 박병철은 부활(?)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부활에 얽힌 기막힌 사연을 소개하기 전에 박 씨가 현역 시절 어떤 선수 였던 가를 알아보자.

박 씨는 경상남도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서 박영태씨의 5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생면에 있는 성동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는데,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운동에만 전념 한 게 아니라 공부와 운동을 겸했다.

서생면에 있는 남창중학교를 시험을 치러 전체 13등으로 입학을 했다. 중학교 때부터 운동을 포기하고 공부에만 전념하려 했지만, 성동초등학교 시절부터 경상남도 일원에서 축구를 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터라 학교 축구부에서 그대로 놔 둘 리가 없었다.

남창중학교 이종수 코치는 박병철에게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만 축구를 시킨다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중학교에서 운동과 공부를 겸 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박병철이 날이 갈수록 성적이 떨어지자 집에서도 박병철이 다시 축구를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박병철은 부모님과 타협을 해서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면서 공부와 운동 둘 다 잘하려 했지만, 한번 떨어진 성적은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박병철은 부산상고에 일반 학생으로 응시했다가 낙방, 남창중학교에서 부정선수로 1년을 더 뛴 후 이듬해 부산상고에 축구 특기자로 입학을 했다.

부산상고에 진학 한 후 키가 13cm나 자라 당시로는 큰 키인 1m78cm가 되었다. 워낙 영리한 데다 축구에만 전념을 하다보니까 기량도 일취월장했다.

 

한양대학에 진학 한 이후 2학년 때부터 청소년대표를 거쳐, 1972년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1973년에는 ‘올해의 축구선수’로 선정되었는데, 선정된 이유가 불과 20세의 나이로 선배 이차만을 제치고 국가대표 주전으로 발탁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 축구는 1진 청룡, 2진 백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국가대표인 1진 청룡 멤버를 보면 공격 차범근, 미드필더 박병철, 수비 김정남 김호, 골키퍼 이세연 등 쟁쟁한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박병철은 빠른 발과 정확한 킥 그리고 자로 잰 듯한 패스로 아시아 최고의 링커로 불렸다.아마 당시에 컴퓨터가 있었다면 국가대표 조광래 감독 이전에 ‘컴퓨터 링커 1호’로 불리었을 것이다.

그러면 박병철이 어떻게 해서 부활하게 되었을까?

1978년 5월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이탈리아 볼로냐 클럽 초청경기에서의 박병철(사진=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 갈무리)

 

축구계를 떠난 박병철은 사업을 시작했다.

1985년 12월18일, 경기도 광주에서 사업관계로 지인들과 저녁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 이튿날인 19일 새벽까지 마시다가 새벽 3시40분 경 소위 말하는 필름이 끊어진 상태에서 자신의 로열프린스 승용차를 몰고 광주에서 성남 방향으로 약 20분 간 달리다가 전봇대를 들이 받은 것이다.

추청을 하면, 만취상태에서 비몽사몽간에 운전을 하던 박 씨는 시속 80~90km로 달리던 중 갑자기 눈앞에 물체가 나타나자 급하게 핸들을 돌렸고, 차는 길옆에 있는 전봇대를 그대로 들이받으며 폐차 처분할 정도로 대파 당하고 박 씨는 밖으로 튕겨져 나와 길바닥으로 떨어졌다.

사고가 났던 85년 12월19일 새벽 4시경 성남 일원은 영하 15도의 맹추위를 나타내고 있었다.

일단 바닥으로 떨어진 박씨는 만취한 데다 차가 전봇대에 부딪치면서 머리를 크게 다쳤고, 또 꽁꽁 얼어있는 길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온몸에 충격을 받아 완전히 의식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마침 사고 지점 옆에서 공사장 인부들이 텐트를 치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 잠결에 쿵하는 소리를 듣고는 무슨 일 인가 밖으로 나와 보니 자동차가 전봇대에 부딪혀 박살이 나 있었고, 길바닥에는 누군가 거의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인부들은 길바닥에 나뒹굴어 있는 박 씨를 담요에 둘둘 말아서 인근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 시켰으나, 병원에서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성남에서 가장 크다는 양친회 병원으로 후송되어 간신히 응급실에 입원했지만, 당직 의사는 박 씨가 자동차가 전봇대와 정면으로 충돌할 때 머리를 부딪치면서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데다, 피도 많이 흘려서 앞으로 3시간 정도 밖에 살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병원에서는 박 씨가 사망할 경우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주소를 확인했는데, 주민등록의 주소지는 고향인 경남 진하로 되어있어서 3시간 후 사망할 것에 대비해 “박병철 사망 급 상경 요”라는 내용으로 전보를 쳤다.

박 씨의 고양에 살고 있는 박 씨의 아버지 박영태 씨를 비롯해서 형제들이 양친회 병원으로 한걸음에 달려 왔고, 그 와중에 각 병원을 돌면서 취재를 하던 신문기자가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박병철 시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오보를 낸 것이다.

3시간 밖에 살 수 없다던 박 씨는 얼굴 전체가 엉망으로 헤졌고, 머리뼈도 여러 조각으로 깨졌지만, 천만다행으로 뇌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을 뿐 별다른 손상을 입지 않았다. 더욱 다행스런 것은 목 이하는 전혀 다치지 않았다.

박 씨는 곧바로 여러 조각으로 깨어진 두개골 접합수술을 받았고, 얼굴도 형체를 알아 볼 수 있게 끔 꿰맸다.

그러나 자동차가 전봇대를 부딪치면서 발생한 엄청난 충격 때문에 사고가 난 시점부터 무려 2개월 동안이나 식물인간으로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2개월 동안은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다.

박 씨는 2개월 여 동안의 식물인간에서 깨어나 의식을 회복한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성형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워낙 심하게 다쳤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다.

박 씨는 퇴원을 한 후 사람들을 피해 고향인 경남 진하로 내려갔다.

진하에서 몸을 치료하면서 성형 수술 받을 때만 서울로 올라왔다.

교통사고 후유증에서 어느 정도 회복을 한 이후에도 얼굴이 흉하게 바뀐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서 축구계에 전혀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동정이 차범근, 김정남, 이차만, 김 호, 김호건 등에 비해 언론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후 축구계에서 박병철을 봤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성형수술을 여러 번 받았지만 본래의 얼굴을 되찾을 수가 없었고, 본인도 축구계에서 일을 하기 보다는 개인 사업을 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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