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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지의 노래 [ 5 ] 콜롬보

김홍성
  • 입력 2020.06.20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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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버스터미널에 내려가기가 두려웠다. 더 이상 버스터미널을 서성이다가는 콜롬보처럼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이제 그만 다르질링을 떠날 때가 됐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2월이 다 가도록 다르질링의 운무는 걷히지 않았다. 정말 지독한 운무였다. 하루라도 벽난로에 장작을 때지 않으면 침낭이 눅눅해져 버렸다. 벽난로가 식어버리는 새벽이면 기침이 났고 뼈마디들이 쑤셨다. 그런 새벽이면 침대에 누워 있기보다는 차라리 밖에 나가 걷는 게 편했다.

 

거의 날마다 운무 속을 걸어 다녔다. 새벽에는 광장과 순환도로와 티베탄 마을을 어슬렁거렸고, 낮에는 좀 멀리 떨어진 차밭이나 묘지나 곰파寺院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느라고 다르질링 일대의 그 무수한 산비탈 골목들을 샅샅이 헤치고 다녔다.

 

오죽했으면 티브이 타워 언덕이나 광장의 좌판 상인들이 아는 체 하며 인사를 건네곤 했을까. 광장 모퉁이의 담배 가게 영감은 내가 개피 담배를 살 때 잔돈이 없다고 하면 외상으로 주기도 했다. 시장에서 마주친 티베탄 아주머니가 구면이라는 듯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인 적도 있었다.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안 났던 그 아주머니는 나중에 보니 광장에서 밀크 티를 팔고 있었다.

 

시장으로 내려가 버스 터미널을 어정거린 일도 두어 번 있었다. 누군가 아는 얼굴이 오리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도 버스터미널에 내려가면 좀처럼 돌아설 수 없었다. 돌아서려 할 때마다 뭔가 소중한 걸 잊은 듯 허전했다.

 

버스터미널 앞 만두집에 앉아서, 혹은 그릇 가게 옆에 쌓아올린 솥단지들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평원에서 올라오는 버스들을 자꾸만 기다렸다.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들을 주시했다. 전통 복색을 갖춰 입은 티베탄들과 승려들, 인디아 군인들, 학생들, 그리고 간간이 서양 배낭 여행자들이 버스에서 내렸다.

 

배낭여행자들은 대부분 이제 자대에 도착한 신병들처럼 긴장해 있었고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벙글벙글 끝없이 웃음을 날리는 서양 청년도 한 명 있었다. 그는 버스 지붕에서 조수가 내려 주는 배낭을 받을 때도, 그것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서서 치렁치렁한 장발을 손수건으로 묶을 때도, 배낭을 짊어지고 걸음을 떼면서도 연신 벙글벙글 웃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하이하고 인사까지 건네었다.

 

승객들이 흩어진 버스터미널에 남아 서성이는 사내도 있었다. 버스가 올 때마다 운무 속 어디선가 나타나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들을 하나하나 주시하던 사내였다. 차림새나 모습이 TV 영화 '형사 콜롬보'의 주인공과 아주 흡사해서 혹시 형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광인이었다. 시장 거리를 떠돌며 얻어먹다가 그 어울리지 않는 코트로 몸을 감싸고 아무 데나 누워 자는 거지이기도 했다.

 

밤이 될 때까지 콜롬보를 관찰했다. 버스가 뜸해진 터미널의 운무 속에서 콜롬보는 코트 주머니에서 꺼낸 초에 불을 붙여 머리에 이고 서있기도 했으며, 노점상에게서 강탈한 도넛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빙빙 돌리며 이상한 주문을 읊조리기도 했다. 행인들은 그의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지나쳤다.

 

그날 이후로 버스터미널에 내려가기가 두려웠다. 더 이상 버스터미널을 서성이다가는 콜롬보처럼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이제 그만 다르질링을 떠날 때가 됐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다음날 새벽에도 기침을 하며 깨어나 푸른 운무 속으로 걸어 나갔다. 그 다음날 새벽에도, 또 그 다음날 새벽에도…….

 

새벽 산책에서 돌아오면 일기장을 펼쳤다. 뭔가 쓰지 않고는 삶을 지탱할 수 없었다. 일기장에는 다르질링에서의 일상 뿐 아니라 다르질링의 운무 속에서 전생처럼 떠오른 기억들도 기록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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