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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로 시] 역방향, 비문 읽기

윤한로 시인
  • 입력 2020.03.02 09:28
  • 수정 2020.03.02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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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방향, 비문 읽기
   
윤한로

지금 나는 비문을 읽습니다

집과 나무들 나한테, 갑니다
나는 그대한테
, 옵니다

그렇다면 내일은

나는 나무들한테, 옵니다
내 사랑은 나한테
, 갑니다
나한테로

나는 뚫어져라 뒤만 봅니다
나는 앞을 되돌아보지 않으렵니다

이제
나는 비문을 읽힙니다

 


시작 메모
KTX를 탔다. 역방향인 줄 몰랐는데. 언짢았지만 좋게 마음먹기로 했다. 타고 가면서 진실과 존재의 표현 방식에 대해 생각해 봤다. 시인들은 빗대서 쓰지 않으면 진실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비유를 쓴다 했다. 아이러니나 역설 또한 마찬가지다. 직설이나 정설, 오소독소로는 잡아낸 존재의 근원을 표현할 도리가 없댄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비문을 들고 나서겠다. 어절과 어절을 묶어 문장, 문맥 전체를 강한 관련과 통제 속에 가두느니, 사물과 사물들이, 어절과 어절들이, 순간과 순간들이 제각기 놀도록, 숨쉬도록, 춤추도록 해야 할 것 아니냐. 그따위 주제, 맞춤법. 아무튼 어떤 때 내 삶의 진실은 비유도, 상징도, 아이러니도 아닌 바로 비문으로 밖에 드러낼 수 없다. 비문이 때론 저것들보다 훨씬 시적이다. 가짜 같지 않다. 그날 난 나와 집과 나무, 그대의 오고 감, 앞뒤가 바뀐 역방향, 비문 아니 새로운 문장을 타고 서울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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