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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성 수필 [ 28 ] 덕재 7 / 동백 숲의 구렁이

김홍성 시인
  • 입력 2020.01.18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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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낮잠을 즐기던 어느 날,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문득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내 눈에 보인 것은 어떤 얼굴이었다. 금빛을 머금은 초록 바탕에 주사처럼 붉은 무늬가 있는 얼굴이었다.

ⓒ김홍성 

우리가 점심을 먹는 장소는 대체로 세 군데 쯤 되었다. 그 중 하나는 소들을 몰아넣기 좋은 억새밭 기슭의 샘가였다. 새벽밥을 먹고 나와 소를 몰고 종일 걸었으므로 점심은 늘 달았다. 기장을 섞은 흰 쌀밥, 형수가 산비탈에서 직접 캔 나물 무침, 그리고 막장에다 지진 풋고추…….

항고 뚜껑으로 샘의 물을 떠 마시고, 항고를 헹구고 나서는 심심풀이로 더덕이나 당귀를 캐기도 했다. 운이 좋으면 속에 물이 찬 굵은 더덕을 서너 뿌리 씩 캐기도 했다. 보통은 캐자마자 씹어 먹었지만 때로는 더덕 술을 담느라 항고에 넣어 목장으로 가져 오기도 했다.

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동백이 우거진 너덜지대가 있었다. 너덜을 이룬 바위들 밑에서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낮잠을 자기도 좋은 곳이었다. 형은 산 동백꽃의 향은 독해서 오래 맡으면 죽는다며 말렸지만 나는 오히려 그 향이 좋아서 산 동백 꽃그늘이 바람에 일렁이는 너럭바위 위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곤 했다.

그렇게 낮잠을 즐기던 어느 날,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문득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내 눈에 보인 것은 어떤 얼굴이었다. 금빛을 머금은 초록 바탕에 주사처럼 붉은 무늬가 있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박힌 두 개의 예리하게 빛나는 눈과 마주친 극히 짧은 순간이 지난 뒤에는 내 허벅지보다 굵은 몸통이 너럭바위들 뒤로 사라지는 것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나는 그 몸통의 꼬리까지 완전히 바위틈으로 사라졌다고 느꼈을 때에야 멈추었던 숨을 쉴 수 있었다. 내가 숨을 멈춘 시간이 몇 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통이 엄청나게 길고 굵은 구렁이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너덜지대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한참 걸으면 산에서 삐져나온 바위 밑에 샘이 또 하나 있고, 그 샘에서 다시 길을 따라 숨차게 오르다보면 억새 능선 밑에 외딴집이 있었다. 이 집의 굴뚝은 포탄 껍데기들을 연결한 것이었다. 장독대에 놓인 몇 개의 장독도 모두 포탄의 탄두거나 껍데기였다. 지붕을 이룬 철판 쪼가리들도 모두 일종의 포탄 껍데기를 망치로 두드려 펼친 것이었다.

이 같은 자재들은 모두 이 집 식구들이 민둥산 근처에서 수집하여 운반한 것들임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당시의 나보다 훨씬 어린 아들 삼형제를 둔 내외가 이 집에서 화전도 하면서 고철을 수집하며 살았다. 장날이면 온 식구가 바랑이나 지게를 지고 장에 다녀오곤 했다. 나는 점심 때 일부러 이 집까지 올라가 된장찌개나 김치를 얻어먹기도 했는데, 하루는 이 집에서 기르는 염소의 젖을 한 대접 얻어먹고 심한 설사를 하기도 했다.

아마 이 집 주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산동백이 우거진 너덜지대에 사는 그 큰 구렁이는 수컷이며 본래 짝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짝은 오래 전 어느 때에 그곳으로 작전을 나와 막영을 하던 일개 소대 규모의 군인들이 총으로 쏴서 죽였다. 구렁이가 어찌나 컸던지 소대용 국솥 하나로 모자라 두 개의 솥에다 나누어 삶아 먹었다고 하는데, 그날 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면서 산사태가 나는 바람에 소대 병력의 군인들이 거의 모두 돌과 흙더미에 파묻혀 죽었다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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