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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신사(187) - 시간이라면 상대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서석훈
  • 입력 2014.01.1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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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창(소설가, 시인)

시간이라면 상대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복권을 타서 일부 현금을 주머니에 넣고 여배우 미나를 만나 밥 사주고 술도 사고 있는 40대의 동영상 제작자는 미나가 뭔가 잔뜩 기대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신작영화를 찍는데 주연 여배우로 출연해 달라’ 이런 제의를 기대하는 건 여배우로서 당연한 것이고. 조연이라도 -요즘은 조연이 뜨는 시대이니까- 강한 임팩트가 느껴지는 역을 달라. 그런 것인데 감독은 거기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사실 감독으로선 찍자고 하는 제작자도 없을 뿐더러 시나리오를 검토해 봐달라는 영화사의 제의도 없고 감독님과 함께하고 싶다는 배우들도 없었다. 그리고 복권 탄 돈은 있지만 그건 영화 찍을 돈은 아니었다. 영화란 투자를 받아서 찍는 것이지, 소중한 복권당첨금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영화에 쏟아 부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물론 영화가 히트 치면 투자 대비 큰 수익이 나겠지만, 열 개중에 하나 히트치기도 힘든 상황에 함부로 배팅한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해서 감독은 영화는 나중 일이고 우선 여자들과 노닥거릴 시간이나 갖고자 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이상한 잡지 같은데서 인터뷰랍시고 한국영화의 질적 제고와 나아갈 방향, 영화산업의 구조적 측면에 대한 고찰 같은 것을 물어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땐 매우 심각한 어조로 일부 메이저 배급업자와 산업관계자들이 한국영화를 구렁텅이로 몰아가고 있다고 신랄한 어조로 비판하곤 하였다. 또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을 우려하며 오늘날의 배우들에겐 진정한 예술혼이 부족하다고 질타하는 걸 잊지 않았다. 여배우에 대해선, 여배우 또한 영상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묻고 참된 행복을 추구해나가야 하다고 역설하곤 하였다. 인기 영합주의는 영화 정신을 좀먹는 행위라는 발언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러한 인터뷰의 대가로 돈이 한 푼이라도 들어오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고 심지어 당신 기사가 나왔으니 책을 한 백 부 사라든지 뭐 광고라도 하나 실으라고 하는 게 고작이었다.
“더 마실 거에요?” 참다못한 미나가 한 마디 하였다. 얘기할 게 없으면 그만 일어나지 뭐 하러 앉아 있느냐 이런 뜻인데 적정한 타임에 뱉은 말이었다. “시간이...” 감독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어디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굴다가 그렇지만 뭐 그깟 약속이야 하는 듯한 표정도 지었다. 시간은 10시 10분이었다. 10시 10분이면 거리는 아직도 술판이 벌어지고 한창 대화가 무르익을 시점이었다. 남녀라면 이제부터의 얘기나 몸짓이 매우 중요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시간에 집에 가겠다고 술자리에서 일어서는 여성이 있다면 누구라도 며느리 삼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시간에 모진 여성은 많지 않았다. 미나도 시간이라면 상대에 따라 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하였다. 이 감독이란 작자 앞에서는 시간이 상황에 따라 늘어날 수도 여기서 끊어져버릴 수도 있었다.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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