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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신사(169) - 사 달라면 그냥 사 주면 되지

서석훈
  • 입력 2013.08.24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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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창(소설가, 시인)

사 달라면 그냥 사 주면 되지


민아 양은 신인 티는 벗었으나 아직 인기와는 거리가 먼 단역 영화배우이고 40대의 동영상 제작자는 장편상업영화에서 아직 재미를 못 본 감독이다. 그 두 사람이 몇 년 만에 만났다. 남자는 주머니에 돈이 잔뜩 들어 있다. 복권에 당첨되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이 사실을 모른다. 남자로선 알려야 할 의무도 없고 알리고 싶은 생각일랑 추호도 없다. 이렇게 되니 무슨 속임수를 쓴다기보다 재미있는 게임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기 패는 보여주지 않고 상대의 패는 읽고 있는 고수의 여유라고나 할까. 아무튼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무슨 생각을 내비치든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돈이란 그러고 보니 돈만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여유 있게 멀리 내다보게 하며,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행복물질 같은 걸 생성시키며, 또 앞날이나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대도 사뭇 달콤하게 하는 것이었다. 가령 지금 당장 어느 상가에서 오라고 연락을 받아도 밤 늦게 콜 택시를 타고 가서 봉투 하나를 넣고 간단하게 위로의 말을 하고 나올 수도 있었다.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어차피 망자에 대한 극심한 슬픔보다는 체면 땜에 가지 않나. 그러니 돈이 없어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부의금 마련하느라 지갑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애태우지 않아도 되지 않냐 이 말이다. 그건 하나의 예이며 또 누군가 다급하게 다 죽어가는 소리로 30만원만 하고 아우성 칠 때 그냥 보내주는 것이다 잊고 있으면 부쳐오겠지 하며. 그리고 애들 학원비가 모레라고 한숨짓는 누나에게 그냥 한 오십 보내주는 것이다. 뭐냐고 물으면 그냥 쓰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여유가 사람을 품위있게 만드는 것이다. 복권 당청금이 많은 일을 하는 것이다.
아무튼 남자는 민아가 오늘 어떤 행동을 하든 무슨 말실수를 하든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보려고 마음먹었다. 뭐 좀 비싼 거 먹고 싶다고 하면 사주면 되는 거지. 나는 같이 안 먹나. 지나가다 옷이 예쁘다 그러면 한 벌 사주면 되지. 어차피 그 옷을 남자 앞에서 벗어보고 싶은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이렇듯 남자의 생각은 한없이 열려 있고 생각 자체가 부드러워, 시선 또한 아저씨처럼 정이 듬뿍 가는 눈으로 민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민아는 이러한 사정은 모르고 이 감독의 찌질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참치를 사달라고 하면 인상을 쓸까, 그냥 칼국수나 사달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그렇지 삼겹살 정도는 사줄 수 있지 않나 이러한 생각으로 머리가 터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오늘 이 남자의 이상하리만치 수상한 태도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다. (다음 주에)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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