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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 당시 미국 정부도 주목했다’

황인성 기자
  • 입력 2019.10.1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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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 교수, ‘부마항쟁 4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
1979~1980년 주한 미대사관 교신자료 검토

[미디어피아] 황인성 기자= 1979년 부마민주항생 발생 당시 미국이 국내 상황에 대해 “상황이 매우 엄중하며, 학생들의 시위가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라고 본국에 보고한 사실이 알려졌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18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부마항쟁 4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부마민주항생 당시 미국이 국내 상황에 대해 상황이 매우 엄중하게 봤다고 밝혔다(사진= 연합뉴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18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부마항쟁 4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부마민주항생 당시 미국이 국내 상황에 대해 상황이 매우 엄중하게 봤다고 밝혔다(사진= 연합뉴스).

 

18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부마항쟁 4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이러한 내용을 발표했다.

정 교수는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과 한미갈등, 그리고 부마항쟁’이란 제목의 발제를 펼쳤다. 5·18 기록관 협조를 얻어 1979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 정부 기관 문서번역사업의 대상이 된 주한 미국 대사관과 미국 정부의 교신자료를 검토했으며, 이를 토대로 발제 자료로 내놨다.

교신 자료 중 1~2급 비밀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며, 박정희 대통령과 김형욱 처형·김재규와 관련된 일부 자료도 삭제된 상태에서 공개됐다.

정 교수에 따르면 부마항쟁이 발생한 1979년 10월 16일 부산 미문화원 공보담당관이 시위 발생 사실을 대사관에 전하면서 항쟁 소식이 미국 국무부에 바로 보고됐다.

다음날에는 부산의 시위가 훨씬 엄중하고 1만2천여 명이 참가했으며 사망자에 대한 소문이 엇갈리고 있고, 학생들 시위가 일반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도 강조가 돼 보고했다.

부마민주항쟁 사흘째인 18일에는 브라운 국방장관과 글라이스틴 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우려를 전달했다고도 나와 있다.

야당 지도자(김영삼) 축출에 대한 격렬한 반발과 국내 정치 상황을 언급하며, 대규모 탄압이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을 진정시키고 야당과 타협할 기회를 열어놓으라고 촉구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차분하게 반응하였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하지만 나흘째 추가 교신기록에는 박정희 대통령 반응이 기록에서 삭제된 채 공개됐다고 정 교수는 밝혔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0월 21일 태완선 유정회 의장을 만나 한국 정부가 자유화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고 야당의원 사퇴서를 일괄 반려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는데, 태완선의 답도 삭제 된 채 공개됐다. 아울러, 10월 26일부터 29일까지 미국 측 보고서도 아예 누락됐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1979년은 미중 수교로 표현되는 동아시아 냉전분단체제의 1차 해체가 이뤄지는 시기였다. 미국 카터 대통령은 미중 수교와 함께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남북미 대화를 통해 지역 평화를 달성하려고 했다”며,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미중 수교가 갖는 전략적 의미를 간과했고 안보 문제에 집착해 남북미 대화를 통한 평화구축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유신체제 하 대학생 통제와 부산·마산지역 대학생의 동향(오제연, 성균관대학교)’, ‘지역 정치과정에서 활용되는 부마 민주항쟁(이은진, 경남대학교)’, ‘5·18민중항쟁의 유산과 새로운 사회구성(최정기, 전남대학교)’, ‘역사적 기억 상실이 가져오는 민주주의 부재의 국가’ 등의 발표가 진행됐다. 또한, 이은진 경남대 명예교수가 좌장을 맡아 발표의 주요 내용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는 종합토론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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