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람의 해발 고도는 대략 2200 미터, 우리가 건너온 리쿠 콜라의 해발 고도는 대략 1100 미터, 그리고 삐르티는 1820 미터. 그러니까 우리는 오전 중에 1100 미터를 내려왔다가 다시 720 미터를 톺아 올라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 날 우리가 여장을 푼 껄접께 마을의 해발 고도는 2,600 미터였으니 오후에 다시 800 미터를 더 올랐다는 결론이다.
12시 30분에 삐르티 마을의 주막집에 들어섰다. 젊은 짐꾼 셋이 달밧떨커리를 먹고 있었던 이 주막집의 남편은 체뜨리, 부인은 순왈이었다. 우리도 같은 것을 시켜 놓고 마당에 나와 지도를 펼쳐 놓고 우리가 온 길을 되짚어 보았다.
랄람의 해발 고도는 대략 2200 미터, 우리가 건너온 리쿠 콜라의 해발 고도는 대략 1100 미터, 그리고 삐르티는 1820 미터. 그러니까 우리는 오전 중에 1100 미터를 내려왔다가 다시 720 미터로 올라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 날 우리가 여장을 푼 껄접께 마을의 해발 고도는 2,600 미터였으니 오후에 다시 800 미터를 올랐다는 결론이다.
밥을 배불리 먹고 나서 뙤약볕 속 비탈길을 오르자니 고역이었다. 자주 쉬었고, 쉬면서 준월을 잘라 먹으며 갈증을 달랬다. 지리가 가까워진 탓인지 그 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우리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진 여자나 노인들도 만났다.
산비탈의 경작지에서는 밭벼를 베고 있었다. 추수를 앞둔 꼬도(기장의 일종)가 자라는 드넓은 밭도 있었다.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던 해가 서서히 기울 무렵에 올펠 마을에 이르렀다.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이 마을에는 지리에서 오는 트랙터 도로가 나 있었다.
앙 다와에 의하면, 우리가 며칠 전에 건넜던 빠쁘레 마을의 쇠줄다리의 쇠줄을 비롯한 철제 부속들은 이 마을까지 트랙터로 왔다.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걸어온 비탈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노역으로 운반하였다.
올펠부터는 고원 지대를 연상시키는 지형이어서 길이 비교적 완만했다. 언덕 위에서 소치는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괴상한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의 눈길을 끌려고 그냥 내지르는 소리였다. 따망 부인도 만났다. 서서히 기우는 햇살이 부드럽게 빛나는 고원의 풀밭에서 따망 부인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껄접께에 도착하니 오후 5시. 작년에 시작했다는 길가의 주막집에 여장을 풀었다. 아직 처녀인 듯한 젊은 셀파니가 가져다 준 차를 마시다 보니 주막집 문 밖에 분홍색으로 물드는 설산이 보였다. 거의 날마다 봐서 그런지, 너무 지쳐서 그런지, 이 날은 설산 풍경도 이발소 그림을 보는 것처럼 심드렁했다.
밤이 되자 젊은 셀파니는 주막에서 멀지 않다는 본가로 가고 셀파니의 부모인 늙수그레한 셀파 부부가 왔다. 낮에는 뙤약볕에서 구슬땀을 흘렸는데 밤이 되자 화덕 옆을 떠나기 싫을 만큼 추웠다. 화덕 주변에는 동네 사람들도 모여 들어 함께 락시를 마셨다.
이 집 화덕은 철물로 만든 난로 형태이며 연통이 달려 있었다. 몇 년 전 영국 NGO에서 이 같은 취사용 난로 9 백 개를 인근 마을에 무상으로 보급했다고 들었다.
한밤중에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밖에 나가보니 자동차가 아니고 짐을 잔득 실은 트랙터였다. 그 트랙터는 내일 우리가 가게 될 도제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가 트랙터 운전수의 한 달 월급이 1만 루피(약 15만 원)라고 했다. ‘우리의 앙 다와 씨는 트랙터가 아니라 우리 같은 투어리스트들을 운전해서 그만큼 번다’고 하자 앙 다와 씨가 기분 좋게 웃었다.
침낭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우니 무르팍이 화끈거렸다. 종일 무리하게 걸었던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