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시간을 걷고 나서 리라 꾸마리 구릉이 내 목에 긴 머플러처럼 둘러준 카닥을 벗었다. 솔루 콜라를 건너는 출렁다리 위였다. 이 쪽 산비탈과 저 쪽 산비탈 사이를 흐르는 골짜기의 물이 발 밑에서 아우성치며 흘렀다. 골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었다.
모든 축제가 끝난 이튿날인 11월 12일은 월요일이었고 하늘이 맑았다. 이튿날인 화요일에는 네레 바잘에 장이 서는 날이니 장날 구경하고 가라고 한사코 붙드는 구릉네 식구들과 작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차만 마시고 7시에 일어서려 했으나 결국 뚝바를 한 사발 씩 먹고 8시에 떠나게 되었다. 안주인 리라 꾸마리 구릉이 하얀 카닥을 들고 나와 우리들 목에 하나하나 걸어 주었다.
11시 경, 그러니까 3시간을 걷고 나서, 리라 꾸마리 구릉이 내 목에 긴 머플러처럼 둘러준 카닥을 벗었다. 솔루 콜라를 건너는 출렁다리 위였다. 이 쪽 산비탈과 저 쪽 산비탈 사이를 흐르는 골짜기의 물이 발 밑에서 아우성치며 흘렀다. 골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었다. 바람이 금방 데려가지 못하게 매듭을 지어 카닥을 난간에 묶었다.
건너편 비탈을 한참 올라가서 돌아보니 내가 걸어둔 카닥이 출렁다리 난간에서 하얀 손수건처럼 나부꼈다. 히말라야 사람들이 카닥을 출렁다리에 묶는 데는 필시 무슨 연유가 있겠으나 나는 그냥 따라 해 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보니 작별하던 장면이 다시 떠오르면서 뭔가 찡한 것이 가슴 속을 스쳐갔다.
우리 셋은 구릉네 주막집에서 2박3일을 묵었다. 셋이서 8 끼니를 먹었고, 두 밤을 취하도록 마셨으며, 안방을 빌려서 잤다. 아침에 앙 다와 씨를 통해서 얼마를 내면 되겠냐고 물어봤더니 1천 5 백 루피(약 2만 1천 원)라고 했다. 김 선생이 '술도 많이 마셨는데 너무 싸다. 조금 더 드립시다.'라고 하여 2천 루피를 냈지만 그래도 미안했다.
솔루 콜라의 다리를 건넌 후에는 1시간 쯤 비탈을 오르느라 땀 깨나 쏟았다. 라이 족이 사는 팅라 마을의 그 비탈은 계단식 논으로 이어져 있었고, 물바토(큰길)로 이어지는 삼거리에 이르자 샘물이 있었다. 샘물로 땀을 씻고 다시 1시간을 걸어서 도착한 라미테 마을에서 라면을 먹었다. 라미테의 그 주막집에는 손님이 아주 많아서 오래 기다린 끝에 밥을 먹었다.
다시 세 시간을 걸어서 무레다라 마을에 도착했다. 전망 좋은 마을이었다. 눈앞에 설산 둣쿤다가 우뚝 서 있고, 우리가 지나온 마을인 로딩, 파부루, 살레리 등이 건너다 보였다. 우리가 여장을 푼 집은 마을 초입 길가에 있는 젊은 마갈 부부의 주막집이었다. 스물네 살 동갑이라는 이들은 갓 백일이 넘은 갓난아기를 두었고, 노모를 모시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우리는 그들의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서 화덕의 불빛을 바라보며 저녁을 맞았다. 이 날은 말린 물소 고기볶음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며 추위를 달래고 피로를 풀었다. 밤중에 시큼한 땀 냄새를 풍기는 짐꾼 두엇이 들어왔고, 그들과 함께 달밧떨커리를 먹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