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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음악] 김종삼 시인의 드빗시 山莊 7

박시우 시인
  • 입력 2019.04.23 16:46
  • 수정 2019.09.28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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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이자 뮤즈였던 ‘라산스카’… 순수하고 깨끗한 목소리
폭력 앞에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에 대한 고백

하늘을

파헤치는 스콮

소리

(중략)

마음 한줄기 비추이는

라산스카.

-『현대문학』 1961.12
 

루-부시안느의 개인 길바닥.

한 노인이 부는 서투른

목관 소리가 멎던 날.

-『자유문학』 1961.12
 

집이라곤

조그마한 비인 주막집 하나밖에 없는

초목(초목)의 나라

수변(수변)이 맑으므로

라산스카.

-『현대시』 제4집 1963.6
 

라산스카

늦가을이면 광채 속에

기어가는 벌레를 보다가
 

라산스카

오래 되어서 쓰러져가지만

세모진 벽돌집 뜰이 되어서

-『신동아』 1967.10
 

라산스카

인간되었던 모든 추함을 겪고서

작대기-ㄹ 집고서

-『풀과별』 1973.7

▲훌다 라산스카의 음반들은 대부분 SP반인데 훗날 LP와 CD로 재발매 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첼리스트 에마누엘 포이어만의 1939년 빅터유성기 음반으로 루돌프 제르킨(피아노)과 미샤 엘만(바이올린)의 반주로 훌다 라산스카의 노래 2곡이 수록돼 있다. ⓒ박시우
▲훌다 라산스카의 음반들은 대부분 SP반인데 훗날 LP와 CD로 재발매 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첼리스트 에마누엘 포이어만의 1939년 빅터유성기 음반으로 루돌프 제르킨(피아노)과 미샤 엘만(바이올린)의 반주로 훌다 라산스카의 노래 2곡이 수록돼 있다. ⓒ박시우

김종삼의 시 ‘라산스카’ 한 부분들입니다. 연작시 형태가 아닌 하나의 제목으로 개별 작품들을 여럿 쓰는 경우는 드뭅니다. 김종삼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라산스카는 종삼의 시세계와 직결되는 존재입니다. 정보와 지식이 부족했던 당대에는 수수께끼 같은 시어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계속 물어봤겠죠. 그럴 때마다 김종삼은 손사래를 쳤습니다. 한동안 라산스카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 수 없어 다양한 추측과 해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라산스카가 뭐냐고? 밑천을 왜 드러내. 그걸로 또 장사할 건데. 묻는 사람이 여럿 있어요. 안 가르쳐줘요.”

강석경 작가가 쓴 김종삼 시인에 대한 회상입니다.

라산스카는 미국에서 태어난 러시아계 유대인 소프라노 훌다 라산스카(1893~1974)로 밝혀졌습니다. 라산스카는 스무 살인 1913년에 결혼하여 헤어졌다가 재결합하는 아픔 속에서 두 딸을 낳았지만 남편은 마흔 살이 되던 1926년에 사망했습니다. 공식 음악활동이 1910년부터 1936년까지 20여 년에 불과했지만 순수하고 깨끗한 목소리를 지닌 성악가로 평가받았습니다.

김종삼은 왜 라산스카에 집착했을까. 미국 국적의 러시아계 유대인 라산스카의 출생 배경에서 구스타프 말러 같은 ‘3중의 디아스포라’라는 운명을 발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디아스포라 의식은 실향민 김종삼에게 ‘말러-라산스카-나’를 연결하는 고리이자 강한 동질성이 부여된 삼각축이었습니다.

▲도서출판 북치는소년이 펴낸 김종삼 정집.
▲도서출판 북치는소년이 펴낸 김종삼 정집.

이런 의식의 바탕에서 라산스카의 어두운 음색과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 너무 빨랐던 은퇴는 김종삼에게 연민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연민에서 출발한 일련의 라산스카 작품들은 개인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속죄의식과 정화의 과정으로 승화됩니다. 이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종교 영향과 거대한 폭력 앞에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에 대한 고백입니다.

김종삼은 음반도 귀하고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의 희소성까지 더해진 라산스카를 세상과 소통하는 존재로 곁에 두었습니다. 라산스카가 남긴 앨범은 대부분 유성기로 재생되는 SP반들입니다. SP반은 지글지글 끓는 특유의 잡음이 많지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실제 라산스카가 부르는 스코틀랜드 민요 『애니 로리』나 헨델의 『주께 감사드려라(Dank sei Dir, Herr)』, 슈베르트의 『위령기도(Litanei)』등을 들으면 어두운 페이소스가 흐르는 노래에 금방 감전되고 맙니다. 김종삼을 통해 먼 한국에서 신비스런 존재로 다시 태어난 라산스카는 시인에게 어머니로 다가왔던 그리운 존재이면서 동시에 시적 영감을 안겨준 뮤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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