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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유신 발표에 밀양 목욕탕 보일러 화부로 일했던 음유 시인 정태춘...어느듯 나이 예순여섯!

이원정
  • 입력 2019.02.25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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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피아] 이원정 기자= 데뷔 40주년을 맞은 가수 정태춘이 25일 '뉴스공장'에 출연해 네티즌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정태춘은 1954년생으로 올해 나이 예순 여섯살로 사회성 짙은 '한국적 포크'를 추구해온 가수이자 시인, 싱어송라이터, 문화운동가, 사회운동가다. 서정성과 사회성을 모두 아우르는 노랫말을 직접 쓰고 이를 국악적 특색이 녹아 있는 자연스러운 음률에 실어서 작품을 발표하기 때문에 한국의 대표적인 음유시인으로 불린다.

음악 활동에 그치지 않고 각종 문화운동과 사회운동에 열성적으로 헌신하는 운동가이기도 한 정태춘은 1990년대 초에 사전심의 폐지운동을 전개하여 1996년 헌법재판소의 '가요 사전심의 위헌 결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난 정태춘은 평택초등학교 5학년 때 미군부대를 다니던 큰 매형이 기타를 구해와 어린 시절부터 기타를 가지고 놀았다. 악보를 몰라도 한 번 들은 노래는 곧바로 연주를 할 만큼 타고난 음악성은 주목을 받았다.

평택중학교에 입학하자 그의 음악성을 눈여겨보았던 넷째 형의 권유로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매형 집에서 클래식 음반을 들으면서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평택고 2학년 때 현악반이 밴드부로 통합이 되면서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고 담배를 몰래 피우는 등 동네 음악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정태춘은 이 시기에 접한 팝송과 1970년대 초반 김민기를 포함한 포크송 가수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72년 서울대 음대에서 정식 레슨을 받으며 재수생활을 시작했지만 공부보다는 자신의 외모에 불만을 갖는 등 사춘기의 열병으로 방황했다.

1972년 10월 유신 발표 성명을 들으면서 재수 생활을 때려치우고 짐을 쌌다. 말도 없이 가출해 밀양의 목욕탕 보일러 화부로 일하다 셋째 형에 이끌려 고향 집으로 돌아와 농사일로 한동안 소일했다. 하지만 가시지 않은 열병 때문인지 삭발을 하거나 목포, 울릉도, 제주도로 가출하기도 했다. 그의 초기 곡들은 대부분 방황하던 이 시기, 재수를 시작하면서 짓기 시작한 것들이다.

고향 마을의 풍경과 방황하고 싶은 마음을 솔직하게, 일기나 시를 쓰듯이 털어놓을 때 그는 행복을 느꼈다. 그를 고향에서 확실히 떠나게 한 것은 군입대였다. 1975년 입대 후 인천부근 해안가와 고양경찰서 기동 타격대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기타도 없이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 '서해에서' 등 많은 곡들을 썼다.

1978년 6월 제대 후 안면이 있었던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으로 서라벌 레코드사와 인연을 맺고,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자작곡으로 데뷔음반을 냈다. 음반을 준비하던 중 신인가수 박은옥과 만나 연애를 시작해 1980년 5월 결혼했다.

1978년 데뷔곡 '시인의 마을'이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심의 끝에 상당 부분 개작되어 데뷔 음반에 수록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가요 사전심의 제도에 대한 반대 운동을 시작하였다.

1990년 '아, 대한민국', 1993년 '92년 장마, 종로에서' 등 비합법 음반을 내면서 사전심의 폐지운동을 전개해 1996년 헌법재판소의 '가요 사전심의 위헌 결정'이라는 성과를 얻어냈으며, 이 해 부부가 함께 민족예술상을 수상하였다.

1979년 MBC 신인가수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상을 수상했다.


이원정 기자 ashley17@horse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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