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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생극에 가다 (윤한로 詩)

서석훈
  • 입력 2011.04.1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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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생극에 가다

윤 한 로

갑작스런 강추위에 귀싸대기가 얼얼하다
골짜기 야산 억새더미
눈부스러기에 뒤덮혀 반짝이고
새로 생긴 생극 추모공원
저마다 숨소리 죽인 납골실
마치 대학교 도서관 같다
망자들 칸칸이 빼곡하다
꽃무더기 속에, 묵주알 속에 파묻힌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
이름과 그 길고 짧은 생몰 연대와
한창 때 스냅 사진들
읽는다, 짧을수록 천천히
(다들 책 놓은 지 오래 된 우리들인데
보아하니 먼지나 털어주는 겔게다)
어렸을 적, 늙었을 적, 처녀 적
살았을 때 가장 좋던 시절 택해
누구랄 것 없이 활짝 웃고 있으니!
오히려 가슴 애려
어정어정 걸어나온다

코를 훌쩍거리며
우리들 참 조용하다
우리네 지금 책 읽는 사람들 아니냐
도서관에서 누가 떠드냐
그래서 그런지 별 말이 없다
커피를 뽑아먹으면서도
오줌을 누면서도
가무잡잡한 박시몬씨조차 말이 없다

시작 메모
충청도 생극으로 아는 분 삼우에 갔다 왔다. 날씨가 갑작스럽게 추워 정말이지 귀싸대기가 얼얼했다. 아침 일찍 갔는데도 하루가 다 깨졌다. 추모공원은 새로 생긴 건물이라 조용하고 깨끗해서 꼭 대학교 도서관 같았다. 그 정도면 지금 전국에서 가장 좋은 납골당이리라. 삼우 미사를 마치고 납골실로 들어갔다. 칸칸이 빼곡하게 들어찬 납골함, 꽃무더기 속에 파묻힌 스냅 사진들. 그 앞에 숙연해지지 않는 사람 누가 있으랴. 죽음은 가장 낡았으면서도 가장 새롭구나. 대중에, 통속이라도 어쩔 수 없다.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의 죽음이 가슴 뭉클하게, 무언가를 읽게 만들었다. 나도 실로 오래간 만에 헛된 삶을 싹, 토하고 깨끗해져서 왔다. 미사도 봉헌하고 다른 때보다 말수도 줄였고 또 시몬씨와 같이 오줌도 누고.

작 성 자 : 서석훈 ranade@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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