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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시작 #21] 자살은 일종의 실험이다.

이용준
  • 입력 2017.11.20 00:00
  • 수정 2021.12.16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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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창녀의 잉태

우리를 만든 신에게 반항하고 복수할 방법은 삶을 끝내는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럴 것을 알았기에 선택한다. 신의 저주도 섭리도 아닌 우리 의지야말로 악의 공장이 되어 추악함과 더러움을 뱉을 것이다.

눈을 떴다. 아직 3시도 안 됐다. 진아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그리워졌다. 문밖을 나서니 봄의 탁한 공기가 느껴졌다. 겨울의 한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봄은 어둠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채 차갑고 탁하고 텁텁한 공기만을 실어 날랐다. 청량리에서 맡았던 냄새가 그리웠다. 진아가 늘 옷 속에, 머릿결 속에, 구두 안에 담고 다녔던 그 공기 냄새. 나는 오랜만에 진아를 찾아 나섰다.
이젠 익숙한 핑크빛 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단지 형광등에 도료(塗料)를 넣어 그렇게 보일 뿐이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싱싱하게 보이려는 것처럼 몸을 파는 여자들을 매혹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상술이 아이콘화된 것뿐이다. 무언가를 포장한다는 것 역시 중립적인 행위다. 고기를 파는 것도, 몸을 파는 것도 수요 법칙에 순응하는 것일 뿐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자기가 믿고 싶어 하는 대로 살지 않는가?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믿고 싶은 대로 살 뿐이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고 믿고 행동하는 행위에 대해 타자는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 발생하는 문젯거리에 대해 당사자가 책임만 진다면 그 목적과 결과 전체는 결국 선하게 되기 때문이다.
‘산다’는 단어는 영어로 리브(live)다. 엘(L) 아이(I) 브이(V) 이(E).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사는 존재로 만들어졌을 뿐이다. 정말 그것뿐이다. 삶의 반대는 악, 즉 이블(evil)이다. 이(E). 브이(V). 아이(I). 엘(L). 힘들다고, 제대로 살 수 없다고 자살을 택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는 그 어떤 동의도 없이 창조됐기 때문에, 영원히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살을 하는 건 단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 우리 상처만 드러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를 만든 신에게 반항하고 복수할 방법은 삶을 끝내는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럴 것을 알았기에 선택한다. 신의 저주도 섭리도 아닌 우리 의지야말로 악의 공장이 되어 추악함과 더러움을 뱉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마도 자살로 삶을 마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자살은 일종의 실험이다. 인간이 자연에 질문을 제기하고 그 대답을 강요하는 근엄한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이 과제의 목표는, 쇼펜하우어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존재와 인식이 죽음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어떻게 자살할지 생각하면서 걷다가 저 멀리서 진아가 서 있는 모습을 봤다. 진아는 골목길 구석에 있는 나를 금세 알아보고는 내 쪽으로 달려왔다. 빨간색 가발을 쓰고 빨간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알이 없는 빨간테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집에서 보던 모습과 아주 달랐지만 그 사람이 진아임을 금방 알았다. 그리고… 진아의 배가 조금 나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제까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 임신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
“준이야, 웬일이야? 이 시간에. 안자고 뭐했어?”
“일찍 잠들어서 아까 일어났어. 진아 보려고 왔지.”
“엄마가 보면 안 좋아할 거야. 저기, 편의점에 들어가자.”
진아는 나를 떠밀다시피 해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온장고에서 따듯한 캔커피 두 개를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순간 진아가 무척 낯설었다. 그리고 낯선 사람에게 끊임없는 욕정이 솟아올라왔다.
“정말 웬일로 온 거야? 나 보고 싶어서?”
“응….” 나는 캔커피를 따면서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오래 못 있는데…. 엄마한테 말하고 일찍 나올게. 30분만 기다려. 괜찮겠지?”
“그래, 여기 있을게.”
“금방 올게. 기다려.”
정확히 30분 뒤에 화장도 지우고 빨간색 가발과 구두, 안경도 벗은 진아가 왔다. 노란색 재킷과 갈색 코르덴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었다. 가발을 썼던 머리는 몇 개의 핀으로 눌려 있었다. 편의점 알바생은 지금 나타난 진아가 아까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고는 우리 사이가 궁금하면서도 부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신경 쓸 것 없었다. 어차피 이런 곳으로 알바하러 온 녀석들은 뻔하니까.
진아에게 할 말을 생각해야 했다. 정확히 말해서 할 말이라기보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쯤에서 어떻게 말을 꺼내고, 진아의 대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고, 내 입장은 어떤지 정확히 말해야 한다. 특히 진아가 상처받지 않도록 주의해서 말해야 한다.
“나 왔어. 이제 가자, 준이야.”
편의점 문을 조금 열고 얼굴만 빼곡히 내민 진아는 춥다는 듯 서두르며 말했다.
진아와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함께 집으로 가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왔다. 불안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기 싫었다. 진아도 나를 사랑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언제나 우리를 갈라놓을 수도 있다. 만남, 혹은 관계란 것은 신이 계획한 필연,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는 우연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헤어짐은 신이나 인간에게 있어서 모두 우연적 결과로 작용한다. 결국 신도 어쩌지 못한 관계성 때문에 우리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상실하게 되고 무능한 신을 저주하며 아파한다. 문득 우리 관계가 저속하고 이기적이며 토악질 나오는 순간을 예비한 것이라는 생각이 왔다면, 순전한 듯 고귀한 듯 애처로운 듯 모든 지향성을 들고나오는 저 쓰레기들을 맘껏 비웃어 주리라고 결심해야 한다.

“준이, 무슨 생각해? 할 말 있구나?”
말없이 서로 팔짱만 끼고 걷고 있자니 결국 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응, 그래….”
“나도 할 얘기 있어. 근데, 준이가 먼저 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할 건지 진아는 눈치를 챈 것이 분명했다.
“어제 낮에 여진이를 만났어….”
“그랬구나. 왠지 그럴 거 같았어. 어쩐지 종일 내 눈치를 보더라니….” 다급하게 내 말을 자른 진아가 대답했다.
“진아가 임신했고 그게 내 아이라는 것도. 그리고 진아가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는 얘기도 들었어.”
“…….”
“나한테도 책임이 있잖아. 처음 그 말을 듣고서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솔직히 지금도 그래. 수술해서 아이를 지우는 건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고 믿고…. 진아가 고통 받는 것도 싫고. 이미 4개월이나 됐으니 진아에게도 안 좋을 거야.”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진아도 알다시피 난 가정을 꾸릴 준비가 안 됐어. 결혼이 두렵고 평생 부모를 미워하면서 살아갈 텐데 무책임하게 누군가의 아버지가 된다는 게 싫어. 그건 정말 싫어….”
“그래서? 미워하는 감정은 만들어지는 거지 절대 그냥 생기지 않아.” 의외라는 듯, 진아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많이 생각했어. 진아가 아이를 낳겠다고 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난 아이 아버지가 된다는 게 두려워. 그게 싫을 뿐이야.”
“그래서 아이를 지우라고?”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우리는 집으로 가는 마지막 골목길에 들어섰다. 좁고 가파른 언덕길이 보였다.
“왜 준이와 섹스할 때 콘돔을 쓰지 않았을 거 같아?”
이미 지난 일에 대해 진아는 물었다.
“글쎄…. 모르겠어.” 단지 미세한 쾌락을 더 주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한편으로 나는 생각했다.
“준이를 좋아하니까. 우리 사이에 걸림돌이 되는 일은 전부 하기 싫었어. 그리고 나, 아이를 갖고 싶었거든. 기왕이면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말이야.”
“하지만 진아야, 우린 아직 어리잖아. 환경도 그렇고….”
“어른들이 하는 것처럼 말하지 마. 준이는 감정을 초월한 것 같아.”
“그래도 이게 현실인걸.”
“알아, 하지만 난 아이를 낳을 거야. 준이가 책임지지 않겠다고 해도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진아는 나와 처음 관계를 맺은 후에 드러냈던, 그 결의에 찬 표정을 다시 지어 보였다. 그런 그녀가 한없이 낯설었다. 우리 둘은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집에 와서 씻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있는데 진아가 먼저 조용히 말을 꺼냈다.
“교회에서 기도했어. 아이를 낳겠다고. 아니, 낳게 해달라고. 아직은 어리지만 좋은 부모가 되게 해 달라고. 일도 그만두고 준이가 원하는 대로 평범하게, 착하게 살 테니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흑흑….”
진아는 흐느꼈다. 나는 진아를 안아줘야만 했다.
“우리 조금 더 생각해보자. 나도 다시 생각해 볼게.”
“흑흑… 정말이지? 준이야, 나 안 버릴 거지?”
“진아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진아는 내 품으로 더 깊이 안겼다. 들썩이던 어깨도 차츰 안정됐다. 잠시 뒤 진아는 쌔근거리며 잠들었다. 온종일 고민하고 걱정하느라 맘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녀 머리를 쓰다듬다가 나도 잠들었다.

다시 그 꿈을 꿨다.
밤새 내린 비에 벚꽃이 졌다. 괴우였다. 벌레가 비에 씻겨 내려가는 모습에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거리에는 온통 빗물에 떠다니는 분홍색 벚꽃 잎들로 넘쳐 났다. 그 위를 미친 듯이 뛰어가는 여자, 진아는 나를 피해 계속 도망 다닌다. 이상한 얼굴을 한 아이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엄마를 찾아달라며 울부짖는 아이, 하지만 진아는 아이를 보지 못한다. 내가 시야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우는 소리만 들을 수 있는 진아는 내가 아이와 같이 울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더욱 겁을 먹고는 나로부터 멀어진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이내 빗물에 미끄러져 넘어진 진아는 발목을 다친 듯 주저앉아 움직이질 못한다. 내가 다가간다. 진아가 걱정됐기 때문이다. 5m, 4m, 3m, 2m….
퉁퉁 부은 발목이 자세히 보일 때, 진아는 무섭다는 듯 외마디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그 소리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저주와 원한, 공포와 거부감으로 혼합된 비명은 내 귀를 먹게 하더니 이내 귀를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소리는 단칼이 되어 스스로 무언가를 베고 있다. 나는 귀가 찢어진 고통에 울부짖는다. 하지만 입에서는 아이 울음소리가 나올 뿐이다. 진아는 발목을 움켜잡은 채 기어가면서 내게서 또 멀어지려 한다. 2m, 4m, 20m, 50m, 100m…. 진아가 기어간 자리에는 하혈한 듯 온통 피로 물들었다. 온통 보랏빛이다. 보라색 피를 가진 여자는 저주를 받은 것이 틀림없어 하고 나는 생각한다. 진아로부터 고개를 돌려 아이가 있는 곳을 쳐다본다. 하지만 아이는 온데간데없다. 아니, 아이는 처음부터 없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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