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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시작 #13] 잘 지우는 것이 기억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이용준
  • 입력 2017.11.03 00:00
  • 수정 2021.12.16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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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데미우르고스의 합일(合一)

예수는 왜 목수가 되었을까? 수많은 직업 중에서 왜 그 직업을 택한 것일까? 목수는 데미우르고스의 속성을 너무나 잘 드러내기 때문에, 신이 선택하기에는 너무나 싱거운 일이 아니었을까?

깊은 신음이 안에서부터 울려 나온다. 끈적끈적한 땀방울은 마치 내 안 깊은 곳에서 시작한 속울음들이 피부를 뚫고 나온 것처럼, 우리의 순결이 끝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진하게 솟구쳐 올라온다.
다른 쾌락의 소리도 들린다. 모든 여자의 소리는 어쩌면 이리도 같은 것일까? 눈을 지긋하게 감고 한쪽 이마엔 주름살이 패일 만큼 인상을 찡그린 소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이 우주는 그 본래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데 가끔, 다른 소우주란 개체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의 블랙홀을 만들어 내고, 엔트로피는 증가해 무질서는 팽창되고, 폭발을 맞이한다. 준비된 일련의 과정들은 다른 오류나 착오 없이 진행된다. 지구인이 그 어떤 과정에라도 개입해 무언가를 흐트러뜨리려 해도 그것은 일사천리로 그리고 매우 정교하게 진행되기 일쑤였다. 이제껏 그 무언가를, 그 어떤 과정을 흐트러뜨린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는 나사렛의 목수였던 예수다.
그는 브리꼴뢰르(bricoleur)였다. 예수는 왜 목수가 되었을까? 수많은 직업 중에서 왜 그 직업을 택한 것일까? 목수는 데미우르고스의 속성을 너무나 잘 드러내기 때문에, 신이 선택하기에는 너무나 싱거운 일이 아니었을까?
신의 속성은 단 하나, 그것은 사랑이다. 그 아래 범주에 속한 모든 여타의 속성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공유적이니 비공유적 속성이니 하는 건 추상화된 신학적 논의일 뿐이다. 그 단 하나의 속성으로 완전해진 신, 그러나 인간은 속성의 다양성으로 인해 불완전하다. 신의 속성으로서의 사랑에는 미움과 악, 관계도 포함한다. 대상과 관계없는 사랑은 무의미하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난해한 점을 메울 수 있는 것은 은혜나 신비가 아니라 그래서 사랑이다.

“나, 많이 아팠었어.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도 김제인데 네 살 때쯤 서울 사당동으로 이사 왔어. 열두 살 때부터 아무 이유도 없이 몸이 마비되곤 했었어. 침대에 누워서 잠들어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매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프고, 심장은 터질 것 같았었어. 오후가 되고 해가 질 때야 신기하게도 몸이 풀렸었어. 가위를 눌린 것과는 달랐는데 결국 증상이 심해졌어. 처음엔 한 달에 한두 번 그랬는데 그 횟수가 당겨졌어. 학교도 못 가는 날이 점차 많아졌고. 이러다 죽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지. 엄마랑 아빠랑 서울의 큰 병원에 다니면서 검사도 했는데 병의 원인을 밝혀내질 못했었어.
그렇게 한 삼 년 동안 휴학하고 여러 병원에 다니고, 약도 먹어보고, 심지어 굿까지 했는데 호전되기는커녕 움직이는 게 어려울 정도로 증세가 심해졌어. 숨도 가빠지면서 숨쉬기도 어려웠고…. 아빠는 매일 술을 마시고는 내가 아픈 건 자신 때문이라며 자책하다가 결국 빚을 감당 못 하고 한강에서 투신했어. 아빠가 그렇게 죽고 난 뒤에 엄마도 날 병원에 입원시킨 뒤 사라졌고…. 집에 전화해도 엄마랑 연락이 안 됐어. 몰래 병원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아무도 없는 거야. 텅 빈 집에 혼자 남아서 사흘간 아무것도 안 먹고 멍하니 앉아 있었어. 우스운 건 사흘째 되는 날,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가다가 그제야 냉장고에서 엄마가 쓴 쪽지를 발견하고 결국 모든 기대와 희망을 접어버렸다는 거야. 그런데 엄마, 아빠가 사라지고 나서 병이 갑자기 나았어. 정말, 정말 신기하게도 말이지.
혼자 집에 있는 내내 밥을 거의 먹지 않았는데 몸이 꽤 좋아진 걸 알게 됐어. 며칠 뒤에 집을 나와 전국을 떠돌며 여행을 시작했어. 엄마, 아빠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거든…. 같은 반 친구였던 세아도 함께 여행을 떠났어. 세아는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잘 사는 집에 입양돼서 꽤 풍족하게 살았거든. 하지만 양부모가 종종 세아를 심하게 때리는 것이 문제였지. 세아도 양부모에게 정을 못 붙이고 살았고. 그래서 같이 여행을 가게 된 거야.
여러 곳을 다녔어. 엄마가 내 앞으로 저축한 통장에 이백만 원 정도 남아 있었는데 최대한 아껴 쓰면서 다녔어. 먼저 고향 김제로 갔다가 해남까지 갔었어. 그리고 진해랑 마산을 지나 부산까지 갔던 거 같아. 밥은 하루에 한 끼 정도만 먹었고 잠은 여인숙 같은 데서 잤어. 경치 구경도 꽤 했고. 여러 군데 돌아다니며 엄마가 있을 것 같은 곳을 찾아보기도 했는데, 물론 허사였지. 한 달이 지나서 돈이 떨어지자 세아는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어. 울산 근처였던 것 같아. 주유소에서 숙식이 해결된다기에 나도 같이 일을 했어. 주유소 2층에서 지내는 숙소 생활이 나쁘지는 않았어. 기름 냄새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는 것만 빼고는 말이야.
일한 지 두 달쯤 됐을까. 아침 일찍 시내에 있는 목욕탕엘 갔다가 숙소에 왔는데 문이 열린 채로 세아와 주유소 주인이랑 섹스를 하고 있었어. 두 사람은 내가 온줄 모르고 있더라.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지.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다시 시내로 왔어.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왠지 기분이 이상했지. 어렸을 때부터 일요일 아침이면 그런 느낌을 받곤 했었는데 그건 마치 뭐랄까… 음, 마치 일요일에는 이 세상에 사는 것 같지 않지 않다고 해야 할까?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 광활한 자연 속에 혼자 떨어져 있다거나 외국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그 지독하고도 고독한 느낌인 거 같아. 아무튼 그렇게 혼자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숙소로 가려는데 나쁜 사람들이 날 납치했어. 봉고차 한 대가 옆에 서더니 운전하던 남자가 길을 물어보는 거야. 공설운동장이 근처 어디 있냐고. 잘 모른다고 대답하고 가던 길을 가는데 뒤에서 두 사람이 입을 틀어막고 강제로 차에 태웠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원룸 같은 곳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몸이 다시 너무나 아팠어. 그곳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고…. 너무 놀라서 울기만 했어. 엄마, 아빠가 날 버리고 갔을 때도 울지 않았었는데…. 울음소리 때문에 시끄러웠는지 갑자기 문을 따고 남자 두 명이 들어와 나를 때리기 시작했어. 그렇게 맞다가 강간을 당하고, 다시 정신을 잃고….
결국 며칠 전에 이곳으로 끌려왔어. 이곳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지만 너무 무서워. 곳곳에 삼촌들이 숨어서 나같이 붙잡혀 온 애들을 감시하고 있거든…. 도망칠까도 생각했지만 달리 갈 곳도 없고. 나 어떡해야 해? 준이야? 준이야? 자니? 자는구나…. 나, 엄마 아빠가 보고 싶지는 않아. 언젠가 만날 거라는 걸 알거든. 그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그렇게 지내는 게 내 팔자인가 봐. 집에는 돌아가고 싶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내가 청소하고 음식도 하고 잘 수 있는 내 집으로 말이야….”
진아의 기나긴 과거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우리의 섹스도, 우리의 순결함과 동경했던 미래도 모두 멈추게 됐다.

“아직 자? 이제 일어나야 해.”
“으… 으응.”
옆에서 진아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잠깐 잠이 들었다. 여전히 발가벗은 채로, 남의 침대에 누워서. 언제부터 진아는 저렇게 내게 안긴 채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것일까.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관심이 없다고 생각할 텐데….
“지금 몇 시야? 나 얼마나 잤어?”
“9시가 다 됐어. 한 15분쯤 잔 거 같아. 바보, 잠만 자고….”
“미안해. 오늘 새벽부터 돌아다녀서 많이 피곤했나 봐….”
“나, 그만 나가봐야 할 거 같아. 준이도 옷 입고 나와. 그리고 이거 내 삐삐번호야.”
“그래, 고마워.”
진아는 얇은 이불을 몸에 두른 채 일어나 몸을 돌리고 옷을 입었다. 섹스할 때엔 그녀의 몸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이제야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진아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보라색 머리는 거의 허리에 닿을 만큼 길어서 등에 뻗어있는 척추의 선명한 굴곡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왠지 진아는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강한 여자로 다시 태어나 세상을 직시하려는 느낌이었다. 내가 잠들어 있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무슨 결심을 한 것일까.
삐삐번호가 적힌 종이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셔츠를 입고 핑크빛 대문을 나섰다. 먼저 나간 진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기다렸다가 인사라도 하고 갈까 했지만 오늘은 그냥 가기로 했다. 다시 만날 것이라는 기대가 생긴 것만으로도 우리 인연은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왔던 길을 돌아서, 무언가에 대한 갈망의 마음을 접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두 시간가량, 이 모든 경험을 글로 코딩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억하기 위해 애를 쓴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현상이 머릿속에서 글로 변환되는 동안에는 세계가 정지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쓰는 것보다 지우는 일을 잘해야 한다. 잘 지우는 것이 기억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진아의 얼굴도 서서히 잊혀졌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방에 들어왔을 땐 진아의 얼굴도, 체온도, 냄새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그런 상태만을 안타까워하는 정신만이 남아 새 공간에서 활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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