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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대통령이다 #에필로그] 나는 왜 꿈에서도 생각하는 인간이 됐을까

이용준
  • 입력 2017.07.21 00:00
  • 수정 2020.07.15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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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었다. 나는 왜 꿈에서도 생각하는 인간이 됐을까. 날이 선 회칼로 여자를 찌르고, 토막을 내기 전에 잠에서 깨서 다행이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됐다. 축사 의식 도중 여자의 몸에서 빠져나간 악령이 내게 들어온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생겼다.

“왜 끝까지 말하지 않았어?”
“그게 서로를 위해 좋을 것 같았어….”
“재임이, 내 아이 맞지? 눈매부터 입술 모양, 모든 생김새가 전부 날 닮았어!”
“맞아….”
“영민이는 이 사실 알아?”
“말한 적 없지만… 아마도 짐작하고 있을 거야.”
“왜 날 선택하지 않았어? 내가 신부 출신이라서? 불쌍해 보였니? 집도 없고 차도 없는 가난한 샐러리맨이라서?”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나 같은 걸 기다려 주고 큰 사랑을 보여 준 사람, 영민이뿐이라는 거 잘 알잖아.”
“영민이뿐이라고? 나는 기다리지 않았어? 니가 부탁한 대로 임신한 몸으로 성매매하고 다닌 것까지 난 비밀로 지켰다고! 내 첫 여자가 너라는 거 몰라? 첫사랑의 상대를 두고 평생을 각오하고 맹세한, 이제는 잊어버린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모르니? 내 첫사랑이 다른 놈에게 구걸하고 00를 벌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수동적으로 당할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고!”
“…….”
“너 같은 년 때문에 난 평생의 서원도 포기했다고!”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한 탓이야. 철이 없었어….”
“이게 미안하다고 될 일이니?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리 뻔뻔할 수 있어? 남자를 이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주마!”
“무릎 꿇고 이렇게 빌게…. 정말 잘못했어.”
“넌 날 기만했어! 영민이도, 내 아이도!”
“한평생 속죄하면서 살고 싶어.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게. 용성아, 우린 친구잖아. 이해해줄 수 없니.”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네까짓 게 뭐라고! 차라리 같이 죽자!”
“그러지 마, 제발… 용성아….”
“이거 놔! 씨팔, 너 같은 여자는 죽어야 해!”
“아아악!!!”

꿈이었다. 나는 왜 꿈에서도 생각하는 인간이 됐을까. 날이 선 회칼로 여자를 찌르고, 토막을 내기 전에 잠에서 깨서 다행이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됐다. 꿈에서 깨니 기실 나도 여자를 많이 기다렸고 좋아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축사 의식 도중 여자의 몸에서 빠져나간 악령이 내게 들어온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생겼다.

여자는 왜 재임이가 내 아이라고 끝까지 말하지 않았을까. 이제 하느님의 사제도 아니기에 고해할 필요가 더는 없었던 걸까. 성당에서 고해하든 새사람이 됐든 오늘날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억은 몸을 섞은 것뿐이다. 저 아이 역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 끔찍이도 소중해 남에게 그저 한번 스쳐가는 은혜를 베푼 결과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 셋 모두가 공유하는,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기에 숨길 이유는 없지 않던가. 평생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내 생각이 날 텐데 무슨 이유에서일까. 왜 남자를 선택한 걸까. 내가 여자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내가 사랑보다 믿음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느낀 건 아닐까.

티베트로 신혼여행을 떠난 두 사람이 갑자기 그리워졌다.

by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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