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전연인 트라우마

이진성
  • 입력 2024.03.21 02:4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4. 03.21. 01:43.

전연인 트라우마. 오디션장에서 일어난 최근 일이다. 오디션 내용은 소개팅 자리에서 불필요한 이야기로 상대방의 비호감을 사는 역할이었고 자신의 상처를 서슴없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털어놓는 내용이었다. 자신은 이렇게 힘들었다고, 내 사랑은 특별했다고 아픔을 자랑하는 연기라고 하면 딱 맞겠다. 속칭 자기 연민.

추운 날이어서 지퍼를 입술까지 올리고 후후 붙어가면서 얼굴로 김을 보냈다. 추운 날은 정말이지 싫다. 대기실에는 나보다 더 긴장해 보이는 청년이 대기실 스텝에게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었다. 자기는 어떤 사람이고 등등 별 시답잖은 얘기까지. 그 사람이 먼저 오디션을 보러 들어갔고 짧은 시간이 지나자 상기된 얼굴로 나왔다. 울먹이는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여하튼 이진성 배우님 들어오세요.'라는 호명과 함께 나는 스쳐 지나갔고 의자에 앉아 질문을 받던 도중에 한 문장이 의식됐다. '전 연인 중에 트라우마가 있던 존재가 있었나요.' 짧은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생각을 했고 시간을 끌기 위해 '썸도 포함인가요?'하고 뱉었으나 이렇다 할 트라우마가 내겐 없었다. 분명 있을 거라고 확신한 질문이었으나 기억의 바닥까지 훑어봐도 그런 기억은 없었다.

자고로 트라우마는 현재의 내 삶에도 영향을 끼쳐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는 없었다. 덕분에 고마웠고 최선을 다했으며 그분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당시는 분명 힘들었고 세상 끝난 듯이 힘들어했었다. 심지어 썸 타다 잘 안되어도 아픈 마음은 크기가 대단했다. 그 생생했던 마음은 차츰 나에 대한 부족함을 탓하게 했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나를 발전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김태용 감독님과 남도 영화제에서 한 잔 할 수 있는 잠시 기회가 있었다. 나는 제법 취해서, 내 실패한 연애 이야기를 주사로 늘어놨다. 감독님께선 '왜 본인만 피해자예요?'라고 반문하셨고 나에겐 어떤 울림이 됐다. 왜 나는 피해자를 자처하여 전 연인들을 가해자로 몰았을까. 끝나는 순간에도, 끝나고 나서도 참 못났었다. 이 생각들이 날 트라우마로부터 끄집어냈다.

때마침 앞서 오디션 봤던 그 남자가 '전여친 트라우마 때문에 오디션을 진행할 수 없어서 잠시 쉬었고 이제 진정되어서 할 수 있어요.'라는 뻔한 연기를 했다. 얘는 진짜 미친놈인가???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