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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년 낙양은 고구려의 수도였나? 북위의 수도였나? 코리아의 역사를 차이나 대륙에서 지워라. 코리아 한자漢字 (15) 일본을 편드는 국사편찬위원회 (119)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4.02.11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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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락 18년, 기원후 408년, 유주자사 진이 코리아 평양(남포) 덕흥리 무덤에 묻힐 때 차이나 낙양에는 어느 왕조가 있었나.

 

덕흥리 무덤 벽에 묵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이 13개 군은 유주에 속하며, 부현部縣이 75개다. (옛날에는) 유주의 관할 구역은治 계薊 지역 전부이다.廣薊. 지금의 관할구역은 연나라이다. 燕國 연나라는 낙양에서 2천3백리 떨어져 있다. 燕國 去 洛陽 二千三百里 도위都尉가 일부를 합쳐 13군이 되었다. 此 十三郡 屬 幽州 部縣 七十五 州治 廣薊 今治 燕國 去 洛陽二千三百里 都尉 一部 幷 十三郡.”

 

연나라가 유주관할임을 밝힌 것은 좋은데 왜 낙양 기준으로 2천300리라고 했을까? 낙양이 고구려의 수도였던가? 아니면 낙양이 차이나 어느 왕조의 수도였고 그 왕조를 고구려가 사대事大 (큰 것을 섬김)한 결과인가?

 

2. 아쉬운대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자. 기원후 408년은 광개토왕 재위 시절이다. 408년 이전 고구려가 차이나 왕조에 사대事大 (큰 것을 섬김)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도리어 심각한 전쟁기록이 있다.

 

1) 기원후 246년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무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략한 것이다. 덕흥리 고분의 주인공 유주자사 진은 408년에 한반도 평양(남포)에 묻혔다. 246년에 유주는 위나라 땅이었고, 408년 직전 어느 해에는 고구려의 땅이었다는 결론이 된다.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2) 무구검은 현도에서 출병했다. 비류수沸流水 강가와 양맥 골짜기梁貊之谷에서 고구려 동천왕에게 대패했다. 그러나 이후 전투에서 동천왕은 패하여 압록원鴨渌原으로 도망갔다.

 

3) 비류수沸流水의 비류는 광개토왕 비문에 나오는 비류곡의 비류이다. 추모왕 (동명성왕, 주몽)은 북부여에서 나와 부여 엄리대수 夫餘 奄利大水를 건너 비류 골짜기 홀본 서쪽에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만들었다. 然後 造渡 於 沸流谷 忽本西 城山上 而 建都焉.

 

비류수는 고구려 첫 도읍지 비류 골짜기를 흐르는 강임이 틀림 없다. 고구려 본기의 양맥골짜기는 비류 골짜기와 같은 곳이거나 가까운 곳임이 틀림없다. 양맥梁貊의 맥貊은 예맥濊貊의 맥貊과 같다. 양맥梁貊의 양梁은 대량수, 소량수 등으로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지명(인명)이다.

 

수리공정에서 위나라사람들의 열정과 기술은 모두 일류였다. 그들은 대량 부근의 황하에서부터 수백리의 운하를 판다. 이는 남쪽의 회하까지 연결된다. 이름은 홍구(鴻溝)이다. 즉, 대량성의 호성하에서 출발하여, 배에서 발을 떼지 않고도 초나라의 진(陳)등 성읍에 도착할 수 있다.

진멸위(秦滅魏): 수엄대량(水淹大梁) by 중은우시 2016. 5. 28.

https://shanghaicrab.tistory.com/16155640

 

4) 동천왕은 압록원鴨渌原으로 도망갔다. 압록원鴨渌原은 압록수鴨渌水 즉 압록강 (江)이 흐르는 곳임이 틀림 없다. 지금의 압록강 유역에 벌판原으로 불릴 만한 곳은 지금의 통구(집안)시 일대이다.

 

이 곳은 코리아 식민사학자들이 고구려의 첫 수도 국내성이라고 주장하는 곳이다.

 

최소한 전쟁기록만 보면, 설사 동천왕이 도망간 압록원이 지금의 통구(집안)시 일대라고 해도, 고구려의 첫 수도 비류곡 홀본서쪽 산은 통구(집안)시 일대에서 매우 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위나라 장수 무구검이 출병한 기지인 현도군은 비류곡 홀본서쪽 산보다 더 떨어져 있어야 한다.

 

한4군 낙랑·진번·임둔·현도는 한반도에 있었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인 것이다. 코리아 식민사학자들은 이 무구검 침공기록과 광개토왕 비문을 연결하는 해석을 하지 않는다. 코리아 식민사학자들은 알면서도 모른체하는 것이다.

 

3. 고구려 2대 유리왕이 기원후 22년에 국내(國內)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옮긴 수도를 247년 동천왕은 평양으로 옮겼다. 고구려 본기는 무구검에게 침공당한 성이 환도성임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고, 유리왕과 동천왕 사이 220 여년간 수도를 옮긴 기록이 없음으로, 국내(國內) 위나암성(尉那巖城)은 환도성임이 분명하다.

 

[환도성 = 국내 위나암성]이 추모왕(주몽)이 도읍한 비류곡 홀본서쪽 산에서 돼지가 하루 이틀 도망칠 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류곡과 [환도성 = 국내 위나암성]이 100㎞ 이내에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동천왕이 평양성을 쌓을 때 [환도성 = 국내 위나암성]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평양성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부록1)

 

4. 덕흥리 고분이 만들어진 408년 이전 고구려가 차이나 왕조에 事大 (큰 것을 섬김)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4세기 후반까지 전연과 쟁패하지만 밀려서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연의 고구려 침공 기록과 관련하여 고구려가 차이나 한복판 중원 가까이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 있다. 고국원왕 12년 342년조 기록이다.

 

1) 당시 전연은 지금의 북경시 기준으로 서쪽과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전연이 중원 (지금의 서안시 낙양시 일대)을 침공하기 위해 먼저 고구려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전연과 중원 사이에 고구려가 있어야만 가능한 주장이다. 최소한 전연과 중원이 맞닿아 있으며 전연의 바로 옆에 고구려가 국경이 접해 있어야만 가능한 주장이다.

 

2) 만약 전연이 지금의 북경시 동쪽과 북쪽에 있었다면, 고구려는 지금의 차이나 산서성 태원시 등에 있어야 하고, 전연이 중원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구려를 견제해야 하는 것이다.

 

3) 고구려 본기의 이 기록은 특별히 조작할 동기가 없다. 전연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구려가 패한 기록임으로 이성계 조선이나 일제가 조작할 동기가 없는 것이다. 물론 고구려가 전연을 지배하고 승리하였는데 이를 조작하여 고구려가 패배한 것으로 조작했을 가능성은 있다. 하여튼 고구려와 전연이 전쟁을 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 것이다.

 

4) 〔12년(342)〕겨울 10월에 연(燕)의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장군(立威將軍)인 〔모용〕한(慕容翰)이 청하기를 먼저 고구려를 공취하고, 그 다음 우문부(宇文部)를 멸망시킨 연후에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당시〕고구려에는 두 개의 길이 있었는데, 북도(北道)는 평평하고 넓고, 남도(南道)는 험하고 좁아 군신(群臣)들은 북도를 경유하려고 하였다.

冬十月, 燕王皝 遷都 龍城. 立威將軍 翰 請先取 髙句麗, 後滅 宇文, 然後 中原 可圖. 髙句麗有二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 衆欲從 北道. 翰曰, “虜 以常情 料之, 必謂 大軍從北道, 當 重北 而 輕南. (후략)

 

5) 이 전쟁기록을 자세히 살펴보자. 고구려가 대패하여 모용황은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시체와 어머니와 남녀 5만명을 끌고 돌아 갔다. 사실상 나라가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패한 것이다. 환도성은 247년 동천왕때 위나라 무구검에게, 그리고 342년에 전연의 모용황에게 두 번 함락 당했다.

 

무엇인가 이상하지 않은가? 동천왕이 환도성을 복구할 수 없어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왜 고국원왕은 꾸역꾸역 환도성으로 다시 돌아갔을까?

 

6) 미천왕은 미천 들판羙川之原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연이 미천왕의 시체를 가지고 갔으니 미천 들판과 환도성은 가까이 있다는 반증이 된다.

 

7) 미천 들판이 아니고 고천들판 인지도 연구 대상이다. 羙 은 발음이 ‘미’가 아니고 ‘고’이다.

羙 주자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美로 되어 있다.

羙 새끼 양, 검은 양 ‘고’ (발음). (양 양) + 火(불 화)

331년. 고구려본기 미천왕 三十二年, 春二月, 王薨. 葬於羙川之原, 號曰美川王.

 

8) 이 전쟁에서 수군은 나오지 않는다. 해海를 건넜다는 기록이 없다. 전형적으로 산길을 지났다는 기록이다. 북도와 남도가 그 증거이다. 이는 당시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이 한반도가 아니라 차이나 대륙에 있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차이나 왕조가 코리아를 침공한 다른 기록에서는 꼭 수군이 나오고 [해海]를 [떠 왔다 (浮 혹은 渡)] 는 기록이 있다. (계속)

 

부록 1

고구려본기 유리왕 21년(2) 봄 3월에 교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왕이 장생(掌牲)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이를 뒤쫓게 하였다. 〔설지가〕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찾아내어 국내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는 돌아와 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또 큰 사슴·사슴·물고기·자라가 많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도읍을 옮기시면 백성의 이익이 무궁할 뿐 아니라, 전쟁[兵革]의 걱정도 면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고구려본기 유리왕 22년(3) 겨울 10월에 왕이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광개토왕 비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即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고구려본기 동천왕조)

20년(246) 가을 8월에 위(魏)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을 보내 10,000명을 거느리고 현도(玄菟)로부터 침략해왔다. 왕이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싸워 패배시키니 베어버린 머리가 3천여 급(級)이었다.

二十年, 秋八月, 魏遣 幽州刺史 毋丘儉, 將 萬人, 出玄菟 來侵. 王 將 歩騎二萬人, 逆戰於 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 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 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鐡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决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 鴨渌原.

 

부록 2 고국원왕 조

1)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수장으로, 전연(前燕)을 세운 모용황(慕容皝)의 아버지 모용외(慕容廆)가 봉상왕 때, 293년 및 298년 두 차례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2) 336년 고국원왕이 사신을 보내 진(晉)에 가서 토산물을 바쳤다 遣使如晉, 貢方物

3) 339년 연나라 모용황이 침략해 왔다. 고국원왕이 맹세를 구걸하자 돌아갔다. 구걸乞 이라는 표현에서 역사왜곡이라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다. 九年, 燕王皝來侵, 兵及新城. 王乞盟乃還.

4) 340년에 고국원왕이 세자(世子)를 보내 연(燕)의 왕〔모용〕황을 조현(朝見)하게 하였다 十年, 王遣世子, 朝於燕王皝.

5) 342년 환도성과 국내성이 다른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十二年, 春二月, 修葺丸都城, 又築國内城. 국내성이 국내 위나암성이라면 환도성은 국내 위나암성이라는 해석은 수정되어야 한다.

6) 342년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秋八月, 移居丸都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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