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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꽃 따는 날

김정은 전문 기자
  • 입력 2024.01.23 17:55
  • 수정 2024.01.2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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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란 시집

(출처=도서출판 천우)
(출처=도서출판 천우)

 

주정란 시인은 월간 ‘시가 흐르는 서울’에서 신인상으로 등단한 철원문인협회 회원이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이채익 표창을 받고 ‘사과꽃 따는 날’ 시집이 있고 ‘신춘문예대상 3인 공저’ 책이 있다.

치과나 복권 등 유머러스 한 시도 많다. 귀여운 병아리를 수백 마리 키우며 동심을 간직한 시인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주제인 가족과 세상에 대한 따듯한 사랑이 느껴지는 시가 많다.

 

아버지 목소리

 

친정 엄마와 2박 3일 연극을 보고 난 후에

한참을 생각해 보니 나는 한 번도 부모님과

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 저 소원이 있어요.”

“소원? 그래 딸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하시며 웃으셨다

 

그래서 명보극장 건물에 있는 뮤지컬 공연장에 갔는데

“여기는 내 나이 열다섯 살 때 전쟁이 나서 나보도 더

큰 통을 메고 아이스깨끼를 외치며 다녔는데 정란이

덕분에 다시 와보네” 하셨다

 

번성기 때에 하도 소리를 크게 질러서

쉰 목소리가 되셨다고 하신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목소리의 비밀을 알게 되어

살짝 눈물이 났다

 

첢었던 그 청년은 백발이 되어

한참을 광장에 머물러 계셨다

 

순두부 한 봉지

 

오랜 갈등 속에

몇 년 동안 시댁에서 살다가 조금 떨어진 곳으로 분가를 했다

가까운 곳이라 이사를 나왔어도

발길을 아예 끊을 수가 없었기에 매일 오고갔다

 

어머니가 밭일을 나가셔서 홀로 적적하실까 봐

장에 나오시는 할머니에게서

순두부 한 봉지 사들고 들어가

아버님과 남편과 나 셋이서 점심을 먹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마루에 앉아 계시는 아버님께

“저희 이제 나갈게요. 내일 또 올게요.”

 

“그래 순두부 잘 먹었다.”

매일 같이 있을 땐 몰랐는데

그날따라 힘없이 앉아 대답하시는

아버님의 뒷모습이 짠하게 느껴졌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에게 “아버님 뒷모습이 왠지 안쓰러워서 눈물이 나.”

하면서 울었다

그러다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같이 울고 있었다

 

탁구공

 

초등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처음으로 배웠던 날

선생님 서브, 눈 깜짝할 새 날아오는 공을 받지 못했다고

어린 나를 매정하게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를 때렸다

어떻게 처음부터 잘하기를 바라는 것인지

 

그 작은 것이 뭐라고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가 없는 충격을 받아 40년 동안 작은

응어리로 남겨져 있었다

 

어느 날, 무서웠던 호랑이 선생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순간 악몽이 떠올랐지만 이미 백발이 무성한 할아버지로

변한 모습에 마음이 울컥해졌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한마디

“예전에 내가 너무 심했지 미안하다”

볼링공보다 무거웠던 마음속 탁구공이 사라졌다

 

볼링공보다 무거운 탁구공이라니, 비유가 탁월하다. 탁구공만한 게 뭐라고 볼링공처럼 마음을 짓누르는지 안타깝다. 필자도 초등학교 1학년 때 예뻐해주셨던 담임에게 배구공을 맞은 적 있다.

집에 와서 펑펑 우니 엄마가 물으셨고 고자질처럼 느껴져서 참았지만 끝내 물어 대답했다. 아버지가 군인이고 엄마가 육성회장이라 나름 파워가 있었지만 이르지 않으려 했는데. 

선생님은 날 너무 예뻐해서 꼭 배구선수를 시키고 싶었는데 공을 무서워하는 내가 오는 공마다 쳐내니 화나셨다고 사과했다. 그때그때 해소함이 나은 듯하다. 성격마다 다르겠지만 응어리 없이 자란 게 다행이다. 

세상 살면서 많은 옹이들이 있다. 가슴에 콕콕 박혀 빼낼 수 없다. 그 많은 스트레스를 담지 말고 소쿠리에 물 흐르듯 보내야 한다. 오늘의 상처는 오늘 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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