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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강자 비전향장기수 양희철 망백연(구순) 맞아 '신념의 강자' 시집 출간

김문영 글지
  • 입력 2023.09.27 11:06
  • 수정 2023.09.28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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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자주 평화통일을 위해 북으로 송환을 요청한 비전향장기수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세계 유일의 민족 분단 국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이에는 다른 나라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용어들이 많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용어가 '비전향장기수'다.

'비전향장기수' ....... 민족 분단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이 용어는 국가보안법,반공법, 사회안전법을 위반하여 7년 이상의 형을 복역하면서도 사상을 전향하지 않은 장기수를 일컫는다. 대부분 비전향장기수들은 20년 이상 감옥생활을 했다. 현재 생존해 있는 비전향장기수는 7명이다. 문재인 정부 때만 해도 10명이었는데 몇년 사이에 3명이 세상을 떠났다.

비전향장기수 중 한 분이 2023년 9월 22일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시집 '신념의 강자' 출판기념회 및 구순잔치를 열었다. 그 주인공은 올해 구순(망백연)을 맞은 비전향장기수 1934년생 양희철이다. 시집 '신념의 강자'는 양 시인이 2018년부터 2023년까지 작성한 빨치산 추모 시편을 모아 만든 시집이다. 양 시인은 김대중 정권 시절 비전향 장기수들을 석방 시킬 때 37년 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다.

양 시인은 갖은 탄압과 압박에도 구순에 이르기까지 당당하게 투쟁했다. 빨치산 전적지나 전국을 누비면서 빨치산 출신들의 분묘, 납골당을 찾아 다니면서 동지의 투쟁 특성을 살려 시로서 노래하는 주옥 같은 서사시가 완성되어 구순을 맞아 출판 기념회를 가졌다.

김영승 비전향 장기수 소년빨치산은 "양희철 선생은 감옥에서 나와 함께 고문투쟁으로 맺어진 동지이다. 나는 시는 문외한이지만 시 소설 노래 등 예술 작품들은 정치적 색채를 철저하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선생의 시는 반제 반미 자주화 투쟁 전선에서 대중들을 격동적으로 고무시키는 작품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준성 역사학자는 "고난에 찬 역사를 관통하며 신념을 저버리지 않은 인물들을 자신만의 필체로 형상화 한 기록이다. 우리사회가 발언하기 힘들어 했던 비전향 장기수들을 거론하며 문학적으로 승화 시켰다."고 이 시집을 소개했다.

대표시 '그렇게 되리니' 액자를 선물받은 양희철 시인
대표시 '그렇게 되리니' 액자를 선물받은 양희철 시인

 

그의 대표적 시를 감상해보자

...............................................

지리의 열사를 우러르며

<그렇게 되리니>

푸른 산 파란 하늘

햇볕 눈 부시고

진록의 봄봄 첩첩의 골짝

거기 수해의 일렁임 있네

거기 빨치산의 우렁찬 합창이 있네

어찌 잊으랴 지나간 어젯 날을

열사들의 무구한 희생정신

이끼 낀 바위에도

흐르는 물 나무등걸에도

재생인가 고막을 울려 천둥으로

 

눈을 감고 다소곳 듣습니다

읊조리듯 속삭이듯 명령이듯

때론 흥까지 발동케 하시는

빨치산 부활을 보고 듣습니다

치열히 싸우시다 산화해 가신

전사들의 진솔한 호소를

 

동지께 아뢰올 말씀 목이 메이는데

그래도 여쭙니다 승리하고 있다고

승리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의 역량 다 해서

 

세계정세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종종이는 쪽바리 헐떡이는 양키

가빠한 숨결에 자신들의 운명 재촉합니다

 

단결을 선도했던

혁명하라 일깨웠던 1948년 그 때로부터

프로레타리아는 단결을 선도했고

세력의 확장은 누리를 채울 만큼 컸습니다

한데도 두 세기가 지난 지금

세계 유일의  분단 조선은 잘린 채 있는데

왜 일까요 통일이 어려울까요

선열들의 희생 그 값진 그 알심으로

평화의 확장 선도할 수 있을텐데

그렇습니다 원인은 딱 하나

비대해진 양키 끝간데 없는 욕심 때문

열강들의 제압 움켜쥔

악의 작용임을 알았습니다

 

약소국의 서러움 분노로 치솟습니다

역사는 말합니다

한 사회에서 다음 사회로 이행한다고

자본주의 제국주의는 영원할 수 없다고

악의 축이 길러논 어중이도 떠중이도

그들의 상전과 함께 물러날 거라고

그렇게 되리니

이 땅에서 양키들 물러가고

우리끼리 민족국가로 통일하여

세계평화 선도하리라

 

강 대 강

무엇이 두려우랴 무엇이 어려우랴

맞받아 싸워 이겨낼 무력이 있고

자각된 남북인민의 의지 이리 강한데

님들이시여

솔바람 불리우고 새소리 물소리에 귀 기울이시라

님들께서 듣고픈 조국통일의 소식 들을 수 있을지니

님들의 고귀한 희생 오늘의 통일을 담보했음이랴

님들이 계신 지리의 영봉 남도의 산산 우러르며

세계가 칭송할 그 날을 기다리며

창창한 하늘 푸르른 산하 윤나게

그렇게 되리니

............................................................

꽃다발을 안고 기뻐하는 양희철 시인
꽃다발을 안고 기뻐하는 양희철 시인

 

1934년생 양희철은 한국전쟁으로 휘문중을 중퇴한 후 검정고시를 거쳐 1956년 고려대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헌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친 그는 대학을 옮길 결심을 한다.사범대학이 아니어도 교과 과목만 마치면 교원 자격이 부여되는 과정이 단국대에 개설되어 있어서 그리로 편입 했다.

1972년 유신체제가 만들어지고 반공을 국시로 이데올로기 전쟁에 나선 박정희정권은 감옥 안의 장기수들을 '방치'할 수 없었다. 더더욱 한국전쟁 이후 20년 정도 징역 선고를 받은 비전향장기수들의 출소 시점이 임박했던 터라 박정권은 체계적인 전향공작 계획을 세웠다. 당시 장기수들이 있는 감옥에는 중앙정보부는 물론 보안사, 치안본부 대공국의 담당관이 배정되어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법에 명시된 '조정권'을 갖고 대공심리전으로 광주, 전주, 대전, 대구 등 교도소별로 전향공작반을 만들었다.

전향공작은 초기에는 금지였던 가족면회와 편지를 허용하고 운동시간을 늘려주기도 하고 빵이나 일용품을 나눠주는 회유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게 효과가 없자 끔찍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공작반 밑에 교도소내 폭력 전과자들을 '떡봉이'라는 이름으로 동원,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렀다. 장기수들이 수감되어 있던 네 군데 교도소의 고문 방법은 실로 다양했다. 웃통을 벗겨 바닥에 누인 다음 바늘로 등짝을 마구 찌르거나 방안 벽에 성에가 끼는 추운 날씨에 물을 끼얹어 몸을 얼어붙게 했다. 30도가 넘는 더위에 열 명이나 되는 사람을 0.75평의 방에 몰아넣었다. 눕는 것은 물론 앉지도 못하게 했고 날씨가 더우니 서로가 내쉬는 숨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 까무러치는 사람도 있었다. 또 방 안의 스피커를 가장 높게 틀어 귀청이 찢어지게끔 하고 심한 고혈압 환자나 당뇨환자에게 약 지급마저 거부했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과 함께 인도적 차원에서 인민군이나 공작원 출신의 장기수들을 북으로 돌려보내기로 합의했다. 통일부는 후속조치로 비전향자이어야 하고 본인에 한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시집 출간 및 구순잔치를 축하하는 공연단
시집 출간 및 구순잔치를 축하하는 공연단

 

양희철이 평양을 방문한 건 1961년 3월, 헌병대에서 제대해 막 단국대에 편입했을 때였다. 당시 대학가에는 4.19로 인한 민주 통일 열망이 강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가 유행했고 통일의 열기가 넘쳤다.

이 때 양희철 인생행로의 대전환이 이뤄진다. 새 학기 초 통일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을 때 열여덟살이나 많은 큰 형 양순길이 나타났다. 형과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미군의 서울 수복 때 헤어졌다. 이 때 헤어졌던 형이 나타났다. 와세대 대학을 다니며 항일운동에 가담했던 형은 해방 후 남로당에 들어가 서울시당에서 활동했었다.

그런 형이 10년 만에 찾아와 "일본에서 일을 하고 있다"며 그간의 삶의 과정을 설명하지도 않은 채 과거의 지인들에게 연락을 부탁했다. 양희철은 형이 북에서 남파된 것임을 알아차렸다. 양희철은 4.19로 통일의 열망이 고무된 상황에서 북의 상황이 몹시 궁금했다. "나를 평양으로 데려가달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남쪽 대학생들의 얘기를 전하고 싶다"며 형에게 부탁했다.

형은 계속 일본 얘기를 했지만 양희철은 "내 뜻대로 안 되면 차라리 신고하겠다" 고 협박했다. 결국 형은 동생의 뜻을 받아들였고 형제는 충남 서산 바닷가에서 공작선을 타고 해주 용남포로 향했다.

해주를 거쳐 평양으로 들어간 양희철은 평양순안통일대학에 청강생으로 들어가 유물변증법과 정치경제학, 특수과목으로서 정세분석을 배웠다. 주말에는 노동당의 지도원과 신의주와 회령 등 전국을 돌며 전후복구현장을 둘러보았다. 기업소나 협동조합에 마련된 잠자리에서 북녘의 청년들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새나라 건설에 대한 열정을 흠씬 느꼈다.

   그런데 그해 5월 17일 아침 당의 과장과 지도원이 양희철의 기숙사로 찾아왔다. 남쪽의 5.16 쿠테타 소식을 전했다. 양희철은 "내려가서 친구들의 안전도 확인하고 여기서 만난 북쪽 청년들과 대학생들의 모습을 전하겠습니다"며 남파를 요청했다. 

7월 그는 난수표책을 챙겨서 서천 바닷가로 내려왔다. 양희철은 서울로 올라와 고려대와 단국대를 찾았다. 반공을 앞세운 5.16정국은 전국을 얼어붙게 했다. 그는 조심스레 평양 방문 이야기를 꺼내며 '남북대학생들이 힘을 합하자, 청년들이 다시 일어서야 한다'며 서울대와 단국대, 신촌을 부지런히 오갔다.

계획했던 3개월을 훌쩍 넘겨 2년이 가까워질 무렵 믿었던 동료 학생이 방첩대(적국의 간첩이나 첩보 활동을 막는 임무를 맡던 부대)에 양희철을 신고했다. 그는 1963년 4월 12일 체포되었고 1심에서 '고려대 지하당사건'이란 이름으로 기소되어 7년을 선고받았다. 2심에서는 그가 평양에 다녀온 사실이 확인돼 '양희철 간첩 사건'으로 공소가 변경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5년 3월 16일 대법원에서 무기 징역을 최종 확정받고 서울구치소에서 대전교도소로 옮겨왔을 때 양희철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가다밥(징역밥, 1홉으로 약 180ml 수준)을 줘 그의 몸은 나날이 오그라들었다.

하루 20분간 주어지는 운동시간, 양희철은 교도소운동장의 크로바와 쑥은 물론 독성이 있다는 역귀풀까지 모아 손바닥이 퍼렇토록 짓이겨 목구멍에 털어넣었다. 풀이 동나면 양희철은 하늘을 바라봤다. 깨끔발로 안되면 제자리뜀으로 솔잎과 고욤나무,감나무의 잎을 땄다. 징역 1년 만에 양희철은 교도소 내 모든 나뭇잎과 풀잎을 맛봤다.

광주교도소로 옮겨간 1975년도부터 양희철은 식물을 넘어 육고기 사냥에 나섰다. 당시 그는 전향공작반에게 당한 고문으로 몸이 망가졌다. 영양부족까지 겹쳐 손발톱은 누렇게 변했고 장딴지는 푸르댕댕 부어올랐으며 어지럼증까지 있었다.

가을로 접어들던 어는 날, 양희철은 밥풀 몇 알로 쥐 한 마리를 방으로 유인했다. 몇 번을 망설이던 쥐가 마침내 사방 문짝 밑에 달린 배식구멍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녀석을 구석으로 몰았다. 쥐는 찍찍거리며 빠져나갈 틈새를 엿봤지만 양희철은 앞발로 쿵 디디면서 빗자루로 내리쳤고 쥐는 널부러졌다. 아, 얼마 만에 먹어보는 고깃덩어리인가? 광주교도소 5029번 양희철은 그날부터 쥐 사냥 선수가 되었다. 양희철은 이렇게 잡아먹은 쥐를 130여 마리로 기억한다. 이런 단백질 섭취가 건강을 지킨 밑천이라고 여기고 있다.

장기수들에게 징역의 고통은 배고픔만이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은 장기수들의 내면까지 탄압했다. 1973년 11월에 이어 1974년 8월에 행해진 광주교도소의 전향공작은 잔인했다.

"이 새끼 묶어, 그냥 손도장만 찍으면 된다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네."

전향공작반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달려든 세 명은 양희철의 몸통을 포승줄로 감고 의자에 묶었다. 백열전구만 밝힌 지하방엔 곰팡이가 슬었고 바닥에 고인 물구덩이에서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반장은 양동이 물에 적신 밧줄로 양희철을 내리쳤다. 손가락 굵기의 동아줄은 얼굴을 찢고 허벅지와 장딴지의 살을 파고들었다.

네가 끝까지 버티나 보자 하는 악다구니, 차라리 죽여라하는 양희철의 비명이 민족분단의 상징으로 울렸다. 1시간이나 지났을까 "이 새끼 똥 싼 것 같은데요" 뒤에서 쪼그려 앉아 의자를 잡고 있던 공작반원이 코를 움켜쥐었다. 반장은 동아줄을 물구덩이에 던지며 "방에 쳐 넣어"라고 소리쳤다.

이런 고문 끝에 많은 장기수들이 강제 전향을 당했다. 전향을 한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도장을 찍더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가? 북한과 김일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같은 질문에 수시로 답해야 하고 사상전향 성명서를 작성해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고백과 참회를 낭독해야 한다.

전향수는 분류심사에서 C급에 속하게 되는데 C급은 전과 4범 이상이 포함되어 있는 구간이다. 결국 전향은 전과 4범의 잡범으로 전락하는 것이며 그 후부터 교도관들에게 일반수와 똑같은 모욕과 체벌을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장기수들이 이에 도장을 찍은 것은 자살까지 할 정도로 그 고문이 가혹했기 때문이다.

양희철은 버텨냈다. 그는 전향공작이 마지막으로 극성을 부리던 1974년 8월 광주교도소에서 여덟 번이나 생똥을 싸면서 '사상의 자유'를 지켜냈다고 기억한다. 이 전향공작은 그가 1999년 3.1절 특사로 가석방이 확정되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담당 공안검사는 석방되기 한 달 전쯤부터 찾아와 '전향서'를 내밀었고 거부하자 '생활계획서'를 쓰라고 했다. 이 또한 외면하자 '준법서약서'에 사인만이라도 하라고 했다. 그는 단호하게 물리쳤다. 어떤 경우에도 내 양심을 묶을 수 없다며 차라리 가석방을 취소하라고 외쳤다.

광주교도소에서 전향공작의 파고가 지나가자 양희철은 한의학 공부로 마음을 달랬다. 교도소 도서관에서 황제내경과 침구경혈해설을 구해 공부했다. 침은 얇은 스프링을 구해 시멘트벽에 갈아서 만들었다. 때론 바늘을 구했고 소독은 머리칼 사이에 슥슥 문지르는 것으로 대신했다. 재소자들은 물론 교도관들까지 그의 침을 청해 맞았다. 그는 광주교도소의 이름난 침구사였다. 양희철이 침구에 관심을 가졌던 건 집안 내력이었다. 고향인 전라북도 장수에서 큰 아버지가 한약방을 했고 그의 아버지는 한의사 밑에서 침을 놨다. 양희철은 그때 눈여겨보고 서울 휘문중으로 유학 와서도 한의학 서적을 틈틈이 펼쳐봤다.

양희철의 재능을 눈여겨본 사람은 광주교도소의 김병준 소장이었다. 김 소장은 광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춘곡 강동원 선생과 양희철의 교류를 주선했다. 1990년에는 양희철에게 교도소 내에 재소자를 치료하는 두 평짜리 진료실을 만들어주었다.

재소자들은 아프면 감옥의에게 가지 않고 양희철에게 달려왔다. 그의 생일날에는 그의 진료실에 재소자들이 보낸 건빵, 사과, 담요, 내복이 수북했다. 양희철은 출소할 무렵인 1999년에는 이미 수많은 임상경험을 가진 노련한 침구사가 되어 있었다.

1999년 2월 24일 37년의 징역생활을 마치고 장용주 신부와 강신석 목사의 신원보증으로 광주교도소에서 석방되었다.

 

양희철 비전향장기수는 구순을 맞아 시집 출간과 함께 각계의 따듯한 축하를 받았다
양희철 비전향장기수는 구순을 맞아 시집 출간과 함께 각계의 따듯한 축하를 받았다

 

양희철은 출소해 '탕제원'을 열었다. 천주교사목위원회에서는 양희철의 특별한 이력에 주목 1억 2천만 원을 지원 그가 탕제원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왔다. 동료 장기수 조창손·안학섭·유한욱·신인영을 불러들여 약재를 다듬고 탕을 끓였다. 천주교에서는 수녀 한 분을 파견해 도왔고 시민운동단체나 전교조 관련 인사들이 환자로 찾아오고 수시로 탕약을 단체 주문했다. 

생활 터전을 마련한 양희철과 동료 장기수들은 기쁜 나날을 보냈다. 탕제원을 운영한 지 1년 만에 천주교사목위원회에서 지원해준 돈을 모두 갚을 정도로 성황이었다. 2014년 탕제원은 장기수들의 쉼터 낙성대 '만남의 집' 1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사 후에도 '탕제원'은 양희철과 동료 장기수들에게 삶의 활력이 되었다.

양희철은 2018년 팔십 후반이 되면서 힘에 부쳐 탕제원 운영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전국 비전향장기수 묘지 순례를 하고 있다. 제주도에서부터 시작한 발길은 고인이된 장기수들의 무덤을 찾아 헤멨다. 장기수로 복역중에 감옥에서 사망했거나 출소해서 힘겹게 살다 죽어간 동지들의 묘를 돌아보는 일은 전향을 거부한 신념을 더욱 강하게 했다. 

찾아봐야 할 곳 둘러봐야 할 곳은 참으로 많지만 양희철은 묘지가 온전히 있는 동지들만이라도 2차 송환 전에 모두 찾아가 술 한 잔 올리고 동지의 삶을 기록하고 싶다.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 비전향장기수는 양희철을 포함하여 모두 7명이다, 문재인 정부 때 모두 10명이 송환을 신청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이들 중 3명이 사망하여 지금은 7명만 생존해 있다

양희철 외에 생존해 있는 비전향장기수의 면면을 살펴보면 너무나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조국의 자주 평화통일 열망이 펄펄 끓어 넘친다.

1926년생 문일승은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출생했다. 인민군으로 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어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장기수가 되었다.

1929년생 양원진은 전남 신안출신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의용군으로 참전했다. 1959년 남파되어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살았다.

1930년생 박수분은 경남 하동출신이다. 1950년 입산하여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1955년 지리산에서 체포되었다.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장기복역했다.

1933년생 김영식은 강원도 고성 출신이다. 1950년 인민군에 입대하여 1953년에 전역했다. 남파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살았다.

1935년생 박희성은 평안북도 박천 출신이다. 영화기사로 활동하다가 1950년 인민군에 입대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살았다.

1945년생 이광근은 평양시 출신이다. 1968년 남파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살았다.

양희철은 이들과 함께 북으로 가  남북교류의 길을 다시 열어 자주 평화통일의 밀알이 되고자 한다.  정치상황을 보면 이러한 양희철의 희망은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그러나 신념의 강자 양희철의 신념은 누구도 꺽을 수 없다.

"죽는 날까지 자주 평화통일의 꿈을  버릴 수 없다" 는 양희철의 꿈은 언젠가 현실이 될 것이라 믿는다. 망백연 구순을 맞은 양희철의 신념이 8천만 겨레의 가슴에 자주 평화통일의 쓰나미를 몰고 오리라 믿는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나뉘어 있는 이상 영원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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