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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은 [부여]의 왕 (삼국사기 백제본기), [주몽]은 [고구려]의 왕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구려]는 [졸본부여] (삼국유사),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가짜’ (일제), [교과서]를 소설로 만든 국사편찬위원회.(2) 거대한 음모(23) 일본을 편드는 국사편찬위원회 (97)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9.23 22:00
  • 수정 2023.09.26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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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서는 주몽이 고구려왕이 되지 않고  부여왕이 된 것이 주류의 견해이고(큰 글씨, [코리아 기록]) 주몽이 부여왕을 거치지 않고 고구려왕이 된 것이 첨부된 견해이다. (작은 글씨, [교과서 기록])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반대이다. 주몽이 부여왕을 거치지 않고 바로 고구려왕이 된 것이 큰 글씨이다. [교과서기록]이다.

 

어느 것이 더 맞는 기록인지 현재로서는 판단할 수 없다.

 

모순된 두 가지 역사를 같이 기록하는 방법을 거추장스럽다거나 우습다고 여기지 말자.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백제의 기원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두 가지를 서술해 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국사교과서로 배우는 것 (이를 [교과서기록] 이라 하자)와 국사교과서에 나오지는 않지만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코리아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코리아기록]과 차이나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코리아에 관한 기록 (이를 [차이나 기록]이라고 하자), 세 기록을 비교해 보자.

 

2.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백제본기 1편]이다.

 

1) [코리아기록]은 큰 글씨로 쓰여 있다.

 

줄이면, [온조왕의 아버지 추모(주몽. 추모가 먼저 나온다)는 (졸본)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고구려왕이 아니라 (졸본)부여왕이 되었다.]

삼국유사 저자 [일연]은 [추모(鄒牟)]가 이름이고 혹은 [주몽]이라고 부른다면서, 뒷 문장에서는 [추모]를 쓰지 않고 [주몽]이라고 썼다. [추모]라고 기록한 역사책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2) [교과서 기록]은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 줄이면, 주몽은 부여왕이 된 적이 없고 고구려의 왕이 되었다. ]

 

3.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편이다.

 

1) 큰 글씨로 동명성왕 고주몽은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은 부여에서 도망하여 비류수 가에 [고구려]를 세웠다. (부록1)

 

2) 작은 글씨로 [ 혹 말하기를,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 라고 하였다.

 

4. 일연(삼국유사의 저자)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지칭하는 듯한 ” [국사(國史) 「고려본기」에 이른다.]“로 시작하는 문단에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큰 글씨와 동일하게 기록한다. 즉 ” 주몽이 부여왕을 거치지 않고 바로 고구려왕이 되었다.“, “ 졸본주는 현도군의 지역이다.”라고 기록했다.

 

차이나 漢(한)나라 때 현도군은 고구려, 서개마, 상은대 3개 현이다. 두 개의 기록으로만 보면 졸본부여는 현도군 고구려현이다.

 

5. 삼국유사는 권 제1 기이(紀異第一) 동부여(東扶餘) 조에서“ 해부루 – 금와 - 대소 로 내려오던 [부여]는 고구려 대무신왕 [무휼]에게 멸망 당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 조에서는 “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중략) 졸본주는 요동지역에 있다. 髙句麗 即 卒夲扶餘也. 或云 “今 和州 又 成州䓁”, 皆誤矣. 卒夲州 在 遼東界.“ 라고 기록하고 있다.

 

1) [일연]은 668년에 도세(道世)가 지은 [법원주림(法苑珠林)]의 책이라고 주석이 달린 [주림전(珠琳傳)]을 인용하여

 

“ 이것은 [동명제]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함이다. 이 [졸본부여]는 역시 [북부여]의 별개 도읍지이므로 [부여왕]이라고 한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 라고 기록했다.

 

졸본부여은 북부여의 다른 도읍(서울)이다. 영품리왕은 (해)부루왕의 다른 이름이다

即 東明帝 為 卒夲扶餘王之謂 也. 此 卒夲扶餘 亦是 北扶餘 之 别都, 故云扶餘王也. 寧禀離 乃 夫婁王之異稱 也.

 

2) 현대 용어로 설명하면 [졸본부여](졸본땅에 있는 부여)는 [북부여 연방]에 속한다는 의미이다.

 

6. [교과서 기록]은 [주몽=추모] 라는 설명없이 주몽(추모)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적 없이 바로 고구려를 건국하고 왕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큰 글씨로 주몽(추모)이 졸본부여의 왕이 되었다고 기록한다.

 

삼국유사는 주몽(추모)가 고구려왕이 되었는데 그 곳이 졸본 지역이고 고구려는 졸본부여이며 졸본지역은 범 요동지역 (요동계遼東界)에 있어서 고구려왕은 졸본부여의 왕이라고 했다.

 

7. 제일 믿을 수 있는 기록인 광개토왕 비문은 [교과서기록]과 맥락이 일치한다. 짧게 요약해서 적어야 할 이유도 있었겠지만, 추모왕은 고구려를 세웠고, [추모왕=주몽]은 부여의 왕이 된 적이 있는지 없는지 기록하지 않았다.

 

1) 광개토왕 비문 번역

“ 아!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러우셨다. □□□□□□ 명(命)에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어 왕께서 나루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들이 떠올라라." 이 말씀에 따라 즉시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2) 원문

惟 昔 始祖 鄒牟王之創基也.

出自 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剖卵 降世 生 而 有 聖. □□□□□□命駕 巡幸 南下 (칠지도 기생 성음 = 聖. □

路由 夫餘 奄利大水 王 臨津 言曰.

" 我是 皇天 之子 母 河伯 女郎 鄒牟王. 爲 我 連葭 浮龜." 應聲 即 爲 連葭 浮龜. 然後

 

造渡 於 沸流谷 忽本 西 城山上 而 建都焉.

 

3) 扶餘(부여)가 아니라 夫餘(부여) 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인 400년경 광개토대왕비를 새긴 사람은 扶餘가 아닌 夫餘로, 주몽이 아닌 鄒牟 로 표기했다. 鄒牟(추모)는 두 번씩 나온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는 광개토대왕비를 몰랐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발견하고 확인한 지금 우리는 주몽이 아닌 鄒牟(추모)로 왼쪽에 부수가 없는 夫餘(부여)로 표기하여야 한다!

 

4)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홀본忽本은 비류곡沸流谷과 가까이 있다. 지금 어디일까? (계속)

광개토대왕비. 김병기 전북대 교수는 일제가 비문 내용을 변조했다고 본다. [사진 김병기] 중앙선데이 2020.10.31
광개토대왕비. 김병기 전북대 교수는 일제가 비문 내용을 변조했다고 본다. [사진 김병기] 중앙선데이 2020.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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