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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倭國왜국인가? (1) 1550년 대명여지도大明輿地圖에 대만(=JAPAN=왜倭)가 없다. (1) 에피소드7 (이야기나 사건의 줄거리에 끼인 짤막한 토막 이야기).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89)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8.22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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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서구에서는 한반도를 ‘조선’이나 ‘한’이 아니라 ‘코리아’로 부를까?

 

‘대한민국’, ‘북조선인민공화국’을 서구는 줄여서 South Korea, North Korea 라고 부른다. 한국의 ‘한’이나 북조선의 ‘조선’은 들어가지 않는다. 이성계 조선이 들어서고 나서 대한제국으로 나라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조선’이었다. 그런데 왜 서구는 ‘조선’이라 부르지 않고 ‘고려=코리아’라고 부를까?

 

10세기 왕건의 고려시대부터 서구와 교역을 했고 지금의 한반도 개성 벽란도에는 국제 무역이 활발하여 ‘고려= 코리아’라는 이름이 서구에 전해졌다는 것이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입장이고 우리는 교과서로 그렇게 배웠다.

 

서구가 한반도 개성까지 오기 전까지 물물교역을 할 곳은 많다. 한반도 개성에 무슨 그리 진귀한 금은보배가 많아서 맞은 편에 큰 나라 차이나가 있고 물물교역할 것이 많은데 한반도 개성에 우연히 한두번은 몰라도 매년 찾아오겠는가?

 

고려가 한반도에 있었고, 그 때 서구에 ‘코리아’로 알려졌다는 선입견을 버려야할 때가 왔다. 아마 고구려 제국일 때 (넓다는 의미에서 제국이다) 고구려는 ‘고리 혹은 구리’로 불렸으니 그 때 서구에 알려진 것이라고 본다.

 

고구려는 ‘고구려’로 불리기도 했지만 ‘고려= 고리, 구리’로 불린 적이 더 많았다. ‘고리 + 아 (나)’ 가 지금의 ‘코리아’가 된 것이 틀림 없다. ‘루만(루마니) + 아’, ‘불갈(불가리)+아’, ‘앗 (아시) + 아’에서 보듯이 ‘아 (나, 라)’는 ‘땅’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2. 서구는 일본을 왜 ‘JAPAN 저팬, 자팬’이라고 부를까. 혹시 대만이 ‘JAPAN 재판’ 아닐까?

 

1) 일본을 서구 여러나라는 JAPAN(저팬, 자팬) 으로 부른다. 일본 스스로는 NIPPON (닛뽄, 닛폰)이라 표기하고, 코리아는 일본이라 부른다.

 

‘日本’ [니혼, 일본, 얼번(= 현대 차이나 발음)]은 JAPAN(저팬, 자팬) 발음과는 너무 큰 차이가 있다.

 

‘日本’이라는 한자를 일본 한자음으로 읽을 때 ‘니혼(にほん·NIHON)’, 혹은 ‘닛폰(にっぽん·NIPPON)’이다. 기본적으로 ‘니혼’이 일본의 공식 한자음이다. 니혼이 ‘일본’이라면 닛폰은 ‘우리 일본’쯤 된다. (부록1)

 

2) 7세기 이후 일본이 더 이상 왜가 아닌 해 뜨는 나라라는 뜻의 日本이라고 나라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는데, 이를 중국에선 당시 중국의 발음대로 일본을 '짓폰'[1]이라고 부르게 되었다.[2]

 

이후 마르코 폴로가 동양을 여행하며 중국에서 들었던 짓폰을 그대로 동방견문록에 적게 되었고, 그것이 유럽에서 '지팡구'라 불리다가 현대에 와서 Japan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지배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원환 주 : 마르코 폴로가 대만을 알고, 대만을 ‘짓폰’으로 동방견문록에 적었다는 것은 확인해 볼 사항이다.

 

다만 현재 쓰이는 'Japan'의 직계조상은 말레이어 'Jepang'이다. 따라서 'Cipangu'와 'Japan'은 일종의 쌍형어이다. (나무위키. 재팬)

 

3) ‘나무위키 재팬’ 설명대로 'Japan'의 직계조상이 말레이어 'Jepang'이라면 'Japan'의 발음(재판)은 현대 일본보다 현대 대만(재판)에 더 가깝다.

 

대만을 서구는 Taiwan (타이완)이라고 부른다. [Taiwan (타이완) 臺灣(대만)]에서 臺 (대)의 발음은 차이나 발음으로 ‘타이 tái ’ 이고 灣(만)의 발음은 차이나 발음으로 ‘완wān (wān)’ 이다.

 

차이나에서는 언제부터 臺灣(대만) 으로 불렀는지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1360년에 원나라는 펑후 제도(澎湖)에 순검사(巡檢司)라는 행정기관을 설치하고 복건의 천주(泉州)에 예속시켜 통치하였다. 이것이 대만 지역(대만섬 서쪽의 "펑후 제도"에 한정된 것임)이 중국의 행정구역에 포함된 최초의 기록이다. (위키백과 대만의 역사)

 

대만 본토를 원나라나 명나라가 통치했다는 명확한 기록은 없다. 서구에서 최초로 대만을 알게 된 포르투갈은 대만을 ‘포르모사’라고 불렀다. (위키백과 대만의 역사)

 

3. 1550년 대명여지도에 ‘대만’은 없다!

 

1) 현재 전해지는 차이나 지도 중 비교적 검증된 지도 중의 하나가 대명여지도이다.

 

대명여지도 大明輿地圖 는 현재 미국의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75 cmx 84 cm 총 18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1번 여지총도 (전체도)에도, 14번 복건 여도, 15번 광동 여도에도 ‘대만’은 없다. 해남도는 15번 광동여도에 나온다. (부록2)

 

2) 명나라는 ‘대만’을 명나라의 영토로 인식하지 않은 것이다. 명나라 시대에 ‘대만’에 있던 세력의 이름은 무엇인가? 1662년 명나라 말기에 정성공은 대만섬에서 네덜란드를 몰아내고 대만 섬에서 청나라에 대항하였다. (부록3)

 

4. 대만의 원주민 중 하나인 鄒(추) 족, 그들은 고구려 광태토대왕비에 나오는 시조 鄒牟(추모왕= 동명성왕)의 후예인가?

 

1) 대만이 청나라에 의해 정복당하기 전인 명나라 시대에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1732년 대만은 청나라에 정식으로 행정 편제되었다.

 

2) 현재 대만 원주민은 대만 정부가 인정하는 고산족으로서 16개 민족이 있다. 최대 인구 21만 9천명의 아미족이 있고 순서로는 8번째이지만 인구가 6,743명에 불과한 초우족(鄒, Tsou)이 있다. (위키백과 대만원주민)

 

3) ‘추鄒’ 는 고구려 광태토대왕비에 새겨져 있는 시조 鄒牟(추모왕= 동명성왕)의 바로 그 ‘추鄒’ 이다.

 

필자는 고구려의 주력 민족은 ‘추鄒’ 족과 ‘모牟족’ 일 가능성을 주장한 바 있다. 기원후 100년에 편찬된 漢書地理志(차이나 한서지리지)에 나오는 83개 군과 20개 국, 1314개의 현 중에 ‘추鄒’ 글자를 찾아보자.

 

4) ‘추모鄒牟 의 추鄒’ 원래 글자는 추芻 이다. 추芻 에 우부방이 붙어 추芻 가 근거하는 땅 추鄒라는 의미이다. ‘어떤 물건이 잘 팔리는 추세趨勢이다.’ 라는 표현의 추세에서 추趨 는 달릴 走(주) 위에 추芻가 있는 것이다. 芻 [꼴 추. 꼴(말이나 소에게 먹이는 풀), 꼴꾼(말이나 소에게 먹일 꼴을 베는 사람), 짚(이삭을 떨어낸 줄기와 잎),풀 먹는 짐승, 기르다]의 뜻이다. 짐승을 기르는 [추鄒], 유목민족이 연상된다.

 

4-1) 천승군에 동추東鄒 현

千乘郡,縣十五:千乘,東鄒,溼沃,平安,博昌,蓼城,建信,狄,琅槐,樂安,被陽,高昌,繁安,高宛,延鄉。

 

4-2) 교동국에 鄒盧추로현

膠東國,縣八:即墨,昌武,下密,壯武,郁秩,挺,觀陽,鄒盧

 

4-3) 제남군에 鄒平, 梁鄒 가 있다. ‘사기 조선열전’에 기원전 108년 漢(한)나라 편을 든 제남태수 공손수 이야기가 나온다. 왕험성과 제남군이 가깝다는 것이다. 漢(한)무제는 독전 역할을 맡긴 공손수를 참하는 이상한 행동을 한다. 제남태수 공손수가 진정 漢(한)무제의 부하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濟南郡,縣十四:東平陵,鄒平,臺,梁鄒,土鼓,於陵,陽丘,般陽,菅,朝陽,歷城,猇(범이 울 효),著,宜成 (이성계가 태어난 의주일 가능성?)

 

4-4) 노국에 추騶 현이 있다. 마부(말을 기르고 말을 조종하는 사람) 추騶로서 고을 지방을 나타내는 추모의 鄒(추)와는 다르다. 노국에 추 이외에도 진번의 번과 비슷한 蕃 과 설총의 薛 현이 있음을 기억해 두자.

 

魯國,縣六:魯,卞,汶陽,蕃,騶,薛 (계속)

 

부록4 주간조선 2014.11.7. 신동규 동아대 국제학부(일본학) 교수

 

당시 일본은 포르투갈과 스페인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여 이른바 남만무역(南蠻貿易)을 통해 서유럽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의 포교활동에 대한 위기감으로 점점 가톨릭 국가에 대해 냉담해지기 시작했고, 리흐데호의 표착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포교활동보다는 무역에 중점을 두었던 네덜란드와 영국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서양과의 관계는 1543년 다네가시마(種子島)라는 곳에 포르투갈인이 표착하면서 시작됐다.

 

리흐데호 표류 9년 후인 1609년 네덜란드의 동인도연합회사(VOC·1602년 설립)가 히라도(平戶)에 무역상관을 세웠고, 1613년에는 영국이 무역상관(1623년 폐쇄)을 두면서 이들과의 무역 및 외교관계가 시작된다.

 

부록3 위키피디아 대만의 역사

 

정씨왕국은 1662년(남명 건평)에 정성공(鄭成功)의 군대가 대만에서 네덜란드의 군대를 몰아내면서 시작되었다.

 

명나라는 1644년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서 멸망하였지만, 명나라 황제의 유신(遺臣)들은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구호를 내걸고 청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정성공은 그 지도자 중 하나였다.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은 타이완 해협에서 무역업과 해적 행위로 큰 돈을 번 해상 모험가였는데, 정지룡이 일본에서 장사를 하면서 일본의 다가와 시치자에몬의 딸과 혼인하여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이 정성공이다.

 

정성공은 청나라 군대와 9개월 간의 싸움 끝에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던 대만으로 쫓기게 되었다. 1661년 정성공은 대만섬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을 공격하여 1662년 2월 1일 네덜란드 세력의 항복을 받아냈다. 네덜란드인들로부터 대만섬에서의 철수와 대만섬의 모든 권리 이양을 약속받은 정성공은 대만섬 역사상 최초로 한족 정권을 수립하였다.

 

정성공은 대만을 청나라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삼아 통치할 목적으로 명경(明京)을 세워 동도(중국어 간체자: 东都, 정체자: 東都, '동쪽의 수도')라 칭하고, 펑후 제도를 포함한 대만의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자기 휘하의 군인들과 함께 대만으로 온 푸젠성 주민들을 섬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중국 본토를 수복하고 필리핀에서 에스파냐인을 몰아내어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1662년 6월에 정성공이 병으로 급사하자, 그의 아들 정경이 뒤를 이었다. 정경은 1664년에 동도를 동녕이라고 개명하여 동녕왕국의 왕으로 올랐고, 정성공의 반청 유지를 받들어 대륙에서 일어나는 복명 운동에 가담하였다. 특히 삼번의 난에 적극 동조하여 한때 푸젠성의 일부 지역을 공격하여 장악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씨 정권이 정성공의 손자에게 넘어가면서 내부분열이 일어났고, 청 정부는 뇌물을 이용해 이러한 내부분열을 심화시켰다. 결국, 정성공으로부터 시작한 정씨 일가의 3대(代)에 이은 대만 통치는 21년 만인 1683년에 청나라 군대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

 

정씨왕국의 통치시기 당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정씨 정권과 상업협정을 맺으려 했는데, 당시 영국인들은 동녕왕국을 '대만 정씨왕국'(台灣鄭氏王國) 또는 '명경왕국'(明京王國)이라 칭하였다.

 

 

부록2 대명여지도 大明輿地圖

https://www.loc.gov/resource/g7820m.gct00125/?sp=15&st=image&r=-0.061,-0.202,1.231,0.655,0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여지총도 輿地總圖(전체도에 해당된다)

2. 북 직예 여도 北 直隸 輿圖 (지금의 북경, 천진, 하북성 일대)

3. 남 직예 여도 南 直隸 輿圖 (지금의 강소성, 상해 일대)

4. 산동 여도1 山東 輿圖1 (지금의 산동성 일대)

5. 산동 여도2 요동별도 山東 輿圖2 遼東別圖 (지금의 요녕성, 조양 대련, 심양 일대. 지금의 요녕성 해안지역 가까운 곳을 산동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6. 산서 여도 山西 輿圖 (지금의 산서성 일대)

7. 하남 여도 河南 輿圖 (지금의 하남성 일대)

8. 섬서 여도1 陝西 輿圖1 (지금의 섬서성 일대)

9. 섬서 여도2 陝西 輿圖2 (지금의 감숙성 일대)

10. 절강 여도 浙江 輿圖 (지금의 절강성 일대)

11. 강서 여도 江西 輿圖 (지금의 안휘성 일대)*

12. 호광 여도 湖廣 輿圖 (지금의 호남성 (동정호)일대)

13. 사천 여도 四川 輿圖 (지금의 사천성 일대)

14. 복건 여도 福建 輿圖 (지금의 복건성 일대. 대만 없음)

15. 광동 여도 廣東 輿圖 (지금의 광동성, 홍콩 일대)

16. 광서 여도 廣西 輿圖 (지금의 광서성 일대)

17. 운남 여도 雲南 輿圖 (지금의 광서성 일대)

18. 귀주 여도 貴州 輿圖 (지금의 귀주성 일대)

19. 표지

 

*1368년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의 초기 수도 난징과 인접한 덕에 장쑤 성과 안후이 성 지역은 함께 묶여 남직례(南直隶)에 속했다. 직례란 조정이 직접 통치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1644년 청나라는 중국을 정복한 후 남직례를 폐지하고 강남성(江南省)을 설치했다. 1666년 강남성을 장쑤 성과 안후이 성으로 가르면서 마침내 안후이 성이 탄생하였다. 이 때의 경계는 지금까지 거의 변화가 없다. (위키백과 안후이 성)

 

輿 : 수레, 땅. 繪製者 :佚名. 製圖年代: 明嘉靖二十四年至三十八年(1547–1559. 原圖尺寸 每頁圖幅 75 x 84 cm. 板式類型:彩繪. 材質:絹本. 色彩:彩色. 數量:1 冊(18 幅. 類型:全國政區地圖.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https://digitalatlas.asdc.sinica.edu.tw/map_detail.jsp?id=A103000001 ]

 

부록1

[ 국제무대에서 ‘JAPAN’ 대신 ‘NIPPON’이라고 쓴 영문표기가 제법 눈에 띈다. ‘NIPPON’은 일본 민족주의자들이 애용하는 표현이다. ‘日本’이라는 한자를 일본 한자음으로 읽을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니혼(にほん·NIHON)’이고 또 하나는 ‘닛폰(にっぽん·NIPPON)’이다. 기본적으로 ‘니혼’이 일본의 공식 한자음이다. 일본어(日本語)를 ‘니혼고’라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日本’을 니혼이 아닌 ‘닛폰’으로 읽으면 뉘앙스가 달라진다. 우리말로 옮기면

 

니혼이 ‘일본’이라면 닛폰은 ‘우리 일본’쯤 된다.

 

일본인들은 일본의 혼과 정신을 강조할 때 거의 예외 없이 ‘닛폰’이라는 표현을 애용한다. 일본인들이 세계 최강의 칼이라고 자부하는 전통 일본칼을 ‘닛폰도(日本刀)’라고 하지 ‘니혼도’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의 축구 응원팀 이름도 ‘울트라 닛폰’이다.] (주간조선 200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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