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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이름을 화령和寧으로 할까요? 조선朝鮮으로 할까요? 이 기록을 믿어? 못 믿어? 1550년 대명여지도大明輿地圖를 보자. 추적 에피소드6 (이야기나 사건의 줄거리에 끼인 짤막한 토막 이야기).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88)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8.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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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리아조선 (이성계가 세운 조선. 황하유역에 있었던 조선은 차이나조선이라 부른다. 왕건이 세운 고려도 이와 같다)가 편찬한 역사책들에는 앞부분은 조선이(고려가) 차이나조선(고려) 이어야만 가능한 기록이고 뒷부분은 코리아조선(고려)이어야만 가능한 기록이 많다.

 

[고려사]는 1395년 이성계 태조 시절 편찬되었다가 1418년 이방원 태종, 세종 시절 고쳤다.

 

2. 먼저 고려사 열전 권 제26 제신(諸臣) 중 ‘최영’ 편을 보자.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사 > 권별 보기 > 列傳 > 열전 권제26 > 제신(諸臣) > 최영)

 

1) [사주(泗州)와 화주(和州) 등에서] 라는 문구에서 ‘사(泗)’ 는 지명이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글자이다. 지금 산동성에 ‘泗水(사수)’라는 큰 강이 흐르고 있고, 泗水縣(사수현)이 있다.

 

기원후 100년 경 편찬된 ‘한서지리지’는 83개 군과 20개 국 합계 103개 군국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100번째가 泗水國(사수국)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백제의 마지막 수도 泗沘(사비) 성을 지금의 泗水縣(사수현) 인근으로 지목하고 있다.

 

2) 사주(泗州)와 화주(和州)에 통하는 길인 ‘회안로(淮安路)’ 와 인근에 있는 것으로 기록된 ‘회안성(淮安城)’은 차이나 泗水縣(사수현)에서 동남쪽으로 약 400㎞에 있는 淮安市(회안시)로 비정할 수 있다. 지금도 있는 강소성 淮安市(회안시) 는 코리아와 관련이 많다.

 

차이나 당나라 시기에 회안시 초주(현재 회안시 회안구)에 신라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그들이 살았던 신라방이 연해지대 신라인의 중심사회였으며, 신라의 민족영웅 장보고는 바로 회안에서 살았고 무역을 시작하였다.

 

회안시는 지금도 신라방의 유적을 보존관리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많은 역사 명인들이 회안에 유명한 시구를 남겼다. 고려의 사신 박인량의 <사송과사주구산사>, 최부의 <표해록> 등이 있다.

 

[출처] 중국 강소성 회안시(江苏淮安), 장강삼각주 북부 신흥 경제중심 도시 / 장쑤성 화이안 [상해한인신문]|작성자 상해한인신문

https://blog.naver.com/shkonews/220737988339

 

3) 고려사 열전 26 최영 편 원문과 번역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明年 禦賊 淮安路, 累戰 于八里莊.

다음해(공민왕 2년. 1352년) 에 회안로(淮安路)에서 적을 방어하면서 팔리장(八里庄)에서 여러 번 싸웠다.

 

又 泗·和等州, 賊八千餘艘, 圍 淮安城, 晝夜力戰, 却之.

또 사주(泗州)와 화주(和州) 등에서 적선 8,000여 척이 회안성(淮安城)을 포위하니 밤낮으로 힘써 싸워 그들을 물리쳤다.

 

賊復至, 瑩身被數槍奮擊, 殺獲殆盡. 旣還國, 與印璫攻破鴨綠江以西八站.

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최영이 몸에 여러 번 창에 찔리고도 분전하여 싸우니 적을 거의 다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귀국하고 나서 인당(印璫)과 함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六年出爲西海·平壤·泥城·江界體覆使.

〈공민왕〉 6년(1357)에는 서해(西海)·평양(平壤)·니성(泥城)·강계(江界)의 체복사(體覆使)가 되어 나갔다.

 

明年 倭 四百餘艘寇 吾叉浦, 瑩 設伏, 與戰 克之.

다음해에 왜선 400여 척이 오차포(吾叉浦)를 침략하니 최영이 매복하였다가 싸워서 이겼다.

 

又 明年 爲 西北面兵馬使, 紅賊入西京, 瑩與諸將 戰于 生陽·鐵和·西京·咸從之閒,頗有功.

또 다음해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이 서경(西京)을 침략하자 최영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생양(生陽)·철화(鐵和)·서경·함종(咸從) 일대에서 싸웠고 자못 공로가 있었다.

 

又 明年, 拜平壤尹兼西北面巡問使,

또 다음해에 평양윤 겸 서북면순사(平壤尹 兼 西北面巡使)에 임명되었는데, (후략)

 

3.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아들이자 세 번째 임금인 영락제가 겨우 나이 10살인 1370년에 지금의 차이나 북경시에서 연왕(燕王)이 되었다.

 

1) 코리아 · 차이나 역사에서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가 명나라 주원장과 조선 이성계의 관계이다. 두 사람은 캐릭터나 시기 등이 거의 일치하여 명나라가 조선이라는 주장도 있다.

 

2) 명나라 주원장이 원나라를 몰아내기도 바빴던 건국 초기에 겨우 10살 된 아들을 원나라의 수도였던 지금의 북경시에 연왕(燕王)으로 봉했다는 기록은 차이나 대륙에서 코리아 조선, 고구려·백제·신라, 고려를 지우기 위한 작업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3) ‘명나라’와 코리아 ‘조선’ 두 왕조의 이해가 일치하여 ‘조선’이 고려의 수도였던 지금의 차이나 북경시에서 한반도로 수도 서울을 옮기고, 그 과정에서 ‘명나라’와 ‘조선’은 서로의 역사를 왜곡 조작하였다고 본다면 너무 과장인가?

 

4) 지난 호에서 소개했던 1550년경 만들어진 대명여지도는 이성계 ‘조선’이 나라이름을 ‘조선’과 ‘화녕’ 중에서 선택해달라고 했던 ‘화녕’을 아주 크게 표시하고 있다. 위치는 지금 차이나 동북3성이 아니라 정 반대인 내몽고 가까이다.

 

5)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穆祖 는 전주 (한반도 전주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에서 일가를 거느리고 海(해)를 떠가서(挈(설)家浮海)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 = 덕원(德原)에 가서 살았다. 의주=덕원은 평양과 쌍성에 가까이 있었다. 쌍성(雙城=영흥(永興)에 주둔한 원나라 장수가 권유하자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는 원나라에 망명했다. (부록2)

 

‘부해浮海’는 바다를 건너갈 때 쓰는 표현이 아니다. 필자는 이미 다른 글에서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에 나오는 [종제 부발해從齊 浮渤海]에서 ‘발해’가 지금의 황해가 아니라 차이나 대륙의 호수나 강임을 밝힌 바 있다.

 

전주가 차이나 대륙에 있는 어느 지역임이 밝혀지면 코리아·차이나 역사는 새로 써야 한다.

 

6) 현재 코리아 사학계 주장대로 이성계의 고조부가 배를 타고 도착하여 근거지로 삼은 곳이 한반도 함흥이라면 전주는 어디이어야 할까? 떠오르는 곳이 없다.

 

7) 이성계는 고려 충숙왕 복위 3년(1335년) 고조부가 정착한 동북면 의주에서 태어났다. 지역을 화령이라고 표시한 것은 이성계 관련한 기사에서 처음 나온다. 이성계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고조부 관련 기사 어디에서도 화령은 나오지 않는다.(부록1)

 

8) 그런데 왜 이성계는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에게 ‘화령’과 ‘조선’ 두 개를 제시했을까?

 

4. ‘조선’의 태조 이성계 가 ‘조선왕’이 되기 위해 명나라 태조에게 승인을 받는 과정은 보는 사람이 낯이 뜨거울 정도로 치욕적이다. (부록5)

 

부록1

난데 없이 나타난 화령和寧!!!

 

태조실록 1권, 총서 28번째 기사 환조가 영흥 부원군 최한기의 딸과 혼인하여 화령부에서 태조 이성계를 낳다

 

桓祖 配懿 妃 崔氏, 贈 門下侍中 永興府院君 諡 靖孝公 諱 閑奇之女, 以至元 元年, 高麗 忠肅王 四年 乙亥 十月 十一日 己未, 誕 太祖 於 和寧府 【卽永興府。】 私第。 太祖 生 而聰明, 隆準 龍顔, 神彩 英俊, 智勇 絶倫。 幼時 遊 於 和寧、咸州間, 北人求鷹者必曰: "願得神俊如李 【太祖舊諱。】 者。“

 

환조의 배위(配位)는 의비(懿妃) 최씨(崔氏)이니, 증 문하 시중(贈門下侍中) 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 시호(諡號) 정효공(靖孝公)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지원(至元) 원년, 고려 충숙왕(忠肅王) 4년(1335) 을해 10월 11일 기미에 태조(太祖)를 화령부(和寧府) 【곧 영흥부(永興府)이다.】 사제(私第)에서 낳았다.

 

태조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龍顔]로서, 신채(神彩)는 영특(英特)하고 준수(俊秀)하며, 지략과 용맹은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어릴 때 화령(和寧)과 함주(咸州) 사이에서 노니, 북방 사람들로서 매[鷹]를 구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이성계(李成桂)와 같이 뛰어나게 걸출(傑出)한 매를 얻고 싶다."

 

하였다.

 

부록2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태조실록 1권, 총서 1번째 기사 태조 이성계 선대의 가계. 목조(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의주를 거쳐 ‘알동’에 정착하다 ]

 

穆祖 恐禍及, 挈家浮海, 至 東北面 宜州 【卽(德原)〔德源〕。】 止焉。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로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 【곧 덕원(德原)이다.】 에 이르러 살았는데,

 

民一百七十餘戶 亦 從之, 東北之民, 多歸心焉。

백성 1백 70여 호(戶)가 또한 따라갔고, 동북(東北)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於是, 高麗 以穆祖 爲 宜州 兵馬使, 鎭 高原 以禦元兵。

이에 고려(高麗)에서는 목조를 의주 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 고원(高原)을 지켜 원(元)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時 雙城以北, 【雙城 卽 永興。】 屬于 開元路。

이때 쌍성(雙城) 이북 【쌍성은 곧 영흥(永興)이다.】 지방이 개원로(開元路)005) 에 소속되었고,

 

元 散吉大王 來屯 雙城, 謀取 鐵嶺以北,

원(元)나라 산길 대왕(散吉大王)006) 이 와서 쌍성(雙城)에 둔(屯)치고 있으면서 철령(鐵嶺) 이북 지방을 취(取)하려고 하여,

 

再遣人 請 穆祖 降元, 穆祖 不得已 率 金甫奴 等 一千餘戶 降。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에게 원(元)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하니, 목조는 마지못하여 김보노(金甫奴) 등 1천여 호(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前此, 平壤民 聞 穆祖威望, 多有附者

이보다 먼저 평양(平壤)의 백성들이 목조의 위세(威勢)와 명망(名望)을 듣고 붙좇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至是 與從之, 散吉 大喜, 禮待甚厚, 置 盛宴歡飮。

이때에 이르러 함께 따라오니, 산길(散吉)이 크게 기뻐하여 예절을 갖추어 대우함이 매우 후하였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즐거이 술을 마시었다.

 

(중략)

 

穆祖由水陸路至時利, 【卽利城。】

목조는 수로(水路)와 육로(陸路)를 지나서 시리(時利) 【곧 이성(利城)이다.】 에 이르렀는데,

 

其千戶以兵阻之。

그 천호(千戶)가 군사로써 막으므로,

 

穆祖語以歸順之意, 千戶宴慰甚厚, 穆祖亦以牛馬報之。

목조가 귀순(歸順)한다는 뜻을 말하니, 천호가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 목조도 또한 소와 말로써 그에게 보답하고,

 

遂至開元路 南京之斡東居焉。

마침내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東)에 이르러 거주하였다.

 

寔宋 理宗 寶祐二年, 元 憲宗四年, 高麗 高宗四十一年甲寅也。

이때가 송(宋)나라 이종(理宗) 보우(寶祐) 2년(1254)이요, 원(元)나라 헌종(憲宗) 4년이요, 고려 고종(高宗) 41년 갑인이다.

 

明年乙卯, 散吉聞于元帝, 元爲立斡東千戶所, 給降金牌,

명년 을묘(1255)에 산길이 이 사실을 원(元)나라 황제에게 알리니, 원나라에서 〈목조(穆祖)를 위해〉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를 세우고 금패(金牌)를 내려 주어

 

爲 南京等 處 五千戶所, 首 千戶、兼 達魯花赤。

남경(南京) 등처(等處)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

 

斡東在南京東南九十餘里, 距今慶興府東三十里。

알동(斡東)은 남경(南京) 동남쪽 90여 리(里)에 있으니, 지금의 경흥부(慶興府) 동쪽 30리에 떨어져 있다.

 

斡東西北百二十餘里, 有豆門城, 又其西百二十餘里, 有斡東沙吾里。

알동의 서북쪽 1백 20여 리에 두문성(豆門城)이 있고, 또 그 서쪽 1백 20여 리에 알동 사오리(斡東沙吾里)가 있으니,

 

沙吾里, 女眞言站也。站在斡東管內, 故云然。

사오리(沙吾里)는 여진(女眞) 말로서 참(站)이다. 참(站)이 관동 알동의 관내(管內)에 있는 까닭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其平 有 大土城, 南京之平, 亦有大土城, 其北七八里, 又有大石城, 皆穆祖管領軍民之所居也

그 평야(平野)에 큰 토성(土城)이 있고, 남경(南京)의 평야에도 또한 큰 토성이 있으며, 그 북쪽 7, 8리에도 또한 큰 석성(石城)이 있으니, 모두 목조가 관령(管領)한 군민(軍民)이 거처하던 곳이다.

 

穆祖雖居斡東, 而往來諸城, 不常厥居。

목조는 비록 알동에 거처하였으나, 여러 성(城)에 왕래하여 그 거처가 일정하지 않았다.

 

斡東東南三十餘里, 有海島曰者考羅, 北連於陸。 穆祖築石城, 以放牛馬。

알동의 동남쪽 30여 리에 해도(海島)가 있는데, 자고라(者考羅)라고 한다. 북쪽으로 육지에 연하였는데, 목조(穆祖)가 석성(石城)을 쌓아 소와 말을 놓아 먹였다.

 

憲宗八年, 受散吉令旨, 管領李春、文大純、趙奧、魯哥兒、卓靑、尙哉、光奕、張哥等八介百戶之任, 上充兼扢扎百戶句當

〈원나라〉 헌종(憲宗) 8년(1258)에 산길(散吉)의 영지(令旨)를 받아, 이춘(李春)·문대순(文大純)·조오(趙奧)·노가아(魯哥兒)·탁청(卓靑)·상재(尙哉)·광혁(光奕)·장가(張哥) 등 8개 백호(百戶)를 관할하는 직책에 승진되고, 겸하여 흘찰 백호(扢扎百戶) 직무를 맡게 되었다.

 

세조 황제(世祖皇帝) 중통(中統) 2년(1261) 신유 6월에 상서성(尙書省)에서 본소(本所)에 사용하는 동인(銅印)을 내려 주었다.

 

至元元年甲子五月, 欽 受 宣命, 仍 充 斡東 千戶 句當。

지원(至元) 원년(1264) 갑자 5월에 황제의 선명(宣命)을 받아, 그대로 알동(斡東) 천호(千戶)에 충원(充員)되었다.

 

至元十一年甲戌十二月薨, 葬于孔州 【卽慶興府。】 城南五里,

지원(至元) 11년(1274) 갑술 12월에 훙(薨)하니, 공주(孔州) 【곧 경흥부(慶興府)이다.】 성(城) 남쪽 5리(里)에 장사하였다.

 

後 遷葬 于 咸興府之義興部 韃靼 洞, 卽 德陵。

후일에 함흥부(咸興府)의 의흥부(義興部) 달단동(韃靼洞)에 옮겨 장사하였으니, 곧 덕릉(德陵)이다.

태조실록 1권, 총서 2번째 기사 목조 이안사가 알동 천호소의 수(首)천호로서 다루가치를 겸하다

 

태조실록 1권, 총서 3번째 기사 목조가 알동 부근의 해도에 석성을 쌓아 소와 말을 방목하다

 

태조실록 1권, 총서 4번째 기사 목조가 이춘 등의 8개 백호를 관할하고 흘찰 백호의 직무를 겸하다

 

태조실록 1권, 총서 5번째 기사 원의 상서성에서 알동 천호소의 구리 도장을 보내오다

 

태조실록 1권, 총서 6번째 기사 목조가 죽자 공주에서 장사지내고 후에 함흥부로 옮겨 덕릉이라 하다

 

부록 3 위화도회군 이성계, 권력을 장악하다1388년(우왕 14년)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304700&code=kc_age_30

 

1. 개요

위화도회군은 1388년(우왕 14년)에 우왕의 명을 받아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던 이성계 등이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2 위화도회군의 대내적·대외적 배경

14세기 중엽 원이 점점 쇠퇴하자 동아시아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당시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은 이 기회를 틈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여 몽골의 고려침입 이후 원에 빼앗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하고, 원과 결탁하여 행패를 부리던 기철(奇轍) 등의 무리들을 쫓아냈다. 또한 원을 몽골 고원으로 쫓아내고 중국 본토를 새로이 장악한 주원장의 명과 새로이 외교관계를 맺었다.

 

명과 고려의 관계는 처음에는 유화적이었으나 갈수록 악화되어 갔고, 친명적이었던 공민왕이 시해된 이후 더욱 얼어붙었다. 공민왕 사후 집권한 이인임(李仁任) 정권은 명과 사대관계에 있으면서 북원과도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등거리 외교를 시도하였고, 이는 명의 의심을 샀다. 또한 공민왕은 세 차례 군대를 보내어 북원이 지배하고 있었던 요동 지방을 공격하였다. 아울러 요동 지방에 사는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고려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의 세력이 요동에 뻗어가면서 명과 고려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외에도 고려는 중대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원말에 중국 남방에서 일어난 반란군인 홍건적의 일파가 고려에 침입하여 개경을 함락시키는 등 큰 피해를 주었으며, 왜구는 고려의 연해지방을 거의 초토화시키다시피 했다.

 

필자 주 : 홍건적의 난을 당할려면 고려의 개경은 차이나 대륙에 있어야 한다.

 

또한 권세가들은 남의 토지를 빼앗고 양민을 노비로 삼아 농장을 만들었고, 일반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유망하거나 권세가의 농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권근(權近)은 당시 끊이지 않는 왜구의 침입과 자연재해, 권세가들의 토지겸병과 가혹한 수탈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죽어가는데도 조정에서는 이에 마땅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통탄하였다.

 

고려 사회의 내우외환 속에서 새로운 세력들이 성장했다. 잦은 외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무장들이 영웅으로 떠올랐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존재가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 최영(崔瑩)이었다.

 

이성계는 쌍성총관부의 유력자였던 환조[이자춘](桓祖)의 아들로서,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원으로부터 회복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귀순했다. 이후 장군으로서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전투마다 승승장구하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실력으로 출세한 지방 세력가의 아들로서, 떠오르는 신세력의 대표자였다.

 

반면 최영은 30년 동안 왜구를 토벌하여 홍산에서 왜구를 대파하는 등 명성이 드높은 백전노장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부친의 유훈을 종신토록 지킬 만큼 청렴 강직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권문세족 출신으로서 구세력의 대표자였다.

 

필자 주)

1360년 주원장은 창장(長江, 장강) 유역에서 패권을 놓고 경쟁자들과 다투었지만, 지금의 베이징에 있던 원의 조정은 내분에 휘말려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다. 그후 7년 동안 그의 군대는 중국 중부 및 동부 지역에서 경쟁세력을 제압했다. 1368년에 난징을 도읍으로 하는 명나라를 정식으로 발족시키고 연호를 홍무(洪武)로 정했다.

 

그는 몽골족의 마지막 황제를 베이징에서 내쫓은 다음, 다시 만리장성을 넘어 고비 사막으로 추방했다. 1370년 홍무제는 10세인 주체를 연왕(燕王)에 봉했다(연은 지금의 베이징 지역).

 

필자 주 : 10살인데 왕에 봉한다? 날조의 역사로 보인다. 고려가 북경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음으로 연고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부록 4

부록4-1.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6일 임술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좌시중 조준이 전문을 올려 평양의 식읍과 도통사의 관직을 사양하다

 

최영은 학술이 없는 사람이므로 이에 위주(僞主)208) 와 더불어 요동(遼東)을 범하려고 모의하여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자, 전하께서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돌이켜서 삼한(三韓)의 백성으로 하여금 썩어 문드러짐을 면하게 하였으니, 이 일은 전하께서 세상을 구제한 공로가 사직(社稷)에 있는 것입니다. 瑩無學術, 乃與僞主, 謀犯遼東, 師渡鴨江, 殿下擧義旋旆, 使三韓之民, 得免於糜爛, 是殿下康濟之功, 在社稷矣。

(중략)

이로써 누선(樓船)을 만들고 이로써 성보(城堡)를 쌓게 하여, 무위(武衛)가 떨치게 되고 조로(漕路)가 통하게 되어, 삼한(三韓) 40년 동안의 왜놈[倭奴]의 병화(兵禍)가 하루아침에 그쳐졌습니다. 과전(科田)을 경기에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하고 군전(軍田)을 주군에 설치하여 군사를 길렀으며,

以之造樓船, 以之築城堡, 武衛以奮, 漕路以通, 三韓四十年倭奴之患, 一朝而息矣。 置 科田 於 京畿, 以優士大夫; 置軍田於 州郡, 以養師徒。

 

문치(文治)가 이미 흡족하고 무위(武威)가 멀리까지 밝아져서, 부상(扶桑)214) 의 도적이 진보(珍寶)를 받들고 와서 조회하고, 유구(琉球)와 남만(南蠻)이 이중으로 통역하여 들어와서 조공하였습니다.

文治旣洽, 武威遠昭, 扶桑之寇, 奉珍來庭, 琉球、南蠻, 重譯入貢,

[註 214]부상(扶桑) : 일본(日本).

필자 주] 남만은 지금의 베트남, 홍콩, 지금의 차이나 광동·광서·복건성을 말한다. 부상은 한반도가 아닐까? 三韓 四十年 倭奴之患,에서 왜는 차이나 대륙에 있다고 본다.

(중략)

금년 3월에 와서 전하께서 세자(世子)가 〈중국에〉 들어가 조회하고 동쪽으로 돌아올 적에 서울 서쪽 수백 리의 먼 곳까지 나가서 맞이하고,

及今年三月, 殿下 以儲(저, 태자)君 之 入覲 而東也, 出迎 京西 數百里 之遠, 又將躬獵以來而展賀焉, 不幸墜馬, 臥于草次。 姦臣鄭夢周, 殿下之所卵翼也。

필자 주] 고려의 서울이 차이나 대륙 최소한 요령성 심양, 요양 등 지역에는 있어야 가능한 표현. 한반도 개성에 있으면 서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야 함.

 

전하께서 이에 왕씨(王氏)를 강릉(江陵)의 간성(杆城)에 봉하였으니, 이 일은 탕왕(湯王)이 걸왕(桀王)을 남소(南巢)에 내쫓은 것이요, 왕씨의 동모제(同母弟)를 기현(畿縣)의 마전(麻田)에 봉하여 신성왕(神聖王)과 공민왕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니, 이 일은 무왕(武王)이 미자(微子)217) 를 송나라에 봉한 것입니다. 여러 왕씨를 강화도(江華島)·거제도(巨濟島)에 안치(安置)하고는 관에서 미곡(米穀)을 급여하게 하였으니, 한(漢)나라·위(魏)나라 이후로 혁명(革命)한 군주로서는 미치지 못한 바입니다.

殿下於是, 封王氏 于 江陵之杆城, 是成湯之放桀于南巢也; 封 王氏母弟 于 畿縣之麻田, 使奉神聖、恭愍之祀, 是武王之封微子于宋也; 安置諸王氏于 江華、巨濟 而 廩(늠)給之, 漢、魏以降, 更革之主 所未及也。

 

지난번에 만약 전하께서 나라를 취(取)할 마음이 있었다면, 압록강에서 군사를 돌이킬 적에 어찌 즐거이 만 번 죽을 위태한 지경에 나와 한 평생을 버리면서까지 왕씨를 부흥시킬 의논을 세웠겠습니까?

向若殿下有心於取國, 則鴨江之旋旆也, 豈肯出萬死捐一生, 而建興復王氏之議乎,

 

전년(前年) 가을에 또 어찌 즐거이 저군(儲君)에게 천자(天子)를 알현하도록 건의(建議)하였겠습니까?

前年之秋, 又豈肯建議見儲君於天子乎?

 

필자주 ] 명나라 왕을 천자라고 부름 .

 

지금 하늘이 이미 전하에게 명령하여 삼한(三韓)에 어버이 노릇하게 하였으니, 今天旣命殿下, 而父母三韓矣。

 

상도 이미 극도에 도달하였는데 식읍(食邑) 1천 호(戶)에 실봉(實封) 3백 호를 더 주고,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의 군사를 총제(摠制)하는 권한까지 더 맡기시니, 신이 어찌 이를 감당하겠습니까?

賞已極矣。 加之以食邑 千戶, 實 封三百, 重之以 京畿左右摠制之權, 臣何足以堪之!

필자 주] 경기남북이 아니라 경기 좌우임에 주목해야 한다!

 

부록4-2.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2월 17일 계해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황제의 은혜를 사례하는 표문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우인열(禹仁烈)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 남경에 가서 은혜를 사례하고 말 30필을 바치게 하였다. 그 표문은 이러하였다.

癸亥/遣 門下侍郞 贊成事 禹仁烈, 奉表謝恩 于 帝京, 獻馬 三十匹。 表曰:

 

"배신(陪臣) 조임(趙琳)이 중국 남경에서 돌아오매, 삼가 예부의 자문(咨文)을 받아 황제의 칙지(勅旨)를 삼가 받들었는데 훈계가 매우 간절했으며

陪臣趙琳 回自京師, 伏蒙 禮部咨。 欽 奉聖旨, 訓戒深切, 仍許臣權知國事。

 

부록 5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29일 병오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국호를 화령과 조선으로 정하여 황제의 재가를 청하는 주문

 

丙午/

遣 藝文館 學士 韓尙質 如 京師, 以 朝鮮、和寧, 請更 國號。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어 중국 남경경사京師에 가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으로써(중에서) 국호(國號)를 고치기를 청하게 하였다.

 

奏曰: 주문(奏文)은 이러하였다.

 

"陪臣 趙琳 回 自京師, 欽 齎 到禮部 咨。

"배신(陪臣) 조임(趙琳)이 중국 서울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와서 삼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 : 명령문)을 가지고 왔는데,

 

필자주 ] 欽 흠. 천자에 관련된 글에 붙이는 존칭어 (치욕적이다)

齎 자·제·재 가져오다.

 

문서가 도착하는 날에 나라는 어떤 칭호를 고칠 것인가를 빨리 달려와서 보고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欽 奉 聖旨 節該:

그 자문에, ‘삼가 황제의 칙지를 받들었는데 그 내용에,

 

‘高麗 果 能 順 天道 合 人心, 以(妥)〔綏〕 東夷之民, 不生 邊釁(흔), 則 使命往來, 實 彼國之福 也。

이번 고려에서 과연 능히 천도(天道)에 순응하고 인심에 합하여, 동이(東夷)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변방의 흔단(釁端. 결점)을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사절(使節)이 왕래하게 될 것이니, 실로 그 (너희) 나라의 복이다.

 

 

文書到日, 國更何號, 星馳來報。

문서가 도착하는 날에 나라는 어떤 칭호를 고칠 것인가를 빨리 달려와서 보고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 欽此 切念 小邦 王氏之裔 瑤, 昏迷 不道, 自底 於亡, 一國 臣民, 推戴 臣權監 國事。

삼가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소방(小邦)은 왕씨(王氏)의 후손인 요(瑤)가 혼미(昏迷)하여 도리에 어긋나서 스스로 멸망하는 데 이르게 되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신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를 보게 하였으므로 權監 國事

요(瑤) : 고려의 마지막 왕

 

驚惶 戰栗,

놀라고 두려워서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전율하였습니다.

 

措 躬無地間, 欽蒙 聖 慈許 臣 權知國事, 仍問 國號, 臣 與國人 感喜尤切。

요사이 황제께서 신에게 권지 국사(權知國事)를 허가하시고 이내 국호(國號)를 묻게 되시니, 신은 나라 사람과 함께 감격하여 기쁨이 더욱 간절합니다.

 

臣竊思惟, 有國 立號, 誠非小臣 所敢 擅便。

신이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國號)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小臣)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謹將 朝鮮、和寧 等號, 聞達天聰, 伏望取自聖裁。"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奏達)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裁可)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初 上欲遣使, 難 其人, 尙質 自請 曰: "臣雖乏專對之才, 敢不敬承上命, 以効寸忠!" 上說。

처음에 임금이 사신을 보내고자 했으나 그 적임자를 어렵게 여겼는데, 상질(尙質)이 자청하여 아뢰었었다.

 

"신(臣)이 비록 외국에 사신 가서 응대할 만한 재간은 부족하지마는, 감히 성상의 명령을 받들어 조그만 충성을 나타내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기뻐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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