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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낙랑군으로 편제된 ‘조선’ 뿐만 아니라, 소리 소문 없이 낙랑군으로 편제되고 분류된 ‘코리아 韓(한)나라 三韓(삼한)’도 잘 찾아 보아야 한다.” 차이나가 가지고 있는 강대국 ‘조선’에 대한 열등감. 차이나 대륙에서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지워라. 거대한 음모 (7)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76)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7.07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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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 =‘코리아 한문단에 나오는 魏略(위략)’이라는 역사책 부분을 살펴보자.

 

(1) ‘위략의 문장을 줄이면 다음과 같다. 충격적이다.

[ 기원전 200년 경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왕을 빼앗기고 () 지역에 속하는 코리아 () 지역에 들어가서 코리아 ()나라 왕이 되었다. 코리아 ()은 차이나 ()나라 시대에 낙랑군에 속했다. ‘() 지역역시 낙랑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반고漢書(한서)’는 우거왕의 ()조선을 차이나 ()이 정복하고 낙랑·진번·임둔·현도 4군을 두었다고 기록했다. ‘한서 조선전()조선이 멸망한 곳에 낙랑군 등을 두었다고 하는데, ‘위략()조선 망하기 전 약 100년 전에 조선왕 준이 [100년 후에 낙랑군에 속하는] 코리아 () 지역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한서위략중 어느 기록이 진실인가?

 

사기’, ‘한서[()만조선]이외에는 조선이 없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위략[원래 조선]()만이 들어와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서위략중 어느 기록이 진실인가?

 

(2) 위키백과 위략에 대한 소개이다.

 

외국에 관한 기술은, 현존하는 당시 문헌에서는 가장 자세하고, 고조선(古朝鮮), 삼한(三韓) 그리고 대진국(大秦國, 로마 제국)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중략) 고조선에 대해서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위만이 건국하였던 위만 조선 이전에 존재했던 고조선의 존재를 언급을 안했지만,

 

위략은 연나라 역왕때의 고조선 국왕이 왕을 칭하자, 대부 예가 고조선 국왕에게 칭왕을 말렸던 일화와 고조선 부왕의 치세, 위만(衛滿)에게 축출되는 준왕의 기록과 고조선 왕족의 성씨가 한씨(韓氏)라는 기록을 하였고,

 

특히 로마 제국(대진국)에 대해 중국 측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사료였고, 중국 황제 체제와 달랐던 로마 원로원의 존재를 시사한 기술이 있다.

 

이 두가지 설을 종합 하면, 원래 중국 고대사부터 조조가 세운 위나라까지의 통사로 저술한 책이 [전략]이 되었고, 그 내용 중에서 [전략]에 있는 내용 중에서 조조가 건국한 위나라의 기록들을 떼어내어서 [위략]이라고 이름이 붙이게 되고, 그 외 다른 왕조들의 기록들은 [전략]이라는 책으로 남게 되었다고 하였다. (위키백과. 위략)

 

(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원문은 너무 복잡하여 차이나 국학도항 사이트에서 원문을 가져왔다. 다음과 같은 편제이다.

 

2. 먼저 코리아 한문단의 원문과 필자가 번역한 내용이다. 그 다음 ,,으로 번호를 매기고 위략이 기록한 것을 원문과 필자가 번역하여 게시한다.

 

삼국지 진수가 쓴 아래 ,,을 요약하면

 

기원전 200년경 조선왕 준이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에게 조선을 빼앗기고 코리아 ()나라 땅에 들어가 한왕韓王이 되었다. 코리아 ()나라는 낙랑군에 속했다. ”

 

그런데 반고의 한서 조선전을 요약하면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침공하여 낙랑군 등 4군을 만들었다.”

 

위 두 글을 억지로 꿰 맞추면

 

기원전 200년 이전부터 차이나 대륙에 조선이 있었던 지역이나, 차이나 대륙에 코리아 ()나라가 있었던 지역, 둘 다 모두 차이나 ()나라가 기원전 100년경에 만든 낙랑군에 속했다.” 가 된다.

 

이제 같이 낙랑군으로 편제된 조선뿐만 아니라, 소리소문 없이 낙랑군으로 편제되고 분류된 코리아 ()나라도 잘 찾아 보아야 한다.

 

侯 準 既 僭號稱 王為 燕亡人 衛滿 所攻 奪,〔

조선후[朝鮮]이 참람되이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將 其 左右宮人 走入海居韓地自號 韓王。〔

준왕은 그의 중요 대신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발해군으로 들어갔다. 코리아 한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코리아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漢時 屬 樂浪郡四時朝謁。〔

코리아 한은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사시사철 조공했다.

 

3. ①〔과 관련된 위략의 기록.= “조선후 이 참람되이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와 관련된 역사책 위략魏略의 기록

 

1) 昔 箕子之後 朝鮮侯見 周衰燕 自尊為王欲東略地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가 나라가 쇠약해지자, 나라가 스스로를 높여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朝鮮侯 亦 自稱 為王欲 興兵 逆擊燕 以尊 周室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역습하려 했다. 그리하여 주나라 왕실을 존중하려 하였다.

 

[ 마지막 문장 나라 왕실을 존중하려 하였다.” 는 필요 없는 문장이다. 차이나의 입장에서 힘빠진 주나라 왕실을 그대로 기록하기 곤란하여 ()조선이 주나라를 따랐다는 말을 일부러 써 넣은 것이다.

 

其大夫 禮 諫之乃止使禮 西 說燕燕止之不攻

조선의 대부 예가 연나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간하므로 공격을 중지하였다. 대부 예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여 연나라도 동쪽으로 공격하려는 것을 멈추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다.

 

2) 後 子孫 稍 驕虐燕 乃 遣 將秦開 攻 其西方取地 二千餘里

至 滿 番汗 為界朝鮮遂弱

그 뒤에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져서, 나라는 장군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의 세력은 弱化되었다.

 

2-1) 교만하고 포악해 진 자손이 연나라인가 조선인가. 전체 서술 구조로 보아 조선으로 본다. 이 경우 차이나가 가지고 있는 강대국 조선에 대한 열등감을 엿볼 수 있다.]

 

2-2) 만번한滿番汗 이 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임은 명백하다. 그 전에는 2천리 서쪽이었다. 차이나 1리는 워낙 고무줄이어서 십리를 5로 본다면 2천리는 1,000이다.

 

만번한滿番汗 滿’ + ‘’ + ‘이다. ‘滿위만滿이다. ‘진번조선이다.

 

2-3) 이와 관련된 국사편찬위원회해석은 참으로 낯이 부끄러운 지경이다. ‘만번한현과 번한현을 연달아 써놓은 것이라고 한다. ‘滿文縣 이 어디가 같은 글자이고, 어떻게 같은 발음인가?

 

이곳은 漢書地理志에 나타나는 前漢代 遼東郡屬縣으로 文縣番汗縣의 연칭으로 讀史方輿紀要에서는 文縣故城蓋州衛 서쪽에 있다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 현재 요동 반도의 蓋平 서쪽에 文縣이 비정되며 番汗縣의 경우 漢書地理志 番汗縣조에 沛水가 흐른다는 내용032을 참조할 때 淤泥河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 바 이들 지역은 현재의 遼東 海城縣 蓋平일대로 파악된다.03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론 34’ [1. 춘추전국시기 고조선의 영역])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setId=-1&prevPage=0&prevLimit&itemId=hn&types&synonym=off&chinessChar=on&levelId=hn_034_0010_0030_0010&position=-1&fbclid=IwAR29s5Dk40waWi-Aq81xzwfdoxeFOWvWisEl3lk_KQitbjo855I5Qx48Z5A

 

2-4) 한서 지리지 요동군은 18개 현이 있는데 17번째 현이 번한番汗 현이다.

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應劭曰:「汗水出塞外西南入海番音盤。」師古曰:「沛音普蓋反汗音寒。」

 

위략의 문장 [至 滿 番汗 為界 지 만 번한 위계] 에서 滿番汗의 형용사로 볼 수도 있고, 부사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번한에 완전히 다다를때까지의 영토로 국경을 삼았다.] 또한 만번한滿番汗 세 글자 모두가 지명인 고유명사라고 해도 번한番汗 두 글자가 지명인 고유명사와 어떠한 형태로든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가령 “[위만]이 지배한 번한이다.

 

2-5) ‘번한현에 달아 놓은 응소의 주석이다.

[한수汗水가 국경 바깥(새외)로 흘러 서남으로 ()로 들어간다.]

 

이 때의 ()를 지금의 황해로 본 견해가 주류였다. 주류는 당연히 부일 식민 사학자 들이다. 서남으로 흐르는 강은 한반도에 있는 어느 강이나 지금의 차이나 요녕성에 있는 현재의 요하가 해당될 수 있겠다.

 

최근 시민연구자 들의 호된 비판으로 부일 식민 사학자들이 기존의 한반도에서 요녕성 요하로 한발 물러선 형국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론 34’ [1. 춘추전국시기 고조선의 영역]을 참조하면 된다.

 

한서지리지 요동군 번한현에 汗水한수가 나왔다. 汗水出塞外西南入海

 

그런데 요동군 번현 망평현에 그냥 요수가 아니라 대요수가 나온다. 역시 서남으로 흐른다. ‘대요수가 지금의 요하인지 여부는 나중에 살펴 보자.

 

같은 요동군 조에 대요수가 나온 이상 최소한 요동군 번한현 汗水한수가 지금의 요하일 가능성은 없다. 望平大遼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

 

3) 及 秦 并 天下使 蒙恬 築 長城到 遼東

진시황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장성(만리장성)이 역사왜곡의 표본이다. 만리장성 연구만 해도 수십페이지가 모자랄 것이다. (계속)

 

부록1)

위략(魏略)은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를 중심으로 쓰여진 역사서이다. 후에 책이 유실되어서, 청나라때 왕인후(王仁俊)가 잔존하여 전해진 글을 모아 집본을 펴냈지만, 매우 간략했기 때문에 장붕일(張鵬一)이 민국(民國) 11년에 다시 편집했다. 저자는 어환(魚豢)이다. 어환의 행적 대해서 전해지지 않고, 위략의 저작자인 것 이외는 알려지지 않았다. 삼국지(三國志)의 배송지(裴松之)의 주석에 인용된 기록에 의하면, 유표(劉表)와는 서로 안면이 있는 관계였다고 한다. 그 후에는 위나라의 신하가 되었다는 기록밖에 없다. ” (위키백과. 위략)

 

 

부록2)

遼東郡秦置屬幽州縣十八

襄平有牧師官莽曰昌平

新昌

無慮西部都尉治。〔〕〔〕 應劭曰:「慮音閭。」師古曰:「即所謂醫巫閭。」

望平大遼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長說。〔〕〔師古曰:「說讀曰)〔〕。」 대요수가 새외로 나가, 남으로 을러 안시에서 해로 들어간다. 1,250리다.

候城中部都尉治

遼隊莽曰順睦。〔〕〔〕 師古曰:「隊音遂。」

遼陽大梁水 西南 至 遼陽 入遼莽曰遼陰대량수가 서남으로 흘러 요양에서 요로 들어간다.

險瀆,〔〕〔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臣瓚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師古曰:「瓚說是也浿音普大反。」

居就室偽山室偽水所出北 至 襄平 入 梁 也실위산에서 실위수가 나와 북으로 흘러 양평에서 양()로 들어간다.

高顯

安市

武次東部都尉治莽曰桓次

平郭有鐵官鹽官

西安平莽曰北安平

莽曰)〔

番汗沛水出塞外西南入海。〔〕〔應劭曰:「汗水出塞外西南入海番音盤。」師古曰:「沛音普蓋反汗音寒。」

沓氏。〔〕〔應劭曰:「氏水也音長答反。」師古曰:「凡言氏者皆謂因之而立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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