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한서 동이열전 韓(한)조에 나오는 낙랑군 염사읍(현),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韓(한)조가 ‘위략’이라는 역사서에서 인용한 이야기. “ 진한의 우거수右渠帥 ‘염사 치 廉斯 鑡’ 가 낙랑군으로 귀화했다. ”
2. 마한의 ‘염사 지역’이 낙랑군의 ‘염사 읍(현)’이 되었다. ‘마한의 일부= 낙랑의 일부’ 라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후한서 해당 부분 이다.
漢(한)나라 건무 20년( 기원후 44년, 백제 다루왕 多婁(누, 루, 리)王 17년) 에 마한韓의 염사廉斯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樂浪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漢(한)나라의 광무제는 소마시를 낙랑군 염사읍의 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조공하도록 했다.
漢(한)나라 영제 말년(189년 경)에 마한韓과 예濊가 모두 강성해져 漢(한)나라의 군현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마한韓으로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나라 영제(靈帝 : 156-189) 유굉(劉宏)은 동한(東漢)의 황제로 168년에 즉위했다.
建武二十年,韓人 廉斯人 蘇馬諟等 詣 樂浪貢獻。〔一〕 光武 封 蘇馬諟 為 漢 廉斯邑君,使 屬 樂浪郡,四時朝謁。靈帝末,韓、濊並盛,郡縣不能制,百姓苦亂,多流亡入韓者。
〔一〕 廉斯,邑名也。諟音是。後漢書 卷八十五 東夷列傳 第七十五
1) ‘한나라 군현이 힘이 약해 많은 백성들이 마한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에서 한나라와 마한은 아주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마한 염사 사람 ‘소마시’를 낙랑군 염사읍(현)의 우두머리로 세웠으니 낙랑군은 차이나 한漢나라가 “지배했다.”고 거짓말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낙랑군은 차이나 한漢나라가 조선을 은폐하기 위해 그냥 이름 붙인 ‘지역’에 불과한 것이다.
4. 삼국지 ‘위략’ 기록 요약 및분석
1) 기원전 130년 경 조선의 넘버2가 1만2천여명을 데리고 辰(진)=진한=마한으로 들어갔다. 150년~160년 후인 기원후 20년 경에 진한의 우거수 이고 ‘염사’ 지역의 우두머리 ‘치’가 정치적 이유로 차이나 한漢나라 낙랑군으로 귀화할려고 ‘염사’ 지역을 나서던 중 한漢나라 백성으로 진한에 납치되어 노비로 일하던 천오백여명 중 한명인 ’호래‘를 만났다.
2) ‘염사 치’와 ‘호래’는 ‘염사’에서 낙랑군 함자현으로 들어갔다. 들어갈 때는 배로 갔는 지 알 수는 없지만 ‘금중’이라는 곳에서 큰 배를 타고 천오백명 포로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 왔다. 살아 남은 한漢나라 포로 1천명 과 진한에 살던 코리아 韓(한)나라 사람 1만 5천명을 데리고 차이나 한나라에 망명하여 기원후 125년경까지 잘 살았다.
3) 기원전 130년 경 辰(진)=진한=마한으로 들어간 조선의 재상과 1만2천여명이 ‘염사 치’가 데리고 차이나 한나라로 귀순한 1만5천여명의 선조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으면 기원전 130년 경의 기록과 기원후 20년 경의 기록을 연달아 서술할 이유가 없다.
4) 삼국지의 ‘염사 치’는 ‘후한서의 ’염사인 소마 시‘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두머리의 의미로 쓰이는 ’치‘와 소마 ’시‘의 ’시‘는 발음이 비슷하다. 소마 역시 ’염사 지역‘에 가까운 ’지역 이름‘일 가능성이 높으며, ’치=시=우두머리‘로 본다.
5) 한서지리지 낙랑군에 ‘함자 현’이 있다. ‘금중’이라는 지역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큰 배를 타고 1만6천여 명을 수송했는데 숫자는 ‘허풍’이 많이 들어간 것이라고 해도 ‘금중’과 ‘염사’는 ‘강’ 근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강’은 황하, ‘제수= 제나라 강’, 다른 강 중 하나일 것인데 ‘황하’ 인근일 가능성이 높다.
6) 후한서는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 서에서 동으로, 혹은 북에서 남으로, 낙랑군 – 마한 – 진한이라고 한다면 ‘염사 치’가 낙랑군 금중을 출발해서 마한을 통과하여 진한 염사까지 오는 데 ‘큰 배가 다니는 넓은 강’이 있다는 결론이 된다.
7) 한서지리지 낙랑군 설명이다.
7-1) 응소가 말하기를 낙랑군은 옛날 ‘조선’ 이다.
7-2) 첫 번째 현이 ‘조선’ 현인데 응소가 말하기를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7-3) 네 번째 현이 ‘함자’ 현인데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흘러 대방(현)에서 海(해)로 들어간다.
7-4) 여덟 번째 현이 ‘대방’ 현이다.
7-5) 스무번째 ‘불이不而’ 현에 동부도위가 있다고 하니 ‘불이’ 현이 낙랑군 동부에 있다. 낙랑군 = 마한이라면 마한의 동부에 있는 진한이 ‘불이’ 현이거나 불이 현에 가깝다.
8) 함자현에서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흘러 대방(현)에서 海(해)로 들어간다. ‘염사 치’가 ‘함자’현에서 낙랑군에 연락을 했고 ‘금중’에서 큰 배를 탔으니 ‘금중’은 ‘함자’현과 가까울 것이다. ‘금중’에서 탄 배가 흘러 간 강은 대수帶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8-1) 대방(현)에서 대수帶水가 들어간 海(해)가 지금의 황해 라면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생각각할 수가 없다. 도리어 한반도 평양이 낙랑·대방 지역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형편이다.
8-2) 대방(현)에서 대수帶水가 들어간 海(해)가 지금의 황하 혹은 어느 호수라면, 서쪽으로 흐르는 강은 산동성에 있는 강일 수도 있다. 지금의 산동성 지역에서 서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가는 제법 큰 강은 대문하大汶河이다.
8-3) 대문하는 산동성에서 시작하는 牟汶河(모)문하 (고구려 주몽=鄒牟(추모)왕의 모)와 嬴汶河(영)문하 (진시황의 이름 '영정(嬴政)')가 합쳐져 대문하가 되고 대문하는 서쪽으로 흘러 동평호를 거쳐 황하로 들어간다.
대문하가 대수帶水 라면 ‘염사 치’가 타고간 배는 강을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과거 지도에서는 모문하 아래에 시문하 가 있었고 두 강이 합쳐져 대문하가 되었다. (바이두 大汶河)
대문하는 대문구유적이 발굴된 강이다.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는 1959년 산동성 태안현에서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하였고, 100개소 이상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탄소 방사성 측정 결과 5,700여 년 전의 유물이 발굴되었고 소호少昊라는 문자까지 발견되었다는데 소호는 동이족의 성씨이다.[다시 동이를 말한다(5) 동이족의 발자취를 찾아서. 김선주 연구위원]
4.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한)조에서 ‘위략’이라는 역사서에서 인용한 진한의 우거수右渠帥 ‘염사 치 廉斯 鑡’ 의 낙랑군 귀화 이야기를 원문과 필자가 번역한 것을 한 구절씩 보자
漢時 屬 樂浪郡,四時朝謁。〔三〕魏略曰:
코리아 한韓은 한漢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사시사철 조공했다. ‘위략’에서 말하기를
1) 初,右渠 未破 時,朝鮮 相 歷 谿 卿 以諫 右渠 不用,東之辰國,
時 民隨出居者 二千餘戶,亦 與朝鮮貢蕃 不相往來。
일찍이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의 넘버2 재상이 “예谿=濊” 의 고위 관리“ 경卿”을 통하여서歷 우거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과 진번 眞藩 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 자세한 내용은 필자 6.29 자 기사 거대한 음모 (4) 참조 ]
2) 至 王莽 地皇 時,廉斯 鑡 為 辰韓 右渠帥,聞樂浪 土地 美,人民 饒樂,
亡欲來降。出 其邑落,見 田中 驅雀 男子 一人,其語 非韓人。問之,男子曰:
왕망의 연호인 지황 연간에 (기원후 20~23년), ‘염사 치 廉斯 鑡’ 가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어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염사 치’가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코리아 한韓나라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염사 치’가 물으니 남자가 말하기를,
3) 「我等 漢人,名 戶來,我等 輩 千五百人 伐材木,為韓所 擊得,皆斷髮 為 奴,
積 三年矣。」 鑡曰:「我當降漢樂浪,汝欲去不?」戶來曰:「可。」
“우리들은 한漢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호래’이다. 우리들 천 5백명은 재목을 벌채하다가 코리아 한韓나라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우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염사 치’가 “나는 한漢나라의 낙랑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하니, ‘호래’는 “좋다.”고 하였다.
4) (辰)鑡 因 將戶來(來)出詣 含資縣,縣 言 郡,郡即 以鑡 為 譯,
從 芩中 乘 大船 入 辰韓,逆取 戶來。
‘염사 치’는 ‘호래’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으로 갔다. ‘함자’현에서 낙랑군에 연락을 하자, 낙랑군은 ‘염사 치’를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서 ‘호래’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5) 降伴輩 尚得 千人,其 五百人 已死。鑡 時 曉謂 辰韓:
「汝 還 五百人。若不者,樂浪 當遣 萬兵 乘船 來 擊汝。」
함께 항복한 무리 천여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염사 치’가 이때 진한에 따지기를, “너희는 5백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일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니,
6) 辰韓曰:
「五百人 已死,我當出 贖 直耳。」乃 出 辰韓 萬五千人,弁韓布 萬五千匹,
鑡收取 直 還。
진한이 말하기를
“5백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습니다.” 하고는, 진한 사람 일만 5천명과 변한포弁韓布 만 5천필을 내어놓았다. ‘염사 치’는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갔다.
7) 郡 表 鑡 功義,賜 冠幘、田宅,子孫 數 世,至 安帝 延光四年時,
故 受 復除。
낙랑군에서는 ‘염사 치’의 공과 의를 표창하고, 관리의 표시인 두건과 밭과 집을 주었다.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지나 후한 안제 연호 연광 4년(기원후 125년, 백제 기루왕 49년 百濟 己婁王 49)에 이르기까지 부역을 면제받았다. 끝.
부록 1 한서지리지 낙랑군 원문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一〕 〔一〕 應劭曰:「故朝鮮國也。」師古曰:「樂音洛。浪音狼。」有雲鄣。縣二十五:
①朝鮮,〔二〕〔二〕 應劭曰:「武王封箕子於朝鮮。」
②䛁邯,〔三〕〔三〕 孟康曰:「䛁音男。」師古曰:「䛁音乃甘反。邯音酣。」
③浿水,水 西 至 增地 入海。莽曰樂鮮亭。〔四〕〔四〕 師古曰:「浿音普大反。」
④含資,帶水 西 至 帶方入海。
⑤黏蟬,〔五〕〔五〕 服虔曰:「蟬音提。」
⑥遂成,
⑦增地,莽曰增土。
⑧帶方,
⑨駟望,
⑩海冥,莽曰海桓。
⑪列口,
⑫長岑,
⑬屯有,
⑭昭明,南部都尉治。
⑮鏤方,
⑯提奚,
⑰渾彌,〔六〕〔六〕 師古曰:「渾音下昆反。」
⑱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 至 黏蟬 入海,行八百二十里。
⑲東暆,〔七〕〔七〕 應劭曰:「音移。」
⑳不而,東(郡)〔部〕都尉治。
㉑蠶台,〔八〕〔八〕 師古曰:「台音胎。」
㉒華麗,
㉓邪頭昧,〔九〕〔九〕 孟康曰:「昧音妹。」
㉔前莫,
㉕夫租。
〔三〕 䛁*邯(남/염 감) 남감현(䛁邯縣)이 있다.
〔三〕 孟康曰:「䛁音男。」師古曰:「䛁音乃甘反。邯音酣。」
[맹강(孟康)이 말하기를, "남(䛁)의 음(音)은 남(男)이다"라고 했다.
안사고(顔師古曰)는 말하기를,"남(䛁)의 음(音)은 내(乃)와 감(甘)의 반절(反切) 이며, 邯의 음(音)은 감(酣)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