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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년(지금은 2023년) 낙랑군 염사 읍군(읍君= 읍장) ‘소마 시(치)’는 마한 염사국 사람. 0023년 진한 우거수(=우거왕. 우두머리) ‘염사 치(시)’ 낙랑군으로 귀화. 아! 낙랑= 마한(진한)이네! 차이나 대륙에서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지워라. 거대한 음모 (6)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75)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7.06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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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한서 동이열전 ()조에 나오는 낙랑군 염사읍(),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韓()조가 위략이라는 역사서에서 인용한 이야기. “ 진한의 우거수右渠帥 염사 치 廉斯 鑡가 낙랑군으로 귀화했다. ”

 

2. 마한의 염사 지역이 낙랑군의 염사 읍()’이 되었다. ‘마한의 일부= 낙랑의 일부라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후한서 해당 부분 이다.

 

()나라 건무 20( 기원후 44, 백제 다루왕 多婁(, , ) 17) 에 마한의 염사廉斯사람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낙랑樂浪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나라의 광무제는 소마시를 낙랑군 염사읍의 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조공하도록 했다.

 

()나라 영제 말년(189년 경)에 마한과 예가 모두 강성해져 ()나라의 군현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마한으로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나라 영제(靈帝 : 156-189) 유굉(劉宏)은 동한(東漢)의 황제로 168년에 즉위했다.

建武二十年韓人 廉斯人 蘇馬諟等 詣 樂浪貢獻。〔光武 封 蘇馬諟 為 漢 廉斯邑君使 屬 樂浪郡四時朝謁靈帝末濊並盛郡縣不能制百姓苦亂多流亡入韓者

  〔〕 廉斯邑名也諟音是後漢書 卷八十五  東夷列傳 第七十五

 

1) ‘한나라 군현이 힘이 약해 많은 백성들이 마한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에서 한나라와 마한은 아주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 마한 염사 사람 소마시를 낙랑군 염사읍()의 우두머리로 세웠으니 낙랑군은 차이나 한나라가 지배했다.”고 거짓말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낙랑군은 차이나 한나라가 조선을 은폐하기 위해 그냥 이름 붙인 지역에 불과한 것이다.

 

4. 삼국지 위략기록 요약 및분석

1) 기원전 130년 경 조선의 넘버212천여명을 데리고 ()=진한=마한으로 들어갔다. 150~160년 후인 기원후 20년 경에 진한의 우거수 이고 염사지역의 우두머리 가 정치적 이유로 차이나 한나라 낙랑군으로 귀화할려고 염사지역을 나서던 중 한나라 백성으로 진한에 납치되어 노비로 일하던 천오백여명 중 한명인 호래를 만났다.

 

2) ‘염사 치호래염사에서 낙랑군 함자현으로 들어갔다. 들어갈 때는 배로 갔는 지 알 수는 없지만 금중이라는 곳에서 큰 배를 타고 천오백명 포로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 왔다. 살아 남은 한나라 포로 1천명 과 진한에 살던 코리아 ()나라 사람 15천명을 데리고 차이나 한나라에 망명하여 기원후 125년경까지 잘 살았다.

 

3) 기원전 130년 경 ()=진한=마한으로 들어간 조선의 재상과 12천여명이 염사 치가 데리고 차이나 한나라로 귀순한 15천여명의 선조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으면 기원전 130년 경의 기록과 기원후 20년 경의 기록을 연달아 서술할 이유가 없다.

 

4) 삼국지의 염사 치후한서의 염사인 소마 시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두머리의 의미로 쓰이는 와 소마 는 발음이 비슷하다. 소마 역시 염사 지역에 가까운 지역 이름일 가능성이 높으며, ’==우두머리로 본다.

 

5) 한서지리지 낙랑군에 함자 현이 있다. ‘금중이라는 지역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큰 배를 타고 16천여 명을 수송했는데 숫자는 허풍이 많이 들어간 것이라고 해도 금중염사근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은 황하, ‘제수= 제나라 강’, 다른 강 중 하나일 것인데 황하인근일 가능성이 높다.

 

6) 후한서는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 서에서 동으로, 혹은 북에서 남으로, 낙랑군 마한 진한이라고 한다면 염사 치가 낙랑군 금중을 출발해서 마한을 통과하여 진한 염사까지 오는 데 큰 배가 다니는 넓은 강이 있다는 결론이 된다.

 

7) 한서지리지 낙랑군 설명이다.

7-1) 응소가 말하기를 낙랑군은 옛날 조선이다.

7-2) 첫 번째 현이 조선현인데 응소가 말하기를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7-3) 네 번째 현이 함자현인데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흘러 대방()에서 ()로 들어간다.

7-4) 여덟 번째 현이 대방현이다.

7-5) 스무번째 불이不而현에 동부도위가 있다고 하니 불이현이 낙랑군 동부에 있다. 낙랑군 = 마한이라면 마한의 동부에 있는 진한이 불이현이거나 불이 현에 가깝다.

 

8) 함자현에서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흘러 대방()에서 ()로 들어간다. ‘염사 치함자현에서 낙랑군에 연락을 했고 금중에서 큰 배를 탔으니 금중함자현과 가까울 것이다. ‘금중에서 탄 배가 흘러 간 강은 대수帶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8-1) 대방()에서 대수帶水가 들어간 ()가 지금의 황해 라면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생각각할 수가 없다. 도리어 한반도 평양이 낙랑·대방 지역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형편이다.

 

8-2) 대방()에서 대수帶水가 들어간 ()가 지금의 황하 혹은 어느 호수라면, 서쪽으로 흐르는 강은 산동성에 있는 강일 수도 있다. 지금의 산동성 지역에서 서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가는 제법 큰 강은 대문하大汶河이다.

 

8-3) 대문하는 산동성에서 시작하는 牟汶河()문하 (고구려 주몽=鄒牟(추모)왕의 모)嬴汶河()문하 (진시황의 이름 '영정(嬴政)')가 합쳐져 대문하가 되고 대문하는 서쪽으로 흘러 동평호를 거쳐 황하로 들어간다.

 

대문하가 대수帶水 라면 염사 치가 타고간 배는 강을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과거 지도에서는 모문하 아래에 시문하 가 있었고 두 강이 합쳐져 대문하가 되었다. (바이두 大汶河)

 

대문하는 대문구유적이 발굴된 강이다.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1959년 산동성 태안현에서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하였고, 100개소 이상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탄소 방사성 측정 결과 5,700여 년 전의 유물이 발굴되었고 소호少昊라는 문자까지 발견되었다는데 소호는 동이족의 성씨이다.[다시 동이를 말한다(5) 동이족의 발자취를 찾아서. 김선주 연구위원]

 

4. 삼국지 위서 동이전 ()조에서 위략이라는 역사서에서 인용한 진한의 우거수右渠帥 염사 치 廉斯 鑡의 낙랑군 귀화 이야기를 원문과 필자가 번역한 것을 한 구절씩 보자

 

漢時 屬 樂浪郡四時朝謁。〔魏略曰

코리아 한은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사시사철 조공했다. ‘위략에서 말하기를

 

1) 右渠 未破 時朝鮮 相 歷 谿 卿 以諫 右渠 不用東之辰國

時 民隨出居者 二千餘戶亦 與朝鮮貢蕃 不相往來

 

일찍이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의 넘버2 재상이 谿=의 고위 관리을 통하여서우거에게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과 진번 眞藩 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 자세한 내용은 필자 6.29 자 기사 거대한 음모 (4) 참조 ]

 

2) 至 王莽 地皇 時廉斯 鑡 為 辰韓 右渠帥聞樂浪 土地 美人民 饒樂

亡欲來降出 其邑落見 田中 驅雀 男子 一人其語 非韓人問之男子曰

 

왕망의 연호인 지황 연간에 (기원후 20~23), ‘염사 치 廉斯 鑡가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어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염사 치가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코리아 한나라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염사 치가 물으니 남자가 말하기를,

 

3) 我等 漢人名 戶來我等 輩 千五百人 伐材木為韓所 擊得皆斷髮 為 奴

積 三年矣。」 鑡曰:「我當降漢樂浪汝欲去不?」戶來曰:「。」

 

우리들은 한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호래이다. 우리들 천 5백명은 재목을 벌채하다가 코리아 한나라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우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염사 치나는 한나라의 낙랑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하니, ‘호래좋다.”고 하였다.

 

4) 鑡 因 將戶來出詣 含資縣縣 言 郡郡即 以鑡 為 譯

從 芩中 乘 大船 入 辰韓逆取 戶來

염사 치호래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으로 갔다. ‘함자현에서 낙랑군에 연락을 하자, 낙랑군은 염사 치를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서 호래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5) 降伴輩 尚得 千人其 五百人 已死鑡 時 曉謂 辰韓

汝 還 五百人若不者樂浪 當遣 萬兵 乘船 來 擊汝。」

함께 항복한 무리 천여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염사 치가 이때 진한에 따지기를, “너희는 5백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일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니,

 

6) 辰韓曰

五百人 已死我當出 贖 直耳。」乃 出 辰韓 萬五千人弁韓布 萬五千匹

鑡收取 直 還

진한이 말하기를

“5백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습니다.” 하고는, 진한 사람 일만 5천명과 변한포弁韓布 5천필을 내어놓았다. ‘염사 치는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갔다.

 

7) 郡 表 鑡 功義賜 冠幘田宅子孫 數 世至 安帝 延光四年時

故 受 復除

낙랑군에서는 염사 치의 공과 의를 표창하고, 관리의 표시인 두건과 밭과 집을 주었다.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지나 후한 안제 연호 연광 4(기원후 125, 백제 기루왕 49百濟 己婁王 49)에 이르기까지 부역을 면제받았다. .

 

부록 1 한서지리지 낙랑군 원문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 〔〕 應劭曰:「故朝鮮國也。」師古曰:「樂音洛浪音狼。」有雲鄣二十五

 

朝鮮,〔〕〔〕 應劭曰:「武王封箕子於朝鮮。」

䛁邯,〔〕〔〕 孟康曰:「䛁音男。」師古曰:「䛁音乃甘反邯音酣。」

浿水水 西 至 增地 入海莽曰樂鮮。〔〕〔〕 師古曰:「浿音普大反。」

含資帶水 西 至 帶方入海

黏蟬,〔〕〔〕 服虔曰:「蟬音提。」

遂成

增地莽曰增土

帶方

駟望

海冥莽曰海桓

列口

長岑

屯有

昭明南部都尉治

鏤方

提奚

渾彌,〔〕〔〕 師古曰:「渾音下昆反。」

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 至 黏蟬 入海行八百二十里

東暆,〔〕〔〕 應劭曰:「音移。」

不而)〔都尉治

蠶台,〔〕〔〕 師古曰:「台音胎。」

華麗

邪頭昧,〔〕〔〕 孟康曰:「昧音妹。」

前莫

夫租

 

*(/염 감) 남감현(䛁邯縣)이 있다.

 

〕 孟康曰:「䛁音男。」師古曰:「䛁音乃甘反邯音酣。」

 

[맹강(孟康)이 말하기를, "()의 음()은 남()이다"라고 했다.

 

안사고(顔師古曰)는 말하기를,"()의 음()은 내()와 감()의 반절(反切) 이며, 의 음()은 감()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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