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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 삶은 시』 ‘미카엘라’ (1)

윤한로 시인
  • 입력 2023.07.0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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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시로 엮은, 내 시를 삶으로 엮은

5부 미카엘라 (1)

 

우리 처음 허름한 다방에서 맞선을 봤습니다

진눈깨비 내리는 겨울이었습니다

하나는 웬 중학생만 하고

하나는 웬 초등학생만 했습니다

둘은 별 재미도 없고 쭈뼛거리기만 할 뿐

그러나 서로 싫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손도 잡고, 몇 번 더 만나다간 석 달 후

결혼을 합니다

미카엘라는 참 맑은 아가씨였네요

맑고도 소박했습니다

허영과 사치를 멀리하며

집 없는 것, 차 없는 것

심지어 내가 시간 강사 나가는 것 따위

외려 큰 힘으로 여겼습니다

그래 미카엘라처럼 나 또한

하느님의 작은 천사가 되리라 세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미카엘라를 좇아 미카엘이 됐습니다

우리는 마치 야쿠르트 아줌마와 우유 아저씨처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미카엘라

 

밥하고

똥치고

빨래하던 손으로

기도한다

기도하던 손으로

밥하고

빨래하고

전기도 고친다

애오라지

짧고 뭉툭할 뿐인

미카엘라의 손

꼭, 오그라붙은

레슬 링 선수 귀 같다

 

곧 오이처럼 생긴 모세를 낳고

다음으로 오이처럼 생긴 프란치스코를 낳습니다

그러나 우리 식구들

나도 작고

마누라도 작고 애들도 작고

그러니 집도 작고 직장이며

눈물이며 아픔, 기쁨

시까지 작을 수밖에

그래 우린 늘 쫄며 삽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잖습디다

 

굳이

 

가난을 배우잖아도

가난하니까

선을 배우잖아도

선량하니까

겸손을 배우잖아도

겸손하니까, 게다

 

크고 힘센 사람들 여벌로

우리 숫제 건드리지 않고 지나치니까

헌데 이 작은 존재들, 약한 존재들

만일 먼저 건드린다면, 깔아뭉갠다면?

그땐 불같이 일어서리라

떡대 큰 이들아, 타오르리라

사라지리라 박스처럼 찌그러지리라

그,그건 언제나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푸헤헤헤헤

 

큰놈 작은놈 아들내미 둘

파란 액정 속 활짝 웃는다

방구 냄새나는 귤

시금털털한 귤

검정 비닐 봉다리 속에

끽, 삼천 냥 어치 사들고

갈짓자 걸음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찬 바람 찝찔한 눈물

삐리삐리한 아부지

이마트 사거리 온갖 빵빵거림 뚫곤

푸헤헤헤헤,

비키지 않을란다, 탱크처럼

 

신부님 되기 싫어요, 실용음악과 갈래요

아빠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순종하던 녀석이

어려서부터 성인 사제가 되겠다고

십 년도 넘게 미사하며 기도하던

착실한 우리 모세 네가 어째서?

작고 힘없는 이 아빠가

세상에 자랑하고 내세우는 건

아직까지 집 없는 것, 시 쓰는 것

그리고 니눔이 신부님이 된다는

바로 그것밖에 없었는데

세상 그 어디 아들들보다 훌륭하고 장한 길

선택했다 기뻐했는데

 

모세야, 우리 열공해서 인 서울 하자

 

네가 꼬부리고 잠든 새벽 정태한테서 온 쪽지더라

왠지 뭉클하다, 안양노을실바람소리

―우리 아들 아이디 한번 멋지네

모세야, 사랑한다

고3 올라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지나갔구나

애기 같은 얼굴로 중학교 들어간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젠 길쭉하니 마빡에도 여드름이 숭숭,

아름답게 잘 컸구나

세월 참 빠르다, 착하디 착한 모세야

어젯밤 네게 손댄 것 용서해다오

정말 가슴 아프다

신부님 되기 싫어요, 실용음악과 갈래요

아빠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 인생 내가 사는 거예요

도대체 아빠는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요?

세상에나! 그렇구나, 모세야

네 말이 옳더구나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는 너에 대해서 실은 아는 게 하나도 없었구나

뭘 입고 뭘 먹고 뭘 공부하며

친구들이랑은 무슨 얘기를 나누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가수를 좋아하고 어떤 영화를 보는지

그저 깜깜할 뿐이더구나

열아홉 살이 다 되도록 같이 앉아

어느것 하나 다정하게 물어본 적 없었구나

허구한 날 공부 안 한다고

기도 안 한다고 윽박지르기나 하고

핸드폰이나 끊고, 그런 게 다였구나

아빠가 가르치는 학생애들한테서는

그렇게도 존경하는 선생님, 걱정하고 아껴 주는 선생님

잘 웃으시는 친절한 선생님 소리 들으면서

네게는 정작

무관심한 아버지, 무뚝뚝한 아버지였구나

꽉 막히고 고지식한

그래, 음악! 해라

염색! 해라

까짓누무거, 신부님 안 되면 어떠냐

열공해서 인 서울 못하면 어떠냐

안양노을실바람소리 모세야

 

우리도 힘내자, 언제 한번

도둑고양이 지린내 나는 소공원 벤치에 앉아

아빠랑 니눔이랑 단둘이 밤새도록 얘기 좀 해보자

야자고 뭐고 다 때려치고, 마치 불량 청소년들처럼

간만에 밤하늘 별도 한번 우러러 보자꾸나

사랑한당, 다시는 손대지 않으마

 

아버지 학교

 

애들 너무 싫어해요

요즘은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안아 주고 키스하고

발 닦아 주고 데이트하고

요리도 하고 세탁기도 돌리고

아침마다 허그를, 감동을 창출하세요

부드러운 말에, 표정에

우리 몸 던져야 합니다

웃는 법 우는 법 연습에

날마다 고마워요 열 번씩 하기

숙제 꼭 하서요, 노력하세요

여보 미안해요 아들아 딸아 사랑한다

틈만 나면 문자는 꼭 주시겠고

뭉툭한 손가락 떨쳐

떠듬떠듬 보내세요 배우세요

그저 무트룸, 시큰둥 눈 깜빡거리며

말할 줄도 몰라 말만 하면 꿀려라

용접하고 치킨 튀기고

물건 떼 오고 배달하고

어디 물이 새고 보일러가 고장났군

이런 데만 빠삭할 뿐

코 쉰 내만 풍길 뿐, 그대들

그러시면 안 되네요

마인드를 바꿔야만 살아남습니다

애들이 입을 열고 아내가 마음을 열도록

먼저 다가가세요, 다가올 때 기다리지 말고

그네들, 문 꽉 닫아걸면

영원히 외롭습니다, 그대들

땀 뻘뻘 흘리며 일만 알 뿐

기계처럼 돈이나 벌 뿐

입때껏 눈물 콧물도 모르고

막살았구나, 헛살았구나, 그대 아버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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