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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구의 `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 79- 로마를 떠나며

문정기
  • 입력 2023.07.02 14:59
  • 수정 2023.07.04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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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떠나 귀국길에 오르며ᆢ
가장 늦은 통일을 가장 아름다운 명품 통일로!)

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 79- 로마를 떠나며

고통도 지그시 응시하다 보면 거기서 환희의 감정이 생긴다. 햇볕이 은총처럼 화사하게 내리쬐는 바티칸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연단에는 교황님이 소년처럼 맑은 미소를 띠고 앉아계셨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이 자리에 와서 나와 우리 겨레의 간절한 소망을 교황님께 전하기까지, 이번 크리스마스 미사는 꼭 판문점에서 집전해주십사 하는 그 한 마디 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난관과 위험을 감수했던가.

교황님 알현을 위해서는 긴 바지에 긴 팔 옷을 입고 가야해서 핑계 김에 이태리 양복 한 벌 구입하려 했지만, 교황청으로부터 나는 특별히 뛰어온 그대로의 복장을 입고와도 된다는 연락이 와서 명품 양복 구입의 소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명품 양복을 입고, ‘로마의 휴일’의 그레고리 펙처럼 머릿기름을 바르고 멋지게 교황님을 알현하는 꿈은 산산조각 났다. 그러나 런닝복을 입고 ‘명품 통일’을 교황님과 함께 꿈꾸는 것만으로도 멋진 일이다. 

30만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는 성 베드로 광장 위의 연단 바로 옆에 앉아 이태리의 명품 하늘처럼 해맑은 교황님의 미소를 지근거리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 몰려온다.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이자 모든 민족들의 열망인 평화가 죽음의 씨앗을 뿌리는 증오와 무기의 굉음을 이기고 모든 민족이 사랑에 바탕한 새로운 문명을 알게 하소서!”란 그의 기도를 묵상하며 그간의 고통과 어려움을 생각했다. 나는 명품을 아무것도 소장한 것이 없지만 내 발자국 한 걸음 한 걸음이, 이태리 장인의 한 땀 한 땀 정성들인 명품을 하나도 소지하지 않아도 자랑스러운 뿌듯함으로 남는다.

 

성 베드로 성당은 로마 가톨릭의 총본산으로 가톨릭 신자에게 가장 성스러운 곳 중 한 곳이다. 성 베드로의 묘지 위에 세워진 이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종교 건축물이기도 하다. 바티칸이 유명한 것은 종교적 이유도 있지만, 이 성당 안에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뛰어난 예술품과 건축물들이 있기 때문이가도 하다. 이 대성당은 세계적인 예술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를 비롯해 베르니니, 마데르나, 브라만테 등의 천재적 예술성이 결합된 산물이다.

박물관처럼 수많은 예술작품이 있지만 가장 큰 인기를 끄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이다. 이 작품이 그려진 천장 아래 서면 쏟아지는 압도감에 할 말을 잃을 정도이다. 성 베드로 성당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걸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피에타 상이다. 예수의 늘어진 시신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애절한 슬픔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대성당의 한복판에는 역대 로마 황제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는 원형이 있다. 나도 그 자리에 서보았지만 아무 감흥이 없다.

동공이 크게 열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사진촬영을 하며 자리에 앉아 있으니 교황 전용차를 타고 광장 곳곳에 모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입장하고 계셨다. 광장 한 가운데에는 오벨리스크가 우뚝 솟아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 숭배의 상징으로 세워진 기념비이다. 그것을 서기 40년 칼라굴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약탈해온 것이다. 교황 전용차는 연단에서 멈추어서 교황님에 내리시는데 경호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걸으셨지만 염려했던 것보다는 비교적 건강이 좋아 보였다.

사실 지난 2017년 아시럽횡단 후 북한 입국이 불허된 이후 좌절에 빠졌었다. 그때는 남북 두 정상이 통일의 의지를 보이며 통 큰 결단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했었다. 남북 두 정상이 결심을 해도 안 풀리는 문제를 나 하나 용 쓴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나? 남북문제는 이미 얽히고설켜서 바이든이나, 푸틴, 시진핑이 발 벗고 나서도 풀기 어려운 난제가 되어버렸다. 좌절에 빠져있는 동안 몹쓸 병이 또 나를 망가뜨렸다. 뇌경색에 무너져 반신불구가 되었다.

그러다 시상처럼 떠오른 생각이 바티칸까지 뛰어가자는 것이었다. 교황님께서 판문점에 오셔서 크리스마스 미사를 집전하는 순간 한반도 질곡의 상징인 판문점은 ‘분쟁과 전쟁과 미움’을 녹여내는 가장 뜨거운 장소가 되어버릴 것이다. 나는 원불교 신자이지만 종교의 담을 뛰어 넘는 획기적인 것이 필요했다. 필요하다면 어떤 장벽이라도 뛰어 넘어야 했다. 나는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에서부터 절룩절룩 걸음을 시작했다. 물론 남들은 다 불가능하다고 했다. 건강한 몸으로도 상상도 하기 힘든 길인데 그 몸으로는 안 된다고 했다. 거기다 교황님도 연로하시고 건강이 안 좋으셔서 양위를 하신다고 하는데 가도 못 만난다고 했다. 가능성이 1%도 안 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 없어서 시작했다. 거기다 온전하지도 않은 몸 통일에 바쳐진다면 그보다 명예로울 수도 없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탄 휠체어가 내 앞에 섰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가? 가슴이 마구 뛰었다. 내미는 손을 잡으니 따스함이 전해온다. 나는 영문으로 준비해간 서신을 전하면서 “꼭 건강하셔서 크리스마스 미사를 한반도 질곡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집전해주십시요!”라는 말을 하니 교황님이 고개를 끄떡이셨다. 그리고 민성효 교무님이 준비해주시 원불교의 표상인 일원상과 강화도 교동도의 실향민 이범옥 시인의 시‘격강천리라더니’를 전달하였다.

한반도 평화에 큰 관심을 보여주신 배경에는 유흥식 추기경님의 큰 역할이 컸다. 실천하는 성직자로서 늘 낮은 데로 임하시는 소탈한 모습과 저개발국과 북한 지원, 평화를 위한 한결같은 열정이 나의 발걸음에 힘을 주었다. 이번 여정에서 그 분을 못 만나고 가는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며칠 전 그 분의 남미 출장으로 일정이 맞지 않아 미안하다는 이메일을 받은 터였다. 대전교구에 계실 때 민성효 교무님과의 친분이 가교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었다. 실낱같은 희망이 이 성 베드로 성당에서 이태리 명품 하늘의 햇살처럼 환하게 반짝였다.

어쩌면 나는 우리의 가장 늦은 통일을 가장 아름다운 명품 통일을 일구기 위하여 수십 번도 더 불구덩이 같은 고통의 길을 걸어가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부조리와 불공정의 대부분이 분단에서 오기 때문이다. 분단의 아픈 고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세대에 끊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정리 j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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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기자 문정기

공학박사/과학문화평론가

전 국가과학기술위원

 

*로마에서의 마지막 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강명구씨와의 협의에 따라 시리즈로 연재되는 기획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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