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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 음악통신 605] 리뷰: 구민희 피아노 독주회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23.05.24 08:06
  • 수정 2023.05.24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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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3일 화요일 오후 7시30분 세종체임버홀

서울예고-서울대학교를 졸업, 미국 콜번 콘서바토리와 보스턴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단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피아니스트 구민희의 2023년 5월 23일 독주회 첫 곡은 베토벤 소나타 30번이었다. 1악장 1주제 오른손은 폭이 넓은 프레이즈 처리로 낭만의 물꼬를 튼 베토벤이 아닌 도리어 바흐, 바로크에 다가간 꾸미지 않은 담백함이 있었다. 마치 켐프나 박하우스와 같은 올드 스쿨적인 접근이자 해석이었다. 정확하게 단락과 악구를 구별하여 단편적인 선율이 아닌 하나의 일정한 부분으로 조망해 나갔다. 1악장을 독립된 악곡이라기보다는 전체 소나타의 전주같이 작용시키더니 2악장의 프레스티시모를 3개의 악장이 모인 1개의 소나타의 1주제와 같이 출연시켰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3악장 천상의 변주곡 주제 선율은 3악장이 아닌 30번이라는 소나타 한 통의 후반부가 되었는데 구별된 악장이 아닌 마치 리스트 소나타같이 한 개 안에서 대비시키는 구성을 만들었다. 구민희는 변주곡을 담담하고 무덤덤하게 풀어갔다. 특히 두 번째 변주곡에서 최대한 페달을 자제하면서 양손의 교차를 바로크적인 명징함으로 들어내었다. 베토벤이 아닌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같았으며 조성진의 최신 음반인 헨델 프로젝트와 유사했다. 마지막 변주곡은 처음 4분음표의 베이스 화음을 의도적인 묵직함으로 출발하더니 최종 트릴로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는데 이런 구성적인 디자인은 그녀의 큰 장점이다. 세종체임버홀에서의 거대한 콘서트용 슈타인웨이 그랜드가 아닌, 어느 독일의 이름 없는 시골 작은 마을, 오랜 손때와 손 내음 그리고 대가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낡은 클라비어에 더 어울릴듯한 베토벤이었다.

자기만의 색깔과 개성을 배제하고 악보의 음들을 충실히 구현하는데 집중한 구도자 구민희가 드뷔시에서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어쩌면 베토벤에서의 의도된 감정 표출의 억제가 인상파 드뷔시에서 대비의 극대화를 연출하여 상술한 하나의 작은 요소에 함몰하는 게 아닌 독주회 전체를 구성하는 큰 그림을 그려간 피아니스트 구민희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해준 장치였다. 드뷔시 <전주곡집 1권>에서 단 3곡만 추려 선보인 인상주의의 꽃은 '서풍이 본 것'에서 만개했다. 서풍이 아니라 필자가 보고 들은 바로는 구민희는 분명 이 곡과 오랜 인연이 있을 거란 확실히 들 정도로 능수능란했고 자연스러웠으며 구도가 명확하고 스토리텔링이 정확했다. 뒤를 이은 '아마빛 머리의 소녀'는 보너스였다. 아쉬웠다. 달랑 전주곡 3개라니.....'서풍이 본 것' 같은 호연을 접했으니 구민희의 연주회로 드뷔시 전주곡집 1권 전체를 들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러고 보니 오늘 음악회 전체 순 연주 러닝타임이 인터미션을 빼면 1시간도 안된다. 이건 구민희 연배 또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의 정기적인 독주회에 가면 으레 접하는 분량이다. ( 소나타 한두개 반복 없이 치고 소품 몇 개 추가하는 구성...) 연주가 형편없다면 1시간이 아니라 1분도 아까울 테지만 연주자와의 친분과 인간관계를 떠나 순수 감상을 위해 발걸음을 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식당에서 먹을만하니 밥상을 치워 버리는 격이다. 1부 끝나니 고작 8시 2분이었고 이어 1부의 반 정도인 15분의 휴식을 갖고(이게 곤욕이다. 뭘 했다고 15분이나 쉬는가! 물론 이때 인사하고 수다떨고 가족 & 동문 & 제자모임을 갖는거겠지만) 쇼팽 소나타 3번으로 끝! 연주자들의 고충과 애로사항, 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요 워낙 항변과 합리화 푸념과 토로에 이골이 날 지경이지만 일가친척이나 동창들, 얼굴도장 찍으러 간 사람이 아닌 순수 그 연주자의 연주를 들으러 간 음악 관객의 입장이라면.....

'서풍이 본 것'이 구민희의 오랜 친구였다면 쇼팽 소나타 3번은 새 친구였을 터... 학생도 아니고 기성 음악인이 독주회를 위해 새로운 레퍼토리를 연마하고 학습한다는 건 위의 여러 개인적인 환경에서의 제약과 압박에서 결코 쉽지 않은 고행이라는 거 잘 한다. 구민희는 해냈다. 베토벤에서처럼 음 하나하나 힘의 안배가 분명하고 손가락 컨트롤을 통해 프레이징을 이루는 3악장의 오른손 선율은 역시 구민희의 장점을 또렷이 증명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4악장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이 쇼팽에 몰입했다. '서풍이 본 것'이 우연이 아니다. 조만간 쇼팽 소나타 3번도 구민희에게는 '서풍이 본 것'처럼 될 거라 확신한다!

여담으로 쇼팽 연주 내내 큰 콧구멍으로 숨을 힘차게 들이마신 중년 남성의 콧구멍을 손가락을 확 찔러 막아버지는 못한게 한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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