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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시』 ‘염소 선생’ (2)

윤한로 시인
  • 입력 2023.05.10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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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시로 엮은, 내 시를 삶으로 엮은

4부 염소 선생(2)

 

놔둡시다요, 걔네들 개판 오 분 전이라도

잘 쓰잖아요 살아 있잖아요

「구운몽」 속에 나오는

양소유와 팔 선녀 그리고 구름,

그건 이들이 속세에서 누린

한바탕 꿈, 갖은 부귀영화를 상징하건만

그러든 말든 어느 날 즤네들 열

‘양팔구’를 만들곤

그중 어리뻥뻥한 척

한바탕 꿈인 구름이 가장 셌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구름은

애초 공부랑은 담을 쌓았으며

밥 먹듯 가출하고 담배 피고

허구한 날 출석부로 얻어맞되

근신 정학도 몇 개씩 먹되

감성은 애렸는지라 놀아도

시 하나만큼 기막히게 잘 썼더랬지

쉬는 시간이면 양소유 등에 업고

전 교실과 복도를 누비며

두둥실,

삼 년 동안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그 구름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 그런데

황혼에 물든 화장실 대걸레처럼 외로워라

아무튼 우리 걔네들 놔둡시다

 

시창작개론

 

기교가 꽝인 시

너희들 여러 번 말했잖냐

못 썼다고 생각한 것들

틀려먹었다고 생각한 것들

이건 글렀다 싶은 것들, 이건 도통

아니라고 여긴 것들

그런 것들 쓰라고

그런 것들이 좋다고

얼마나 괴롭더냐

얼마나 진실하냐

때 빼고 광 내지 말지니, 그대들

한껏 둔탁한 호박 들어

밤하늘 별 우러를지니

 

진종일

까옥 까옥 까옥

이거나!

먹으라네

이제

됐나

햐, 똥가이 같은 눔

 

은하 아파트

 

백만 도시를 뒤틀던 애물단지

아침마다 8-1 버스를 타면

고가도로 옆 은하아파트 거기서 꼭 막힌다, 온통

수십 년 수령의 자잘한 실금 뿌리들 엉킨 벽

이마 위 겨울 하늘로 전깃줄 뭉텅이가 흐르고

저층에서 우러나던 그 깊은 힘

뒷심 한번 좋더니

버티다 버티다 마침내 헐리누나

철공소 쇠를 깎고 용접을 하고 짜장면을 배달하고

화장품을 팔고 치킨을 굽고 개소주를 짜고

운전을 하고 번쩍번쩍 빌딩을 닦고

더러는 하염없이 놀고

* 끽, 두메산골 보리 열 가마 거두는 농사꾼네

들일에서 돌아오드키 녹초가 된 몸

받들던 열세 평 둥우리

이제 다들 날개를 달고 어딘가로 훨훨 날아갔구나

부모님 가시고 깨진 요강단지만 나뒹구는 초가삼간처럼

휑하다, 뻥뻥 뚫린 검은 창

줄줄 때꾸중 눈물 흘린다

가난한 것도 죄가 되나요!

공부 못하는 것도 죄가 되나요!

날마다 지각하고 벌 받던 은하의 시는

언제나 끽, 두 줄

벌 받아도 벌 받아도 지각하며 개기던

가무잡잡한 은하

* 연암 박지원 글에서

 

은하의 시를 볼 때마다

인천 말번지 살 때 내 고삐리 시절이

자꾸 생각나더라

은하의 두 줄 시는 사실

내 시 몇십 줄보담 백 배 더 빛나네

 

오, 영세

 

온순하고

보일 듯 말 듯 다리를 조금 절었지

지금은 한쪽에서

늘 그릇 닦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시 쓰는 마음으로

그릇을 닦는다니

그러나 시는 썩 좋질 않기, 오히려

그 마음 얼마나 아름다운가

끌리는가 떵떵거리는

잘난 이들 잘 쓴 글보다도

―웃기는 짜장면들

영세가 빨리 좋은 여자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으면

아들 하나 낳아

꿈에도 그린다는 아버지가 되었으면

이따금 영세를 통해

시를 다시 보고

곰곰, 내 인생 또한 생각해 볼 수 있어

참 좋다

 

영세는 세 살 때 교통사고로 뇌수술을 받아

장애를 안고 살고 있다 그런데

잘 쓰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시를 쓴다

자신한텐 시가 마치

신체의 일부 같댄다

졸업하고 뾰족한 직업도 구할 수 없고

식당에서 그릇 닦는 일을 한댄다

가끔씩 관악백일장 같은 데 나가

장려상을 받고 한 시를 보내오곤 하는데

얼마 전 아주 작은 문예지로 등단했다, 소감문에

결혼도 하고 싶고

한 아이의 아빠도 되고 싶고

시인으로 살아가고도 싶고 그러려면

생업인 그릇 닦는 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고 했다

그릇 닦는 일이 시보다 빛나는 순간이다

 

염소 선생

 

잘난 선생도 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또 못난 선생 되기도 싫고

좀 쓴답시고 가르친답시고

빌어먹을, 약장수가 다 됐구나

가을바람 소슬 부는데

짜른 혀

목이 멘다

우리 염소 선생들

뉘엿뉘엿 서산에 해는 떨어지고

에헴, 모이믄 우리 몇몇 얼려

코끝 쉰내 풍기며 올라간다

수리산 보리밥집

보리밥 먹으러

염소 선생들 재미 하나 없다

해서 깐이 보지 마라

이래뵈도 소용돌이치는 두 개의 뿔

무섭당

추라면 우리

보리밥 밥상 위에 뛰어올라가

춤도 춘다

 

어쩌다 선상 노릇을 한 지

어느덧 삼십 년이 훌쩍 넘었소

머리가 허옇소

한 가지만 쓰고

한 가지만 가르치고

한 가지만 듣고

아무튼 재미가 적소

우리 가르침만 주는 사람들, 주구장창

시퍼런 풀만 야금야금 뜯어먹고 사는

염소 같소, 거기다 뿔 두 개가 달렸지만

그것들마저도 전혀 쓰잘 데 없는 존재처럼

쩨쩨해 보이겠지만, 어쩌랴

옛날 무당굿놀음 사설에

가르치다 가르치다 밑천이 떨어지면

사공질에 튀전질에, 화닥대기

마, 술 먹고 지랄 떠는 것까지 다 가르친다

했으니, 그렇다 염소는 때로는 풀만 먹는 게 아니라

배가 고프면 회포대 종이도

비닐도 막 뜯어먹는다오

그 뿔들 소용돌이친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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