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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삼국사기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차이나 후한서 등은 동명은 부여의 시조. 고칠 수 없는 광개토태왕 비문은 고구려 시조는 추모왕 鄒牟王 이라 한다. 鄒와 牟는 지금의 산동반도 등에 있었던 漢(한)나라 (군)현의 이름. 고구려의 고향은 산동성인가? (1)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51)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4.10 21:58
  • 수정 2023.04.10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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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1)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주몽을 광개토태왕비문은 추모왕 鄒牟王 이라 하고, 는 지금의 산동반도 지역 등에 있었던 한나라 ()현과 차이나 각지에 남아 있다. 고구려의 고향은 지금의 산동성인가?

 

2) 광개토태왕비의 비문은 惟 昔 始祖 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으로 시작한다.”

고구려(이 글에서는 고리 라고 한다)의 시조 추모왕을 漢字(한자)로 표기하면 鄒牟王이다. (부록1)

 

惟昔 (유석)에서 ()는 어조사 혹은 생각컨대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는 문장의 취지에 맞추어 , , , 으로 주어에 붙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고, ‘~로 소유격으로 볼 수도 있다. 코리아 언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추모왕 [] 기틀을 만들었다.” 정도 번역이 가능하다.

 

, 옛날 시조 추모왕鄒牟王께서 처음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셨도다. (추모왕은) 북부여 출신이시니, 천제(天帝)의 아들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2. 동명성왕은 부여의 시조인가, 고구려의 시조인가

 

1) 국사편찬위원회 번역 삼국사기 권 제13 고구려본기 제1 본문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 001은 성이 고씨(高氏)002이고 이름은 주몽(朱蒙) 003이다.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 이에 앞서 부여(扶餘)004왕 해부루(解夫婁) 005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다.(후략)

 

2) 001 (전략)

주목되는 사실은 중국 측 문헌에서 주몽은 고구려의 시조로 나오고 있음에 비해, 동명(東明)은 부여 시조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찬자들이 고구려의 부여의 시조를 각기 주몽과 동명으로 구분하여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후한 시기 왕충(王充)(27~?)이 쓴 논형(論衡)2 길험편(吉驗篇)과 서진(西晉) 시기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30 위서30 동이 부여전(夫餘傳)에 인용된 위략(魏略)(3세기 중엽 편찬)에 이미 부여 시조로 동명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관련 전승이 이른 시기부터 중국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3) 002

고씨(高氏) : 고구려 왕실의 성씨. 본서에서는 국호를 고구려라 한 것에서 주몽이 고씨를 칭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구려의 역대 왕들은 모두 고씨였던 것처럼 나온다.

 

하지만 그와 다른 기록도 존재한다.

 

삼국유사1 왕력편(王歷篇)에 의하면 제1대 동명왕은 고씨였으나, 2대 유리왕·3대 대무신왕·4대 민중왕을 해씨라 명기하고 있으며, 5대 모본왕도 민중왕과 형제 사이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1 기이 제1 고구려조에서도 찬자는 주몽을 본디 해씨로 보았다

 

[“本姓解也, 今自言 是 天帝子, 承 日光 而生, 故 自以高 爲氏”].

 

4) 003

주몽(朱蒙) : 고구려의 시조이자 건국자로 전한다. 위서를 비롯한 중국 측 문헌에서도 고구려 시조를 주몽으로 표기하였다. 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는 주몽 외에

 

추모’(광개토왕릉비, 모두루묘지, 본서 백제본기,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24 우경제번하(右京諸蕃下) 고려(高麗)),

 

추몽(鄒蒙)’(삼국유사1 왕력편),

 

중모(中牟)’(본서 권6 신라본기6 문무왕 107월조에 실린 책문(冊文)) 혹은

 

중모(仲牟)’(일본서기27 천지(天智) 710월조, 그리고 본문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중해(衆解)’ 등이 있는데, 같은 음을 다르게 표기한[同音異表記] 결과로 여겨진다. 본문에 보이듯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5) 004 (전략) 부여의 경우, 1세기에 편찬된 논형2 길험편이나 삼국지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시조 동명이 북방의 탁리국(橐離國) 내지 고리국(高離國)으로부터 남하하여 건국하였다고 한다.

 

6) 005 (전략) 삼국유사1 기이 제1 북부여조에 인용된 고기(古記)에서는 해부루가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며 성()을 해씨라 하였다고 나온다.

 

삼국유사1 기이 제1 고구려조에 인용된 단군기(檀君記)에는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관계를 가져 해부루를 낳았다고도 한다.

 

그래서 삼국유사찬자는 해부루와 주몽을 이복형제 사이로 여겼다.

 

해부루란 이름은 []’부루=[]’이 결합한 말로써 하늘의 아들[天帝子]를 의미한다는 설(梁柱東, 1946, 朝鮮古歌硏究, 博文書館, 697~698)도 있다.

 

7) 삼국유사는 1281년에 편찬되었다. 스님 일연이 코리아 역사책과 차이나 역사책을 보고 간추린 것이라 전한다. 일제는 삼국유사 위조설을 제기하여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만드는데 주력했다.

 

8) 삼국사기는 1145년에 편찬되었다. 삼국사기고기, 신라고기, 해동고기, 삼한고기, 본국고기등 코리아의 고유 기록을 1차 사료로 삼았으며, 차이나의 사료와 코리아의 사료가 충돌하는 경우는 코리아의 사료를 우선적으로 사용했다. (위키백과 삼국사기)

 

일제는 이병도 등 부일역사모리배를 이용하여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내세우며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만들고, 한사군을 기정사실화 하고, 임나일본부를 지속적으로 조선 민중들에게 주입시켰다.

 

9) 모든 역사책이 편찬된 때 그대로 전해졌다는 보장은 없다. 어쨌든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역사책을 좀더 신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차이나가 고구려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서였건,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겨 진실을 기록했던,

 

고구려의 시조는 정확히 기술하지  않고, 부여의 시조가 동명東明 이라고 기록했다.  광개토태왕비는 고구려의 시조를 추모鄒牟왕이라고 했다. 

 

고구려 시조를 추모왕이라 가르칠 것인가, 동명성왕이라 가르칠 것인가.

 

차이나는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했다!!!

 

1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 조. 東夷 相傳 以爲 夫餘別種

 

[東夷들이 서로 하여 오기를 [高句驪] 夫餘別種 이라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法則[부여와] 많이 같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적에 한 쪽 다리는 펴서 끌며, 걸을 때는 모두 달음박질을 치듯 빨리 간다.]

 

11) 양서 梁書동이열전 고구려 조 高句驪

 

東明은 이들을 밟고 강을 건너 夫餘에 이르러 [그 나라의] 왕이 되었는데,

東明 乘之 得渡, 至 夫餘 而 王焉.

 

그 후손의 한 支派句驪의 종족이 되었다. (구리는 고 씨의 구리이다)

其後支別 爲 句驪 種. (부여에서 구리 족이 나오고 구리 중의 하나가 고구리다)

 

그 나라는 漢代玄菟郡 [지역]에 있다.

其國, 漢之玄菟郡也

 

遼東의 동쪽에 있으며, 요동으로부터 천리 쯤 떨어져 있다. ·시대에는 남쪽으로는 朝鮮·穢貊, 동쪽으로는 沃沮, 북쪽으로는 夫餘와 인접해 있었다. (한나라와 위나라 시대. 기원후 200년 경까지. 고구리 남쪽에 조선이 있었다. 고구리는 부여이다)

在遼東之東, 去遼東千里. ·, 南與 朝鮮·穢貃, 東與沃沮, 北 與夫餘 接.

 

12) 차이나 역사책과 광개토태왕비를 합쳐서 해석하면, [ 부여에서 구려가 갈려 나오고, 고구려는 구려 종족 중의 하나인데, 기원후 220년경까지 조선의 북쪽에 있었다.] 고구려() 외에 다른 구려()가 있는 듯한 표현이고, 후한이 위나라에 천자자리를 내어 준 것이 기원후 220년임으로 그 때까지 ()조선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부여의 시조는 동명이다, 고구려()의 시조는 추모이다. 東明(동명) 이나 鄒牟(추모) 나 개인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특정 지역 혹은 부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고구리는 왕의 성씨가 ()라고 하나, 몇몇 왕의 성은 () 라는 기록도 있다. 발해 정확하게는 大辰國(대진국) 은 성이 인 왕족이 지배한 별자리(북극성, 북두칠성) 나라이다. ‘의 진국은 마한진한변한의 진국을 이어받은 것일 수도 있다. ()() 둘 다 뜻이 비슷하다.

 

13)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았고,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후한서》 〈동이전

 

14)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변한·진한 24) 가운데 12국은 진왕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임금을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임금이 되지는 못하였다.

삼국지30 위서오환선비동이전 변진

 

3. 추모 鄒牟 와 반추 反芻

 

연로한 분들 중 한자어를 많이 쓰던 분들은 반추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했다.

[지나온 세월을 반추해보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장흥신문 2021.8.20. http://www.j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3687 )]

 

반추反芻 는 소나 염소 따위가 한번 삼킨 먹이를 다시 입속으로 되올려 씹어서 삼키는 일 즉 되새김질을 말하는데 통상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음미(吟味)하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글자가 매우 오래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면 [풀을 베어 묶은 단을 손에 들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 라는 설명이다. 상형문자 즉 모양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웬지 소떼나 양떼를 몰고 다니는 유목민족이 연상되지 않는가?

 

최초 만들어진 한 글자 漢字(한자) 에 우부방이 붙으면 그 지역, 삼수변이 붙으면 그 지역에 흐르는 강을 말한다. 가 있는 지역이다. 유목민족의 용어라면 유목민족이 많이 옮겨 다니고 여러 곳에 정착함으로 두 글자 모두 여러 곳에 나타날 수 밖에 없다.

 

4. ‘추모鄒牟 의 추를 살펴보자. (계속)

김병기 교수 제공 사진 
김병기 교수 제공 사진  중앙일보 2020.10.31 에서 인용 후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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