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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싸운 한나라 무제 때 요서(요동의 서쪽)은 지금의 황하 이북, 태행산맥 서쪽, 산서성 태원시 분지지역(상곡, 어양, 대, 안문). 흉노와 한나라 무제와의 끝없는 전쟁터.(1)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49)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3.26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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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1) 서군이 있으면 요동군이 있다. 반고의 한서가 쓰인 시점에서 요서라는 지방에 요서군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당연히 요동이라는 지방에 요동군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서와 요동을 구분하는 것은 () ‘라는 지역이다. ‘라는 지역에 이 있고 가 있다.

 

2) 나라 무제때 요서가 태행산맥 서쪽이면 요동은 태행산맥 동쪽이다. 요동의 병사와 지금의 산동성에 있는 의 병사가 만나기로 약속한 곳은 태행산맥 동쪽이자 산동성의 서쪽, 지금은 말라버린 계택· 대륙택·영진박이 합쳐 흐르던 발해를 건너서 도착하는, 고조선의 수도 왕험이다.

 

3) 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할 때 육군은 요동의 병사를 이끌고 고조선의 수도 왕험을 공격했고, 수군은 제에서 제나라 병사를 이끌고 발해를 건너 왕험을 공격했다.

其秋, 遣樓船將軍楊僕 從齊 浮渤海, 兵五萬人, 左將軍荀彘 出 遼東, 討右渠. 右渠發兵距險. 左將軍 卒 正多 遼東兵 先 縱, 敗散, 多還走, 坐法斬. 樓船將軍 將 齊兵 七千人 先 至王險.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

 

2. 나라 무제기 기록을 보자.

2-1) 후대에 편집한 병주는 태원, 정양, 안중, 운문, 상당군이다.

 

2-2) 후대에 편집한 유주는 대, 상곡, 어양, 요서, 요동, 우북평, 현도, 낙랑, 광양, , 발해군이다.

 

2-3) 병주와 유주 중에서 한나라 무제기 기록에서 흉노와의 전투로 나오는 지역으로 인근한 곳은 태원, 정양, 안중, 운문군과 대, 상곡, 어양, 요서군이다. 우북평, 현도, 낙랑, 상당, 광양, , 발해군은 한무제의 흉노와의 쟁패에서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설치되었거나 설치되었더라도 흉노와의 전장에서 매우 떨어져 있다.

 

2-4) 한무제 원봉 5년 기원전 106년에 처음으로 자사를 두는 13주를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初置刺史部十三州한서 지리지는 13주를 정확히 표현하지 않는다. 소속된 군이 필요한 경우에 소속된 상부기관 주를 표시할 따름이다. 실제 흉노와의 전쟁으로 사실상 지배를 못한 태원, 정양, 안중, 운문군과 대, 상곡, 어양, 요서군이 속한 유주와 병주는 자사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한무제 기록에는 위 군의 군사령관 도위가 흉노에 살해 당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3. 원삭원년 기원전 128년에 뜬금 없는 기사가 있다.

 

1) 동이의 예군 남녀등 28만명이 항복해서 창해군을 두었다는 기사이다.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為蒼海郡전후좌우 설명이 없다. 그리고 2년 후 기원전 126년에 창해군을 없앴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동이족의 창해군蒼海郡이 과연 있었을까? 있었다면 과연 어디일까?

 

2) 창해군의 예군 남녀등 28만인의 지역으로 필자는 () 지역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한나라 수군이 제에서 제나라 군사 7천명으로 발해를 떠 와서 왕험을 공격했다. 예를 포함하는 ()조선연방의 예군 南閭 부족이 ()조선을 배반하고 한나라와 연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3) 사기 조선열전에 나오는 ()조선 반역자 니계상 삼(尼谿相 參)니계尼谿->의 반절음 표현이며 니계상의 상나라의 丞相(승상)’인 것이다. 南閭 는 남쪽의 부족 출신임을 말하는 지 알 수 없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할 때 먼저 南閭 든 누구든 예() 족과 사전 모의를 했으며, 南閭 든 누구든 예() 족의 승상이 니계상 삼(尼谿相 參)인 것이다!

 

4) 아래 해설을 보면 참으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예군 남려가 이끌고 투항한 28만 인은 강력하게 통합된 지속성을 지닌 정치체라기보다는 한과 위만조선 사이에서 일시적으로 이해를 같이한 주민집단들의 완만한 연합체로 여겨진다. 또한 이들 지역에 설치한 창해군의 경우 설치 후 인력과 경비 부담의 문제로 인해 3년 뒤에 폐지되었다가 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107년에 이 지역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南閭 )

 

4. 아래 한무제본기를 볼 때 주의할 점이다. 당시 한나라는 음력으로 매년 10월에 겨울이 시작하여 한 해가 동(10,11,12,13=1)-(13=1,2,3)-(4,5,6)-(7,8,9) 로 끝나고 새해가 겨울로 시작하는 달력을 썼다.

 

 

 

 

번호

다빈치맵 한서 한무제본기 문장번호임. 달력은 겨울--여름-가을-다음해 겨울로 진행됨.

49

六年(129)初算商車원광 6년 겨울, 처음으로 장사하는 수레에 산()을 내게 했다.

50

穿漕渠通渭

51

匈奴 入 上谷殺略吏民遣車騎將軍 衛青 出 上谷騎將軍 公孫敖 出 代

輕車將軍 公孫賀 出 雲中驍騎將軍 李廣 出 雁門青 至 龍城獲首虜七百級敖失師而還詔曰:「夷狄無義(후략)

흉노가 상곡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차기장군= 전차와 기마부대, 기장군= 기마부대, 경차장군 = 전차 부대인 것으로 추정

위청은 상곡에서, 공손오는 대에서, 공손 하는 운중에서 ,이광은 안문에서 출동하여 龍城에서 전투를 벌임. 낙랑군의 有 雲障 은 운중현의 운이 아닐까?

52

大旱

53

六月行幸雍

54

匈奴盜邊遣將軍韓安國 屯 漁陽흉노가 변경을 도둑질하였다. 장군 한안국을 어양에 주둔하게 했다.

55

元朔 元年 (128)冬十一月詔曰:「公卿大夫(후략)

56

十二月江都王非薨

57

春三月甲子立皇后衛氏詔曰:「朕聞天地不變(후략)

58

匈奴 入 遼西殺太守入 漁陽雁門敗都尉殺略三千餘人

遣將軍 衛青 出 雁門將軍 李息 出 代獲首虜數千級흉노가 요서를 침입하여 태수를 죽였다.어양, 안문으로 침입했다. 도위를 패배시키고 3천여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데려갔다. 위청은 안문에서 이식은 대에서 출동하여 수천명의 수급을 가져오거나 포로로 삼았다.

매우 큰 전투였음을 보여준다

59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為蒼海郡

60

魯王餘長沙王發皆薨

61

二年(127)賜淮南王菑川王几杖毋朝

62

春正月詔曰:「梁王(후략)

 

 

 

 

 

63

匈奴 入 上谷漁陽殺略吏民千餘人遣將軍衛青李息出雲中至 高闕

遂西至 符離獲首虜數千級數河南地置 朔方五原郡

흉노가 상곡, 어양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 천여명을 죽이거나 끌고 갔다. 장군 위청, 이식이 운중에서 출동하여 고궐에 이르렀다. 마침내 서쪽으로 부리에 다다라 수천명의 수급을 베거나 포로로 잡았다. 하남땅에 두고 삭방군과 오원군을 두었다.

64

三月乙亥晦日有蝕之

65

募民徙朔方十萬口又徙郡國豪傑及訾三百萬以上于茂陵

원삭 2(BC 127) 여름, 백성을 모아 삭방朔方으로 10만 명을 이주시켰다. 또한 군국의 호걸 및 재산 3백만 () 이상인 자를 무릉(茂陵)으로 옮겼다

66

燕王定國有罪自殺

67

三年(126)罷蒼海郡三月詔曰:「夫刑(후략)

68

匈奴 入 代殺太守入 雁門殺略千餘人

흉노가 대에 침입하여 태수를 죽였다. 안문에 침입하여 천여인을 죽이거나 끌고 갔다.

69

六月庚午皇太后崩

70

罷 西南夷城 朔方城令民大酺五日

서남이를 정복했는데 삭방성을 쌓았다?

71

四年(125)行幸甘泉

72

匈奴入 代定襄上郡殺略數千人

흉노가 대군, 정양군, 상군에 침입하여 수천명을 죽이거나 끌고 갔다.

73

五年(124)大旱大將軍衛青將六將軍兵十餘萬人出朔方高闕대장군 위청이 6장군과 병사 십여만을 이끌고 삭방, 고궐에서 출동했다.

獲首虜萬五千級일만오천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삼았다.

74

夏六月詔曰:「蓋聞 (후략)

75

匈奴入代殺都尉흉노가 대에 침입하여 도위를 죽였다.

76

六年(123)春二月大將軍衛青將六將軍兵十餘萬騎出定襄斬首三千餘級休士馬 于 定襄雲中鴈門赦天下대장군 위청이 6장군과 병사 십여만를 이끌고 정양에서 출동했다. 삼천여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삼았다. 돌아와서 병사와 말을 정양 운중 안문에서 쉬게 했다. 사면령을 내렸다.

77

夏四月衛青復將六將軍絕幕大克獲前將軍趙信軍敗降匈奴右將軍蘇建亡軍獨身脫還贖為庶人위청이 다시 육장군을 이끌고 군막없이 크게 승리하였다. 전장군 조신의 군대는 패하여 흉노에 항복했다. 우장군 소건은 군대를 망하여 독신으로 돌아와 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한나라가 대패한 기록이다.

 

 

5. 한무제 때 주요 기록을 보면 흉노와의 전쟁 일색이다. 주요 전장은 상곡, 어양, , 안문, 정양 등이다. 첨부한 지도에서 보듯이 흉노는 서북에서 산길을 따라 태원분지로 남하하면서 공격했다. 그러므로 위 상곡, 어양, , 안문, 정양 등의 주요 전장은 태원분지로 남하하는 길 근처이다. 먹을 것도 뺏들 것도 없는 산꼭대기를 침입하는 경우는 없다.

 

1) 한무제 때 정양군은 진나라때 낭맹읍으로 태원군에 속했다. 서한때 양곡현이며 동한때 치소를 지금의 흔주시에 두었다. (부록1)

 

2) 운중현을 검색한 결과 차이나는 내몽고 자치주 의 서울인 호화호특시까지로 비정하고 있었다. 태원시 바로 북쪽 양곡현에 운중 지명이 나온다.

최근 고구려의 산성이 호화호특시와 그 아래 남쪽에서 발견되어 고구려와 흉노의 연관성에 대한 관심을 끌고 있다. (부록2)

 

3) 지금 산서성의 서울 태원시가 유방 한고조가 임명한 제후국 한나라의 서울이었다. (부록3)

 

부록1

定襄县历史悠久拥有属龙山文化的西社横山白村等新石器时代遗址县城西南残垣断壁为西汉阳曲古城遗迹

 

历史沿革

今定襄地春秋后期公元前541年后属晋

战国时497年以后 属 赵氏 晋阳邑 辖不久 析 晋阳 置 狼猛定襄 属 狼猛邑 管辖오래지 않아 진양을 갈라서 맹랑, 정양으로 했고 맹랑읍 관할로 했다.

秦时狼猛邑 属 太原郡진나라 때 맹랑읍은 태원군에 속했다.

西汉时析 狼猛邑 置 阳曲县属 太原郡서한때 맹랑읍을 갈라 양곡현을 두고 태원군에 속하게 했다.

东汉献帝建安二十年215),南移 阳曲县 于太原界在 阳曲故城 置 定襄县 属 新兴郡治所 在原平即今忻州市)。(바이두 定襄县

https://baike.baidu.com/item/%E5%AE%9A%E8%A5%84%E5%8E%BF/10894213?fr=aladdin )

 

 

부록2

西汉时期将云中郡划分为 云中郡 和 定襄郡

云中郡 治仍 在云中城管领 有

云中咸阳陶林桢陵犊和沙陵原阳沙南北舆武泉阳寿等十一个县

 

约分布在 今大青山以南东起至卓资县西境西至包头市古城湾沿 大黑河流域南清水河县喇嘛湾这一片地域内

 

其中已查明位置的有

沙陵县城址 在今 托克托县哈拉板申村东 古城

桢陵县城址 在今 托克托县章盖营子村

阳寿县城址 在今 托克托县葡滩拐

北舆县城址 在今 呼和洽特市塔布陀罗海古城

阳原县城址 在今 呼和浩特市八拜村

武泉县城址 在今 卓资县三道营村

沙南县城址 在今 准格尔旗十二连城

 

王莽时期改云中为受降

东汉时期又重新设置了云中郡管领有云中咸阳箕陵沙陵沙南北舆武泉原阳定襄成乐武进等十一座县城后三座县城原属定襄郡东汉时将云中郡管辖区域向南伸延括进了什拉乌素河和宝贝河流域放弃了陶林犊和阳寿三县地也就是大黑河上游及其东面的地方바이두 云中

https://baike.baidu.com/item/%E4%BA%91%E4%B8%AD/18466355?fr=aladdin

 

(부록3)

1) 지난 두 편의 글에서 코리아 한나라는 황하 서쪽 한성에서 출발하여 임분시로 옮기고 황하 남쪽 서주지역으로 옮겼다가 다시 임분시 보다 더 북쪽인 태원시로 옮기고 급기야 흉노와 연대하여 결국 차이나 나라에게서 최후를 맞는 희한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2) 이 때 한나라 고조 유방에게서 태원으로 발령받은 한신은 좀더 변방인 마읍馬邑으로 옮기겠다고 청하고 허락을 받아 옮겼다. 마읍馬邑은 어디일까?

 

현재 필자가 파악한 마읍馬邑은 두 군데이다. 하나는 산서성 진성시 심수현 마읍馬邑촌이다. 임분시 동남쪽으로 약 50떨어져 있다. 다른 하나는 산서성 삭주시 삭성구이다. 삭주시 삭성구는 태원시 북쪽 약 210에 있다. 한신이 말한 변방 마읍馬邑은 산서성 삭주시 삭성구로 추정된다. 晉陽은 태원시의 옛날 이름이다.

[ ()리 평양() 옆 마읍산馬邑山은 삭주시인가 진성시 심수현인가.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29). 2023.1.23. 미디어피아]

 

http://www.yangco.net/new0822/?doc=bbs/gnuboard.php&bo_table=1china_5&page=1&wr_id=81

열국연의 와 다빈치 한서 한무제 본기가 번역이 다르다. 다른 판본을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부록4)

원삭 원년 (BC 128) 東夷 君 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為 蒼海郡

동이의 예군() 남려(南閭) 28만명이 항복하니, (그곳을)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

  〔〕 服虔曰:「穢貊 在 辰韓之北高句麗沃沮之南東窮于大海。」 예맥은 진한의 북쪽, 고구려옥저의 남쪽에 있고, 동으로는 대해에 이른다. (필자 주 대표적으로 허황한 해석이다. 이 역시 안사고 가 쓴 말임으로 크게 관심을 가질 바가 못 된다.)

晉灼曰:「古穢字。」

師古曰:「南閭者薉君之名。」 남려는 나라 왕의 이름이다.

 

募民 徙 朔方 十萬口又徙 郡國豪傑 及 訾三百萬以上 于 茂陵

원삭 2(BC 127) 여름, 백성을 모아 삭방으로 10만 명을 이주시켰다. 또한 군국의 호걸 및 재산 3백만 () 이상인 자를 무릉(茂陵)으로 옮겼다

 

  燕王定國有罪自殺

원삭 2(BC 127) 가을, 연왕(燕王) 정국(定國)에 죄가 있어 자살했다.

 

원삭 3(BC 126) 三年春罷蒼海郡창해군을 없앴다.

 

匈奴 昆邪王 殺 休屠王并 將其眾 合四萬餘人 來降置 五屬國以處之以其地為 武威酒泉郡

원수 2(BC 121) 가을, 흉노의 혼사왕(昆邪王)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그 무리 4만 명을 합쳐거느리고 항복해오니, 5 속국(屬國)을 두어 거기에 살게했다. 그 땅을 무위(武威주천(酒泉)군으로 삼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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