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차이나 역사책의 공식적인 시작은 사마천의 ‘사기’다. 漢字(한자)를 통하여 ‘사기’의 주무대를 찾을 수 있다. 비밀코드인 셈이다. 어떤 글자는 발음으로 표시하거나 그 씨족 · 부족 이 거주하던 곳, 장의 이름 혹은 성씨, 근처의 큰 산이나 강등 표시하기 쉬운 자연물 등을 한 글자로 나타낸다.
글자의 왼쪽에 삼수를 붙이면 근처의 강이 되고, 글자의 오른쪽에 우부방阝(邑)을 붙이면 마을이 되어 씨족 부족의 고향이 된다.
지명이나 인명의 경우 사기 주석서와 안사고의 한서 주석은 발음을 주석한 것이 많다. 반절 혹은 반 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漢字(한자) 글자를 현대 코리아가 발음하는 대로 반절 표시된 한자를 읽으면 거의 95% 이상 같다. 현대 차이나가 발음하는 대로 반절 표시된 한자를 읽을 수도 없고, 겨우 읽어내어도 전혀 같지 않다. 이것만 보아도 漢字(한자) 는 코리아의 언어문자라고 확신할 수 있다.
2. 1960년 7월 발행된 차이나 중화서국 표점교감본이 모든 연구자들의 텍스트
1) 차이나 역사책으로 한민족의 역사무대를 밝히고 있다. 차이나 역사책은 18세기 청나라시대에 차이나의 역사책을 모두 모아 ‘24사’라는 이름으로 인쇄하여 출판하였다.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부터 청나라 건륭제의 명에 의해 편찬된 명사까지 역대 왕조에서 공인된 정사 24개를 24사라고 한다.
1912년 청나라 멸망 후 현대에 편찬된 사서인 신원사와 청사고 중 하나를 더해 25사, 혹은 둘 다 더해 26사라고도 한다.
2) 1960년 7월 차이나에서 출간된 역사자료집인 중화서국(中華書局) 표점 교감본이 정사 24사와 함께 '청사고'를 포함하고 있어 이를 텍스트로 한다.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 중화서국(中華書局) 표점 교감본이다.
3) 『사기』에 대한 대표적인 주석서인 3가주(三家註)로 알려진 송나라 배인(裴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 및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가 사마천의 ‘사기’ 본문에 같이 인쇄되어 있으며 통상 주석서를 가지고서 분석하는 경우가 많다.
4) ‘사기’가 편찬된 것은 기원전 100년 경, ‘한서’가 편찬된 것은 기원후 100년 경, 그리고 주석서 ‘사기집해’는 기원후 470년경, ‘사기색은’은 기원후 730년경, ‘사기정의’ 는 736년에 편찬되었다. ‘사기’ 기준으로 570년~836년 후에 주석서의 주석이 달린 것이다.
5) 사기 본문에 나오는 말인지, 사기 주석서에 나오는 말인지를 엄격히 구분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6) 한서의 경우 위 설명과 동일하게 편찬되었다. 반고가 편찬하고 당나라 때 안사고 가 주석을 달았다. 안사고는 645년에 죽었는데 편의상 640년경에 안사고가 주석을 단 것으로 가정하자. 한서 편찬후 554년 뒤에 주석을 달았으니 제대로 전해져 왔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3. 한서지리지 낙랑군 고찰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一〕
낙랑군(樂浪郡)은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 (기원전 108년)에 설치했다. 왕망은 낙선이라 했다. 유주에 속한다.
〔一〕 應劭曰:「故朝鮮國也。」師古曰:「樂音洛。浪音狼。」
응소가 말하기를 [ 옛날 조선국이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 낙樂의 발음은 낙洛이고 랑浪의 발음은 랑狼이다.
필자 비판 :
1) 한서지리지 편찬되고 540년 후에 “ 한서지리지 편찬되고 100년후에 죽은 응소가 낙랑이 옛날에 조선국이라.”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2) 안사고가 응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낙랑이 옛날의 조선국이 아니었고, 조선국은 어디에 있었는지를 밝히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응소가 죽은 기원후 200년은 이미 차이나는 위촉오 삼국이 맹렬히 싸우던 때라 낙랑군에 조선이 있었는지 조차 관심이 없을 때였다.
3) 한서지리지는 9주 혹은 13주 주 밑에 군과 현이 있은 것으로 표현은 하지만 어느 주에 어느 군이 있었다고 표시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군에 대해서 어느 주에 속한다고 표현하는 방식이다. 실제 장소를 애매하게 만들 의도가 보이는 부분이다. 실질적인 지배를 하지 못했다는 반증인 것이다.
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
가구수는 62,812호이고 인구는 406,748 명이다.
有雲鄣。縣二十五:운장이 있으며 현이 25개이다.
필자비판 : 운장雲鄣 에 대해 설명하는 문헌이 없다. 필자는 담장 (담벼락)이라고 본다. 경계를 표시하는 담장이 있었고 담장의 이름이 ‘운장’인 것이라고 본다. 이는 사기 조선열전에서 만이 조선으로 들어올 때 (담)장鄣 과 (요)새塞 의 기록이 있다.
사기 《朝鮮列傳》
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筑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燕王盧綰反,入匈奴,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