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1) ‘사기’, 동북아 고대사에 관심을 두는 분들이 헷갈리는 첫 번째 대목이 있다. 皇帝(황제) 와 황제黃帝 이다. 보통명사 황제皇帝는 나오지 않는다. 황제皇帝와 비슷한 개념이 천자天子(하늘의 아들) 이다. 황제黃帝 는 ‘누런 임금’이다. ‘순 임금’ ‘요 임금’ 과 동격인 제帝 이다. 차이나는 굳이 3황 5제라고 부른다. 천자天子와 제帝를 구별하는 것이다.
2) 그 잘난 사마천의 ‘사기’에는 ‘3황’은 없고 ‘5제’만 있다. 이름도 ‘사기 5제 본기’이다. ‘사기 3황기’ 나 ‘사기 황제기’는 없다. 후대의 잇속에 따라 3황이라 붙이고 심지어 3황은 4명 정도의 인물이 수시로 바뀐다. 지금부터 머릿속에서 3황과 보통명사 황제를 지워야 한다.
3) ‘사기 5제 본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 黃帝 者(황제자),少典之子(소전지자),姓 公孫(성 공손),名曰 軒轅(명왈헌원)。” 즉 “ 황제(黃帝)라는 사람者은 소전(少典) (부족)의 자손으로 성을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라 했다.”
3-1) 黃帝 者(황제자)=황제(黃帝)라는 사람者은, 이라는 용법은 ‘사기’에서 계속된다. 이는 저자 사마천이 전해 들은 것으로 기록에 없거나 불충분하다고 판단하여 OO者 라고 쓴 것이라고 본다.
3-2) 고유명사 황제의 성은 공손이라 했다. 성姓 과 씨氏 의 구분은 매우 어렵다.지금 시대는 성씨를 합쳐서, 대한민국 기준으로 이름 앞에 나오는 1, 2 글자를 성씨 혹은 성이라고 한다. 현대 대한민국 기준으로 고유명사 황제의 성명은 ‘공손헌원’이다.
맞는 지 확신은 없지만 ‘헌원’은 ‘공손씨’이다. ‘신농씨’에서 ’신농‘까지가 성씨이다. 그러므로 ’염제帝 신농 씨‘는 현대 대한민국에서 성명을 ’안중근‘과 같이 표현하는 대로 따르면 ’신농 염‘이 되는 셈이다. 고유명사 황제는 ’공손헌원‘ 이기도 하고 ’공손 황‘ 이기도 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함으로 잘 기억해야 한다. 현재까지 연구결과로는 현대 영미식으로 이름이 앞에 오고 성씨가 뒤에 오는 식으로, 차이나는 고대의 성명(성씨와 이름)을 기록한 적도 있다.
성은 부계혈족, 씨는 모계혈족 혹은 그 반대라는 연구(주장)도 있다. 보통명사 황제가 죽고 난 다음 이름을 붙여 ‘시호’라고 했고, 역사책에 기록할 때 보통명사 황제의 고유명사 이름을 적을 수 없어 ‘다른 이름’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성명을 잘 기억하고 동일인물인지 아닌 지를 판별하는 것이 ‘사기’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하다. 성명 글자 한 자 한 자에 부족과 고향 등이 들어 있다!
3) 이어지는 글에 “黃帝 二十五子(황제이십오자),其 得姓者 十四人(기득성자십사인)”가 있다. 고유명사 황제에게 25명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14명이 “새로” 성씨를 만들었다. 즉 11명은 보통명사 황제의 성씨인 “공손‘을 계속 썼다.
2. ‘사기 오5제帝본기’에서 고유명사 황제, 신농씨, 그리고 치우
1) ‘사기 오5제帝본기’ 첫 번째 문단을 요약하자.
아득한 옛날 ‘신농 씨’족이 황하 유역을 지배해 왔다. 황하 유역의 다른 씨족 중 하나인 ‘소전 씨’족의 헌원(혹은 ‘황’)이 태어났다. 헌원의 아버지쪽 성씨는 ‘공손’이다. 신농 씨족 세력이 약해져 권력이 약해지자 반란이 일어났다. ‘공손헌원’이 반란군을 규합하여 ‘염 제帝 신농 씨족장’에게 대어드는데 ‘치우’는 ‘염 제帝 신농 씨족장’ 편을 들었다. 판천에서 ‘염 제帝 신농 씨족장’과 (치우와 싸운 게 아니다!) 세 번 싸워 고유명사 황 제帝(=‘공손헌원’)가 이겼다. 전쟁터인 ‘판천’은 산서성 황하 강변으로 추정된다.
1-1) ‘씨’는 모계 혈족의 성씨로 본다. 신농 씨, 복희 씨 등은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로 성씨가 내려온 것이 신농, 복희 라는 해석이다. 씨의 경우 특이하게 두(two) 글자인 경우가 많다. ‘황 제帝’는 소전 씨의 공손 성으로 이름은 ‘헌원’이기도 하지만 ‘황’ 외(one) 글자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염 제帝 신농 씨의 아버지쪽 성은 알 수 없지만 이름은 ‘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2) ‘성’은 부계 혈족의 성씨로 본다. 공손 헌원, 공손 탁... 의 공손 이다. 은나라의 ‘성’은 ‘자’이고 주나라의 성은 ‘희’이다. 은나라를 쓰러트린 주 무왕은 ‘희발’이다. 대부분 이름이 외자이다.
2) 원문과 ‘스윙’의 번역
① 軒轅之時(헌원지시),*1) 神農氏 世 衰(신농씨 세 쇠)。
헌원(軒轅) 시대에는 신농씨(神農氏)의 후대가 쇠퇴해져->‘신농’ 씨족의 세력이 약해져서
② 諸侯 相 侵伐(제후상침벌),暴虐 百姓(포학백성),而 *2)神農氏 弗能征(이신농씨불능정)。
제후들이 서로 침략 정벌하고 백성(귀족. 당시 서민들은 성이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들에게 포악하게 굴었으나 신농씨 (신농 부족의 부족장 줄여서 신농씨족장)가 정벌할 수(다스릴 수) 없었다.
③ 於是 軒轅 乃 習用 干戈(어시헌원내습용간과),以征 *3) 不享(이정불향),諸侯 咸 來 賓從(제후함래빈종)。
이에 헌원은 군사를 훈련시켜서 조공하지 않는 제후들을 정벌하니 모두 신하로 복종했다.-> 헌원이 세금을 걷지 않으니不享 제후들이 찾아와서 복종했다.
④ 而 蚩尤最為 暴(이치우최위폭),莫 能伐(막능벌)。
그러나 치우(蚩尤)는 가장 포학하여 토벌할 수가 없었다.-> 치우는 신농 씨족인지 헌원의 방침에 따르지 않아 포섭할 수가 없었다.
⑤ 炎帝 欲 侵陵 諸侯(염제 욕 침릉제후),諸侯 咸歸 軒轅(제후함귀헌원)。
염제(炎帝) 신농씨가 제후들을 치려고 하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에게 귀의했다.-> 염제가 제후들을 염제 편으로 할려고 침략하자 제후들은 모두 헌원 편에 붙었다.
侵陵 ( = 侵凌 ) 침릉 (→侵凌(침릉))
⑥ 軒轅 乃 修德 振兵(헌원내수덕진병),治五氣(치오기),藝五種(예오종),撫萬民(무만민),度四方(탁사방),
헌원은 덕을 닦고 군대를 정비하였으며, 오행(五行)의 기운을 다스리고, 다섯 가지 곡식을 심는 등 만민을 어루만지고 사방의 토지를 측량했으며,
⑦ 教 *4) 熊·羆·貔·貅·貙·虎(교웅비비휴추호),以 與炎帝 戰於 *5) 阪泉之野(이 여염제 전어 판천지야)。
곰, 비휴, 이리, 호랑이 (부족)등 맹수들을 훈련시켜 판천(阪泉)의 들판에서 염제(炎帝)와 싸웠다 ->熊·羆·貔·貅·貙·虎·貔·貅·貙·虎 6부족으로 볼 것이냐, 웅비熊羆· 한 부족, 비휴貔貅 한 부족, 추貙 부족, 호虎 부족 4 부족으로 볼 것이냐의 해석상 문제가 대두된다. 좌우간 웅(웅비)족과 호 족이 있는 것은 명확하며, 두 부족은 잘 알려진 대로 단군조선 건국설화에 나온다.
羆 그물이 아니고는 제압할 수 없는 큰 곰
熊羆 웅비 곰과 말곰을 아울러 이르는 말.
貔 비휴 비, 비휴(豼貅: 표범의 일종), 맹수(猛獸)의 이름,너구리(갯과의 포유류)
貙 이리 추, 이리(늑대. 갯과의 포유 동물) 스라소니 맹수(猛獸)의 이름
⑧ 三戰然後 得其志(삼전연후득기지)。세 번의 전투 끝에 그의 뜻을 이루었다.
⑨ 蚩尤作亂(치우작란),不用帝命(불용제명)。
치우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⑩ 於是 黃帝 乃 徵師諸侯(어시황제내징사제후),與 蚩尤 戰 於 *6) 涿鹿之野(여치우전어탁록지야),遂禽殺 蚩尤(수금살치우)。
이에 황제는 제후들의 군사를 징발해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치우와 싸워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⑪ 而 諸侯 咸尊 軒轅 為 天子(이 제후 함존 헌원 위 천자),代 神農氏(대 신농씨),是為黃帝(시위 황제)。
그러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천자로 받들어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니 이 사람이 바로 황제이다.
⑫ 天下有不順者(천하유불순자),黃帝從而征之(황제종이정지),平者去之(평자거지),披山通道(피산통도),未嘗寧居(미상녕거)。
천하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황제는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정벌하였고, 평정한 곳은 떠나며 산을 개간하여 길을 개통하느라 편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3. 오제본기 첫째 문단의 해석
1) 위 2. *1),*2)는 신농 씨가 헌원보다 앞서서 권력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2) 위 *3) 不享을 ‘스윙’은 ‘조공하지 않는 제후’ 로 번역했다. 不享에서 享을 조공한다로 해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자(틀린 글자)일 가능성도 생각해 본다.
필자는 “ 정벌하고 조공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소문을 들은) 제후들이 모두 찾아와서 (來) 복종했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신농씨 집권 말기에 세금을 잘 납부하지 않았는데 고유명사 황제가 세금을 받지 않았다는 말이다.
좀 더 확대 해석하면 신농씨 정권에 반란을 일으킨 두목이 ‘공손헌원’ 고유명사 황제다.
享자는 ‘누리다’나 ‘(제사를)드리다’, ‘잔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享자는 亠(돼지해머리 두)자와 口(입 구)자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돼지가 우리에 갇힌 모양의 글자 豳(빈) 이 주나라의 고향이었음을 기억하자.
3) 위 *4) 熊·羆·貔·貅·貙·虎·貔·貅·貙·虎 6부족으로 볼 것이냐, 웅비熊羆· 한 부족, 비휴貔貅 한 부족, 추貙 부족, 호虎 부족 4 부족으로 볼 것이냐의 해석상 문제가 대두된다. 좌우간 웅(웅비)족과 호 족이 있는 것은 명확하며, 두 부족은 잘 알려진 대로 단군조선 건국설화에 나온다.
羆 그물이 아니고는 제압할 수 없는 큰 곰
熊羆 웅비 곰과 말곰을 아울러 이르는 말.
貔 비휴 비, 비휴(豼貅: 표범의 일종), 맹수(猛獸)의 이름,너구리(갯과의 포유류)
貙 이리 추, 이리(늑대. 갯과의 포유 동물) 스라소니 맹수(猛獸)의 이름
咸 함 함괘(咸卦), 성(姓)의 하나.(다 함/짤 함), 다(남거나 빠진 것이 없이 모두)
4) 위*5) 판천지야를 두고 차이나는 대략 4군데를 놓고 연구 중이나 ‘동북공정’ 등의 이유로 판천을 지금의 북경시 연경구 (과거 연경시)로 비정하고 있다. 물론 ‘사기’의 흐름으로 보아 판천은 산서성 황하 강변으로 비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4-1) 相传 黄帝与炎帝战 于 阪泉之野。其地 所在,有四说:(판천에 대해서는 4가지 학설이 있다.
(1)在 山西省阳曲县 东北,相传 旧名 汉山 。
(2)在 今 河北省 涿鹿县 东南。
(3)在 今 山西省 运城县 南。而 如今 在 延庆县 张山营镇 有 两个村庄,分别 叫 上阪泉 和 下阪泉。它们 在 过去 原本 是 一个村庄,叫做 阪泉村 这里 也有 可能 是 阪泉之战的 战场。현재 산서성 운성현을 지목하고 있다. 필자가 가장 동의하는 지역이다. 현재 바이두 지도상으로는 판천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4) 在今 河南省 扶沟县。
https://baike.baidu.com/item/%E9%98%AA%E6%B3%89/1838907?fr=aladdin
4-2) 산서성 운성현에 대한 바이두 설명이다.
运城,简称“运”,山西省辖地级市,位于 山 西西南部,
北依 吕梁山 与 临汾 接壤,
东峙 中条山 和 晋城 毗邻,
西、南分别 与 陕西渭南、河南三门峡 隔 黄河 相望,
上古 唐尧 建国、舜都 蒲坂、禹都 安邑 以及夏的都城均 在运城。
商 为九州中央冀州之地。帝王所都为中,故曰中国。祖乙自相迁都于耿(今 河津)。 [5]
春秋 统属 晋国,晋献公 八年(前669年),晋国 定都 于绛(今绛县)。
春秋战国 舜帝 陵 舜帝 陵(2张) 三家 分 晋后,运城属魏,魏国 都城 在安邑。
秦 秦始皇统一中国,设36郡,运城 属河东郡,治所安邑。
南北朝 北魏孝昌 中置 唐州,治所 白马城(今 临汾尧都区)。
唐 为河东道,辖 山西全境 及 河北部分地区,治所 河中府(今永济)。
https://baike.baidu.com/item/%E8%BF%90%E5%9F%8E/163766?fr=aladdin
4-3) 북경시 연경구에 대한 바이두 설명이다.
延庆区,隶属北京市,地处北京市西北部;东邻 怀柔区,南接 昌平区,西与 河北省怀来县 接壤,北与 河北省赤城县 相邻
《史记》中记载,黄帝与炎帝 三战而后 合,得其志 于阪泉。
考古发现 约 六、七千年前,延庆境内 即有 居民活动。
春秋时期,延庆县 曾是 山戎族 活动地区,
春秋晚期 和 战国初期地 属 燕国。
秦 统一 全国后,始设 上谷郡,置 上兰、居庸县,今 延庆属之。
西汉,上谷郡领 县15,其中 夷舆县、居庸县 均在本境。
东汉,撤 夷舆县,合为 居庸县。
5) *6) 涿鹿 에 대해서 바이두는 북경시 서북쪽으로 비정한다.
5-1) 차이나는 탁록을 지금 북경의 서북쪽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난 이는 ‘동북공정’ 등의 목적으로 비정한 것이라고 본다. 황제가 황하를 따라 내려오면서 치수를 하고 기존 권력 신농 씨를 패퇴시키는 데 굳이 북경 서북쪽까지 올 이유가 없다. 탁록은 황하 강변에서 찾아야 한다!
涿鹿县,隶属 于 河北省 张家口市,地处 中国 河北省 西北部、桑干河 下游,与 张家口市 下 花园区 和 北京市 郊区 相接。
秦朝时,兼并诸侯分天下为36郡、涿鹿县 境 属 上谷郡。
汉朝时,属 幽州 上谷郡,并 于今县境内 置 涿鹿(因 涿鹿山 得名,治 今 矾山镇三堡),下落(治今 涿鹿镇西)、潘(治今 保岱)3县。
西晋时,改置 广宁郡(治下落),仍置三县于原治,唯下落改称下洛。
北魏时,属 燕州广宁郡,州、郡治下洛县。并改下洛县为广宁县,仍置涿鹿、潘县于故址。北魏末废潘县,北齐改置怀戎县。同时废广宁、涿鹿2县。
隋大业初,废北燕州、改属涿郡,为怀戎县地。
唐代初,属 河北道 妫州 怀戎县。光启中 改置 新州(治永兴县)及 永兴县(治今涿鹿镇)、矾山县(治涿鹿故城),隶属河东道新州。
4. 치우의 패배, 고유명사 황제는 신농 씨를 제치고 신하가 되다.
1) 위 글 2)의 ⑩ 於是 黃帝 乃 徵師諸侯(어시황제내징사제후),與 蚩尤 戰 於 *6) 涿鹿之野(여치우전어탁록지야),遂禽殺 蚩尤(수금살치우)。
이에 황제는 제후들의 군사를 징발해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치우와 싸워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2) 위 글 2)의 ⑪ 而 諸侯 咸尊 軒轅 為 天子(이 제후 함존 헌원 위 천자),代 神農氏(대 신농씨),是為黃帝(시위 황제)。
그러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천자로 받들어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니 이 사람이 바로 황제이다.
3) 직접적으로 치우가 신농 씨의 후손인 것을 기록한 바는 없다. 전후 문맥으로 판단해 보자. 고유명사 황제가 집권하고 난 다음 치우가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 치우는 신농 씨의 일족 내지 군신관계 였다. 치우를 죽이고 난 다음에야 고유명사 황제가 천자 天子가 된 것으로 보아 신농 씨가 이전의 천자 天子였던 것이다.
4) 패권과 정통성을 가진다는 위미에서 천자 天子 가 사용됨으로 이후 고유명사 황제의 후손들이 천자 天子 가 되기 쉬웠을 것으로 추측하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5) ‘사기’ 앞 부분에서 제帝는 천자 天子 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본다. ‘제帝천자 天子’의 자리를 평화적으로 물려주는 꿈 같은 이야기는 없다. 요가 순에게 순이 우에게 물려 주는 이야기를 살벌한 권력쟁탈전으로 묘사한 차이나 역사책이 ‘죽서기년’이다. 신농 씨 천자 天子를 고집한 치우는 누구이며,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천자 天子 신농 씨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