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가. 사마천 ‘사기’ 권129 화식열전에는 (기원전 100년경 편찬. 위 역사책과는 약5~600년의 차이)
“ 연나라는 6) 북쪽으로는 오환(烏桓)과 부여(夫餘)와 이웃해 있고, 7) 동쪽으로는 예맥(穢貉), 조선(朝鮮), 진번(眞番)과 접하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
고 쓰여져 있다.
‘사기’와 아래 세 역사서를 비교하면, 약 5,6백년의 시간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나라(민족)의 이동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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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 |
진서 4이 (四夷) 열전 부여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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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년경 범엽 편찬 |
285년 경 편찬(진수), 450년 경 증보(배송지) |
648년 방현령 등 편찬 |
1 |
夫餘國은 玄菟의 북쪽 千里 쯤에 있다. |
夫餘는 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
夫餘國은 玄菟의 북쪽 천여리에 있는데, |
玄菟에서 천 리 떨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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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도의 북쪽 |
장성의 북쪽 |
현도의 북쪽 |
2 |
남쪽은 高句驪와, |
남쪽은 高句驪와, |
남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
3 |
동쪽은 挹婁와, |
동쪽은 挹婁와, |
동쪽 없음 |
4 |
서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
서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
서쪽 없음 |
5 |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 |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 |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 |
사마천 ‘사기’ 권129 화식열전에서는 (기원전 100년경 편찬. 위 역사책과는 약5~600년의 차이) “ 연나라는 6) 북쪽으로는 오환(烏桓)과 부여(夫餘)와 이웃해 있고, 7) 동쪽으로는 예맥(穢貉), 조선(朝鮮), 진번(眞番)과 접하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 고 쓰여져 있다. ‘사기’와 위 3 역사서를 비교하면, 약 5,6백년의 시간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나라(민족)의 이동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
나. 제일 오래되고 권위 있는 ‘사기’ 화식열전을 출발로 하여 부여 등 한민족의 근거지를 찾아본다.
2. 옥갑출토지와 부여
가. 옥갑 관련 세 역사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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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 |
진서 4이 열전 부여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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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년경 범엽 편찬 |
285년 경(진수), 450년 경 증보(배송지) |
648년 방현령 등 편찬 |
6 |
殺人殉葬, 多者以百數.
其王 葬用 玉匣, 漢朝常豫以玉匣付玄菟郡,王死則迎取以葬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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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漢時, 夫餘王葬用玉匣, 常豫以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 漢나라 때에는 夫餘王의 장례에 玉匣을 사용하였는데, 언제나 [玉匣을] 玄菟郡에 미리 갖다두었다가 王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 장사지냈다. 2) 公孫淵伏誅, 玄菟庫猶有玉匣一具. 今夫餘庫有玉璧·珪·瓚數代之物, 傳世以爲寶, 耆老言先代之所賜也.
3) 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
1) 사람이 죽으면 산 사람으로 殉葬을 하며, 椁은 있으나 棺은 없다.
2) 喪을 치르는 동안은 남녀가 모두 흰 옷을 입는데, 부인은 베로 만든 面衣를 착용하며
3) 玉으로 만든 패물은 차지 않는다. |
7 |
夫餘本屬玄菟, 獻帝時, 其王求屬遼東. |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 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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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본래 濊[族]의 땅이다.
‘예’와 관련하여 딱 한 줄 나옴. |
4) 그 도장에 ‘濊王之印’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본래 濊貊의 땅이었는데,
5)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王이 되었으므로,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 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하다. |
그 王의 인장에는 「穢王之印」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나라 가운데에 옛 穢城이 있으니, 그것은 본래 穢貊의 성이다. |
나. 옥갑출토지
1) 보정시
하북성 보정시 만청 구 능산(陵山)에 있는 중산정왕의 묘에서 1968년 발견돼 발굴되었다. 중산정왕과 왕후 두관(竇綰)의 유해를 싼 금루옥의(金縷玉衣)와 술항아리, 박산향로, 장신궁등 등이 나왔다. 금루옥의로 추정해보건대 중산정왕의 키는 약 185~186 cm 정도로 추정됐다. [위키백과 유승(중산정왕)]
2) 1968년 한단시 만성한묘에서 중산정왕 유승과 그의 처 두관의 옥갑, 1979년 강소성 고우시에서 광릉왕 유서, 1983년 광동성 광주시에서 유매, 1995년 강소성 서주시에서 유술, 2006년 강소성 우태 대운산에서 유비의 것으로 추정되는 옥갑이 발굴되었다. (옴니버스 한국사, 이진우 지음 123페이지) 다만 ‘1968년 한단시 만성한묘’ 는 ‘1968년 보정시 만성한묘’로 수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1973년 하북성 정주시 팔각랑촌에서 중산회왕 유수의 금루옥의가 발굴된 바 있다. 하북성 정주시는 보정시 (부여로 추정)와 석가장시 (연나라로 추정)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河北省 定州 八角廊村 玉匣.
光阴流淌到公元1973年。
此时刘脩墓已遭盗掘和火焚,坍塌。原高达16米多的陵墓以及城垣,在风雨侵蚀下,加之村民挖土,几乎平了,墓口亦部分地露出。
考古发掘在此情况之下展开。5月开始,12月结束,数月间,惊喜不断,马蹄金、麟趾金、40块金饼、金缕玉衣……一件件沉睡地下两千多年的精美文物重见天日。
两千多枚珍贵竹简亦在这批出土文物当中。
3)옥갑은 대부분 한나라의 제후국인 왕족 (중산국,유 씨)의 것으로 보도되었다. 보도의 정확성과 중산국에 대한 검증이 중요하다고 본다. 은(상)나라가 주나라에 의해서 없어진 후 사마천의 ‘사기“에 조선과 부여는 언급되었다. 필자는 한서보다 후한서 집필 시기에 본격적으로 한민족(동이족)역사 없애기에 차이나 왕조들이 나섰고, 그 결과 상(은)나라= 조선= 부여 라는 인식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3. 부여가 은나라임을 시사하는 2008년 기사 소개.
{ 또한 그 유명한 안양 인쉬(은허 殷墟) 유적 발굴을 총지휘했던 푸쓰녠(부사년·傅斯年)은 일찍이 “상나라는 동북쪽에서 와서 흥했으며, 상이 망하자 동북으로 갔다”고 단정했다. 중국 학계도 이런 쑤빙치와 푸쓰녠의 관점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1970년대 이후 발해 연안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발굴 성과가 이 같은 학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상나라 사람들과 발해 연안의 친연관계는 인종학의 지지까지 받고 있다. 인골전문가인 판지펑(반기풍·潘其風)은 인쉬(은허)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들을 분석했는데 아주 의미심장한 결과를 얻어냈다.
“인쉬 유적에서는 상나라 귀족들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발굴된 대다수의 시신들이 동북방 인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어요. 인골들의 정수리를 검토해보니 북아시아와 동아시아인이 서로 혼합된 형태가 나타난 거지. 이것은 황허 중하류의 토착세력, 즉 한족(漢族)의 특징과는 판이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어요.”
또하나, 인쉬(은허) 발굴자들이 인정했듯 상나라 사람들이 동북방의 신앙을 존숭했다는 것이다. 즉 상나라 왕실에서 고위층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동북방향을 받들었는데, 이는 고향에 대한 짙은 향수와 숭배를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다.(중략)
“부여가 은(상)나라 달력을 써서 은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대목이지. 역법(曆法)이라는 것은 왕권국가의 상징이에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어김없이 역법을 바꾸어 새 왕조가 천운에 따랐음을 나타냈어요.”(이형구 교수)
역법이 왕권과 국가의 상징일진대 부여가 하·주·진의 역법이 아니라 상나라의 역법을 썼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다.(이형구의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참조)
하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BC 1600년) 상나라 성탕은 바로 상나라의 역법을 새로 만든 것 외에도 옷색깔(복색)을 바꿔 흰색을 숭상했다.
“하나라는 흑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흑마를 탔고, 제사 때는 흑생 희생물을 바친다. 은나라는 백색을 숭상하여 군사행동 때는 백마를, 제사 때는 흰색을 바친다. 주나라는 적색을 숭상했는데~.”(예기 단궁상·禮記 檀弓上)
이것은 앞서 언급한 부여의 습속, 즉 “부여가 ‘흰색’을 숭상했다”는 사료와 일치한다.
[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19) 상나라와 한민족(上)” 2008.02.15.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
https://www.khan.co.kr/article/200802151715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