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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한) 나라는 부여의 속국! 朝鮮(조선)을 숨길려면 夫餘(부여)부터 숨겨라!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3)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2.11.1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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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 원문과 번역문을 보자.

 

1) “夫餘在長城之北 (在長城之北 구절은 후한서에는 없다)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本濊地也 (원래 의 땅이었다. 本濊地也 는 후한서에는 있고 삼국지에는 없는 구절이다)

 

2) 北有弱水方可二千里戶八萬

 

3)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 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

 

夫餘는 본래 玄菟[]에 속하였다.

 

나라 말년에 公孫度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外夷들을 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尉仇台[소속을] 바꾸어 遼東[]에 복속하였다.

 

이 때에 []句麗鮮卑가 강성해지자, [公孫]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同盟을 맺으려고] 一族의 딸을 [에게] 시집보내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 비판

1)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정식 명칭 (차이나 역사서 기준)은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인데 국사편찬위원회는 (이하 국편위라 한다) 동이전이라고 표현하여 오해를 불러 일으키도록 하고 있다.

 

2) 국편위는 부여가 본래 현도에 속했는데 위구태가 요동으로 옮겼다로 해석했다. 나아가서 국편위는 公孫度雄張海東,”公孫度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로 해석하여 의도적으로을 해석하지 않았다.

 

3) “는 도, , 택 세가지로 읽는데 그 중 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유독 국편위는 이나 으로 읽었다.

 

4) 국편위는 雄張부분을 公孫度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로 번역했는데, 어떤 일을 벌이다. 넓히다, 크게 하다 는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면 海東에서가 아니라 海東으로가 된다.

 

公孫度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가 아니라 公孫度海東으로 세력을 확장하여로 해석하여야 한다. 굉장히 큰 차이이다. 국편위 해석으로 하면 차이나 대륙 동쪽에서 혹은 한반도북쪽에서 서쪽으로 부여가 확장해간 것처럼 느낄 수 밖에 없다. “海東으로로 해석하면 는 황하를 가리키는 것이 확실해진다. 公孫度은 황하의 동쪽으로 세력을 넓혀간 것이다. “海東에서는 틀린 번역이며 부일역사관 즉 한사군은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거짓말에 세뇌된 결과로 볼 수 밖에 없다.

 

5) 국편위의 해석을 그대로 하면 公孫度 이 한나라 사람인지, 부여족인지 매우 헷갈린다. 국편위 해석만 보면

 

公孫度 ()이를 정벌하자 ()이인 부여의 왕 위구태는 현도에서 요동으로 소속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부여는 한나라의 속국으로 한사군중 현도군에 속했다가 요동군으로 속했다는 것이다.

 

(a)公孫度雄張海東, (b)威服外夷, ©夫餘王 尉仇台更屬遼東.

(a) 문장의 주어는 公孫度()이다.

(b) 문장의 주어 역시 公孫度()이다.

© 문장의 주어는 부여왕위구태 夫餘王 尉仇台 이다. 위구태가 다시요동을 복속시켰나 (점령했나) 아니면 위구태가 요동군에 다시복속했나.

 

국편위 번역 원문을 다시 보자

 

公孫度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外夷들을 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尉仇台[소속을] 바꾸어 遼東[]에 복속하였다. ”

 

公孫度()에서 ()을 번역하지 않았으며, 尉仇台更屬遼東에서 다시가 아니라 바꾼다로 번역했다.

필자의 번역이 옳은가? 아니면 국편위의 번역이 옳은가?

 

6) 좌우간 이 기사는 부여가 현도에서 요동으로 세력을 넓혔든 옮겨갔든 했다는 것이다. 즉 현도, 부여, 요동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을 수 밖에 없다.

 

현도 와 요동 이 반드시 한나라에 속하는 군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한나라의 군현이란 그냥 이름만 붙인 것이지 실제 지배한 곳은 몇 군데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이다. 원문 역시 이 생략되어 있다.

 

1. 1) 문장과 합쳐서 보면 1.1)1.3) 두 문장중 하나는 틀린 것이다.

1.1) 문장은 夫餘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玄菟에서 천 리 떨어져 있다.”고 했다. ‘천 리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필자는 1.1 문장은 후대, 가령 명나라 때에 고쳐 써 넣었다고 확신한다. !

 

1.1), 1.3) 문장을 제대로 해석하면

부여는 한나라 수도 (지금의)서안과 가까운 현도 지방에 있었는데 어떤 이유로 황하 (바다) 동쪽에 있는 요동지역을 다시 영토로 회복했다.”

 

황하 서쪽 현도에 있던 부여가 황하 동쪽에 있는 요동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는 놀라운 결과가 된다!

 

7) 이제 본격적으로 1. 3) 문장 해석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 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

 

7-1) 먼저 公孫度雄張海東,”에서 의 해석이다. 국편위는 이를 번역하지 않았다.

 

公孫度雄 네 글자 모두를 사람 이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公孫度雄이 해동으로 세력(영토)를 확장했다.” 로 해석하면 된다. 가장 간단한 해석이다.

그러나 뒷 문장에서 만 따로 나오는 것을 보아 公孫度雄 전부가 이름이 아닌 것이 확인된다.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를 국편위는 “ [公孫]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同盟을 맺으려고] 一族의 딸을 [에게] 시집보내었다.” 로 번역했다. 이 번역의 옳고 그름은 이후에 다시 본다.

 

7-2) 公孫度雄 4글자에서 公孫度 가 사람 이름이면 은 무엇인가?

 

네이버 한자 사전은 을 수컷 웅 으로 대표하여 설명하는데 세가지 의미가 있다고 한다. 수컷,두목,씩씩하다 세 가지다. ‘두목으로 해석하면 단군환웅이 연상되지 않는가!

 

환웅(桓雄)은 환인의 아들이자, 단군의 아버지로 전해지는 신화상의 인물로, 단웅(檀雄) 또는 신웅(神雄)이라고도 한다. (위키백과)

 

환웅(桓雄)족의 두목·우두머리·왕을 의미한다고 본다.

 

公孫度雄 은 공손도(, )이란 조선민족 즉 족의 왕(부족장)이라고 해석할 것이다.

 

7-3) “ 尉仇台更屬遼東 時 句麗·鮮卑彊에서 의 해석이 문제가 된다.

 

먼저 를 보자.

a) 앞 문장 尉仇台更屬遼東 에 합쳐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까,

b) 句麗·鮮卑彊에 합쳐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까.

당연히 a)가 자연스럽다. “尉仇台更屬遼東 時 부여왕 위구태가 다시 요동을 복속시켰을 때,” 가 자연스럽다.

 

다음 을 보자

은 굳세다, 억지로 시키다, 힘쓰다 로 네이버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강하다는 뜻이다. 疆域(강역)에서 보듯이 영토와 국경의 의미도 있다.

 

尉仇台更屬遼東 時 句麗·鮮卑彊(a), (b)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a) “부여왕 위구태가 다시 요동을 복속시켰을 때, 구리와 선비가 (이미) 강해져 있었다. 즉 요동을 두고 부여는 선비, 구리와 다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의미다.

 

b) “부여왕 위구태가 다시 요동을 복속시켰을 때, (요동은) 구리와 선비의 강역이었다.

 

어느 해석이 더 매끄러운가.

 

7-4) 이어지는 구절과 국편위의 번역이다

度 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 [公孫]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同盟을 맺으려고] 一族의 딸을 [에게] 시집보내었다.”

 

먼저 宗女를 살펴보자. 宗女는 종가의 딸이다. 度 妻以宗女. “공손탁은 처로 (부여 족의)종녀를 맞이하였다. ” 가 훨씬 매끄럽지 않은가!

 

종부의 위치가 갖는 중요성 때문에 각 가문에서는 종부를 선택할 때 매우 신중하였다. 우선 아는 집안에서 종부를 데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흔히 이를 연혼(連婚)이라고 하는데, 한번 이상 혼인해본 경험이 있는 잘 아는 집안 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종가의 딸[종녀(宗女)]데려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종부(宗婦) 가족개념용어  종가의 맏며느리를 가리키는 가족용어.[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종부(宗婦))]

 

二虜에서 는 포로의 로 글자이다. 자는 사로잡다, 생포하다(生捕--),포로(捕虜), (남의 집에 딸려 천한 일을 하던 사람), 노복(奴僕), 오랑캐의 뜻이다.

二虜에서 는 구리와 선비를, 는 종이나 포로, 오랑캐로 비하하는 말이다.

 

이제 합쳐서 번역해 보자.

 

부여왕 위구태가 다시 요동을 복속시켰을 때, (요동은) 구리와 선비의 강역이었다. 공손탁은 부여가 두 오랑캐 (구리 선비) 사이에 위치하면서 구리와 선비로부터 요동을 수복한 강국이었음으로 (공손탁의) 처로 (부여 족의) 종녀를 맞이하였다.

 

’3. 제대로 된 해석

 

1) 이제 합쳐서 제대로 해석해보자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 尉仇台更屬遼東時 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부여는 본래 현도지방에 있었다. 한나라 말기에 (부여의) 공손탁 부족장이 바다 (황하) 동쪽으로 확장하고 외부의 오랑캐 (外夷)를 복속시켰다. (공손탁 보다 높은) 부여왕 위구태가 다시 요동을 복속시켰을 때, (요동은) 구리와 선비의 강역이었다. 공손탁은 부여가 두 오랑캐 (구리 선비) 사이에 위치하면서 구리와 선비로부터 요동을 수복한 강국이었음으로 (공손탁의) 처로 (부여 족의) 종녀를 맞이하였다.

 

2) 원문으로 보면 삼국지는 공손도를 현도태수 휘하의 동이족 족장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국편위는 을 고의로 번역하지 않음으로써 공손도가 부여의 족장이 아닌 것처럼 해석하고 있다.

역사를 왜곡하는 차이나의 입장에서 부여를 한나라의 속국 내지 한나라 현도군에 속한 오랑캐 나라라고 강변하고 있다. 즉 존재가 확실하지도 않은 현도()에 부여가 속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3) 이 문장 다음의 문장은 모두 위구태 가 죽고 누가 부여의 왕이 되었는 지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 다음 문장에서 부여와 구리, 한나라와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正始(240~248), 幽州刺史毌丘儉 討句麗, 遣 玄菟太守 王頎 詣 夫餘, 位居 遣 大加 郊迎, 供軍糧

정시중에 유주자사 무구검이 구리를 토벌했다. 현도태수 왕석을 파견하여 (왕석이) 부여에 왔다. (부여왕) 위거는 큰 가(大加. 큰 부족 우두머리)를 보내어 교외에서 영접하고 군량을 제공했다.

 

4) 삼국지를 배구가 고쳐 쓴 때와 비슷한 430년경에 편찬된 후한서와 삼국지의 의문의 기록을 이제 완전히 해석할 수 있다. 부여는 한나라와 구리 선비 사이에 있었으며 그 지역이 현도 요동 지방이었고 부여가 강대하니 한나라는 부여왕이 죽을 때에 대비하여 옥갑을 미리 조공품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즉 한나라가 부여의 속국이었던 것이다.

 

5) 나라 때에는 夫餘王의 장례에 玉匣을 사용하였는데, 언제나 [玉匣] 玄菟郡에 미리 갖다두었다가 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 장사지냈다. 公孫淵이 주살된 뒤에도 玄菟郡의 창고에는 玉匣 一具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으로 만든 ··등 여러 를 전해 오는 물건이 있어서 대대로 보물로 여기는데, 노인들은 先代[]께서 하사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국편위 번역)

 

魏略: 그 나라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일이 없다.

 

漢時, 夫餘王葬用玉匣, 常豫以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

 

公孫淵伏誅, 玄菟庫猶有玉匣一具. 今夫餘庫有玉璧··瓚數代之物, 傳世以爲寶, 耆老言先代之所賜也.

 

魏略曰, 其國,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부여가 은나라이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부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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