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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에 이은 이태원 참사, 대한민국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김문영 글지
  • 입력 2022.11.01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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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6대 군대 강국, 10대 경제대국의 부끄러운 민낯

사고 현장의 구급 상황. SNS 공유
사고 현장의 구급 상황. SNS 공유

 

어찌 이토록 참담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 세계 6위의 군대 강국에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다니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2014년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 국가 안전시스템 붕괴의 민낯을 보여주더니 2022년10월29일 '이태원 참사' 라는 상상할 수 없는 역사의 부끄러움을 마주하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채 우리는 이태원 참사를 맞닥뜨렸다. 우선은 사고수습이 급선무지만 참사의 진상을 명백하게 밝혀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국가 발전을 위해 세월호 참사의 진상도 깨끗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이태원은 한양(경성•서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원이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며 외국 사신의 왕래와 관리의 여행 또는 부임 때 마필의 공급, 변방의 군정을 보고하던 곳을 역이라 하고, 숙식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 여관을 원이라 했다. 또는 역참이라고도 했다.

역은 487년(신라 소지왕 9)에 처음 설치되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에는 12~13세기 경 전국에 22개의 역도와 525개의 역을 설치하였다. 조선 초기의 역제는 대체로 고려의 역도 체계를 계승했다. 역도는 도로의 상태와 중요도 및 산천의 거리에 따라 여러 개의 역을 묶어 찰방(종6품)이나 역승(종9품)의 지휘 감독 아래 순행·고찰하면서 역을 관리하는 체계이다. 중앙집권을 추구하던 조선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역을 정비했다. 세종 때 전국적인 규모의 도로망을 조직하여 44개의 역도에 538개의 역을 설치했다. 중앙역은 병조나 승여사의 지휘를 받았고, 지방은 찰방이나 역승에 의해 관리되었다. 전국의 각 역에는 찰방, 역승의 관장하에 역장 역리 역졸 등을 두어 역참의 관리와 공역을 맡게 하였다. 그중 역장은 역리 중에서 근면하고 신의가 있으며 문장을 해득할 수 있는 자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역로를 관리하는 역승의 폐단이 심해지자 1535년(중종 30) 역승을 없애고 찰방만을 두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나 지방의 관찰사, 절도사들은 발마패, 곧 마패를 지니고 있다가 역마를 사용할 경우 이를 제시하였다. 마패는 상서원에서 발급하였는데, 원래 나무로 만들었다가 세종 때 철제로 바뀌었고, 『경국대전』 단계에는 다시 동제로 바뀌었다. 둥근 패의 한쪽 면에는 사용자의 품계에 따라 이용 가능한 숫자만큼 말을 그려 넣고, 반대편에는 자호와 주조된 해와 달, 그리고 ‘상서원인’이라는 전인을 새겨 넣었다. 원은 공무 여행자의 숙식을 위해 각 주요도로에 설치된 공공시설로, 대개 역과 함께 30리(약 11.78km)에 하나씩 설치하였다. 1445년(세종 27) 원을 정비, 보완하기 위해 부근의 주민 중에서 알맞은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고 원주전을 지급하였다.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전국에 1,210개의 원이 있었다.

한양 도성을 에워싸고 서쪽에는 홍제원. 동쪽에는 보제원. 남쪽에는 이태원과 인덕원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물밀듯이 경복궁을 향해 치달았다.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남대문으로 유키나카 부대는 동대문으로 입성했다. 400년이 지난후 일제는 이들이 처음 통과한 문이라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조선총독부가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고적 1.2호로 지정했다. 결국 이 문들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되었다.

한양에 들어 온 '가등청정'은 이태원에 주둔했다. 야만적인 일본 군인들은 여자들을 겁탈했다.대분분의 여자들은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라 그 대상은 피난을 가지 못한 여자와 이태원 황학골에 있는 '운정사'의 비구니들이었다. 천주교 신자이자 반전론자인 상인 출신의 소서행장과 불교신자이자 주전론자인 장수 출신의 가등청정은 전쟁에 나서기 전 일본에서부터 라이벌이었다. 불교신자인 가등청정은 여승들을 겁탈하고 운정사까지 불살라 버린다. 가등청정은 경주의 불국사도 불지른 흉악무도한 인물이다. 야수같은 일본 군인들에게 겁탈 당한 비구니들과 여인들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는다.

절이 사라진 상태에서 비구니들의 아이들과 왜놈에게 겁탈당한 부녀자등이 애를 낳고 기를 보육원을 지어 정착케 하였는데, 당시 왜병들의 피가 많이 섞인 곳이라하여 이태원(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여자와  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선조는 이에 이들과 그 자식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나 귀화한 일본인들을 한 곳에 몰아서 일종의 이방인 공동체 지역으로 만든다. 이처럼 역사적 한이 서려 있는 곳이 이태원이다.(출처 :동국여지비고)

병자호란은 이태원 역사의 아픔을 더한다. 청나라에 끌려갔던 여인과 그 자녀들이 이테원에 삶의 터전을 잡는다. 이후,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지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곳이 배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특성을 살려 배 이자를 써서 오늘의 이태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이방인의 땅'으로 이해되어 왔다.

사고현장에서 심폐소생술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모습. SNS 공유
사고현장에서 심폐소생술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모습. SNS 공유

 

조선시대부터 용산 일대는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이곳에 머문 이후 이태원은 군사지역으로서 본격적인 정체성을 나타낸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부대는 1882∼1894년 이태원에 주둔했고,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1910∼1945년에 주둔했다. 이때부터 근대식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된다.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태원 상권은 사실상 미군이 주도했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겼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거듭나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그런데 이번 참사의 희생자를 살펴보면 미국인은 이란 중국 러시아보다 적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주택단지도 조성됐다 이태원은 1990년대 이후 아프리카인의 유입이 늘면서 현재는 판잣집과 대저택이 공존하는 독특한 주거 및 생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이태원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대한민국과 한반도는 물론이고 세계인 인류가 모두 지켜보는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참담한 비극이 펼쳐졌다. 세월호는 박근혜 정부, 이태원은 윤석열 정부에서 벌어진 대형 참사다. 두 사건 모두 극우 파쇼 정권이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조금만 안전 조치를 취했더라면 다른 나라처럼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발생했더리도 피해를 극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조국 대한민국에서 불행한 참사가 발생했다.

150명이 넘는 사람들 그것도 젊은이들 위주로 생각지도 못한 참변을 당했다. 세월호 때도 단원고등학교 젊은 꽃들 위주로 수장이 되었는데 이번에도 20대들이 주로 압사 당했다. 10월31일 오후 현재 이태원 참사 희생자 수는 사망 154명 부상 149명이다. 사망한 사람은 남성 56명, 여성 98명으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외국인 사망자도 26명이다. 이란 5명, 중국 러시아 각 4명, 미국 일본 각 2명, 프랑스 호주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베트남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스리랑카 각 1명이다.

흔히 미국에서 발생하는 총기 난사 사건도 아니고 신창원이나 유영철, 이춘재 같은 연쇄 살인마 때문도 아니다. 경찰서며 소방서 대학병원을 비롯한 종합병원이 밀집해 있는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이다. 청천벽력 상황을 맞아 사망자의 가족 특히 어머니나 아버지는 현실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할 충격에 휩싸여 있을 것이다. 꼭 잡으면 터질세라 살짝 잡으면 놓칠세라 애지중지 키운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어찌하여 선진국에 진입한 대한민국이 상상할 수 없는 어이없는 참사를 예방하지 못했단 말인가.  일단 우리는 사고 수습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완벽하게 사고 수습을 한 이후에는 사고의 원인과 진상을 철저히 밝혀야 한다. 이번 기회에 지금까지  밝혀내지 못한 세월호 참사의 진상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서 대한민국 안전 시스템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린 상황을 경험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7년 반 만에 이태원 참사를 마주하고 있다. 흐지부지 넘어가면 향후 더 큰 참사를 당하게 된다.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의 선도국가로 나가고 있다. 그런 나라에서 후진적인 말도 안되는 사고가 발생한다는 것은 아무리 넓게 생각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귀도 막히고 코도 막힐 뿐만아니라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사 앞에서 할 말을 잃은 국민들의 다친 마음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다친 국민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대한민국이 초일류국가로 성장해나가기 위해서는 참사의 원인과 진상을 밝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 그래야만 유사한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고 대한민국이 세계를 선도하는 일류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참사로 목숨을 잃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족께 위로를 드린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참사로 목숨을 잃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족께 위로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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