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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용원 음악통신 558] 리뷰: 백자영 작곡발표회 with mime

성용원 작곡가
  • 입력 2022.07.08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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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7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일신홀

작곡가 백자영의 첫 개인 단독작곡발표회가 2022년 7월 7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일신홀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작곡가 백자영이 평상시에 특히 관심이 많은 '움직임과 음악'의 연결이라는 조합으로 마임니스트와 함께 개최하면서 발표회를 통해 여러 음악적/예술적 아이디어를 얻고 다음 작업의 방향성과 작곡가로서의 앞으로의 정체성을 설정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발표회를 마치고 무대인사하는 작곡가 백자영

인간은 사회적 관계와 자신이 현재 속해 있는 조직에 좌우된다. 특히 한국인의 강한 집단주의적 성향은 옳고 그름의 판단, 개인의 의견과 취향이 상황에 따라 철저히 유연하게 바뀌고 나의 주체성보다는 남이 어떻게 자신을 바라보고 판단하느냐에 좌지우지되어 일관성이 서양문화에서 자라고 성장한 사람들에 비해 떨어진다. 그 말을 적용하면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과 좋아하는 음악을 쓰고 싶어서 펜은 든 게 작곡의 시작이었을 건데 대학에 진학을 하기 위해선 내 음악이 아니라 남이 세워놓은 잣대와 판단 기준에 얼마만큼 부합하냐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소위 아카데미라는 미명 하에 철 지난 학문을 배우고(대학의 생리가 그렇다. 대학은 원래 과거의 유산을 정리해서 학습하는 보수적인 곳이다) 서울대나 연세대학교 출신 교수들이 자신들이 모교에서 배우고 영향을 받았던 그리고 그들의 학맥과 학통을 이어가기 위한 서구 현대음악의 계승을 자신이 취직한 곳에 와서 전파한다. 이때 3가지 갈림길이 있다. 선배들이 들여온 몇몇 소수만의 음악에 적응하고 편입하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변화시키고 환골탈퇴되어 유럽이나 미국으로 유학까지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학교라는 학계에 머무는 길, 그걸 부정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감성적이며 시대와 소통하는 음악을 쓰는 길, 아님 아예 작곡을 안 하고 다른 진로로 빠지든지 이렇게 3가지다. 

백자영 작곡발표회 포스터

한국 작곡가들이 끊임없이 시도하고 공부해도 성공하기 힘든 것은 유럽 음악의 타자에서 주체로 변화하여 자신의 동질성을 획득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는 서양인과 같은 수준으로, 또 같은 맥락에서 서양음악문화의 뿌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통을 의미한다. 더욱이 서양음악 전통의 정수를 이해함에 있어서 유럽인들보다 더 뛰어난 면모를 보이지 않으면, 인정받기 힘든 어려움을 동반할 것인데 그런 고통의 과정을 거쳐 그 수준에 올라왔다 하더라도 정작 그들의 모국에서의 불수용과 음악감상시장의 부재 그리고 그것들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교육기관의 몰락으로 영원한 아웃사이더, 비주류, 고독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배워오고 할 줄 아는 걸 보호받고 지킬 수 있는 공간에 취직한 아주 몇몇 만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며 전통과 아카데미라는 명목하에 후대에 계승하려고 노력한다. 그것도 이제는 학령인구감소와 숨 가쁘게 변하는 사회의 트렌드에 부합되지 않아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이나 마찬가지다.

비서구 작곡가들이 서양음악 엘리트계 속에 들어가 그들과 같은 레벨에서 경쟁을 하는 데 가장 힘든 첫 장벽은 서구 음악의 기법과 이론을 그들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하는 것일 거고 그 경지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시대와 세대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서양음악의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서구 음악의 ‘타자’로서의 존재를 당분간 유예시키고, 스스로를 서구문화와 동일시하는 노력을 부단히 해낸 결과라 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즉, 음악가는 깊숙이 서구 음악계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자신의 문화, 환경과는 다른 서구 음악문화의 타자로서 머물 수밖에 없다고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다만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을 뿐이지...

백자영 작곡발표회의 프로그램

오늘의 작곡발표회에서 2022년 올해 작곡된 곡은 세 명의 여성 인성, 타악기 그리고 두 명의 마임니스트를 위한 <소리 없는 움직임>과 6중주를 위한 <날아다니는 섬>이었다. 다른 작품들은 모두 작곡 연대를 보고 유추하건대 백자영이 그라츠에서 또는 귀국해서 창악회나 21세기악회 같은 학회에서 발표한 작품들일 것이다. 유럽의 음악대학에서 수학할 때와 심포지엄과 같은 학회 발표를 위한 작품들의 방향과 기준은 서두에 언급한 관계성과 조직성에 맞추지 않을 수 없다. <소리 없는 움직임>에서는 얼마 전에 들었던 백자영의 피아노곡에서와 같은 '새야 새야 '모티브가 등장한다.(들으면서 백자영은 새야 새야를 참 좋아하는구나~~하고 혼자 피식 웃었다.) 만약 춘천 마임축제 같은 데서 위촉받고 그곳의 관계성을 추구한다면 음악 스타일과 활용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연주된 6중주를 위한 <날아다니는 섬>은 가장 최신작이라 그런지 유럽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유럽식 경직성이 그나마 풀어져가는 조심스러운 시도와 첫 발자국이 엿보이는 작품이었다. 어린 시절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의욕에 불타고 강한 자의식을 내비치는 야무진 소녀 백자영이 연상되었다.

다시 사회적 관계성 이야기다. 내가 속하고 싶고 속한 영역에서의 인정과 자립은 누구나 원한다. 그게 어디에 속하냐에 달라질 뿐이다. 맨날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인생 테크트리를 걷고 어디 학교의 교수네, 어느 학교의 선배네 하면 그게 자신의 관계인 반면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판이하게 다를 것. 오늘의 유일한 인지할 수 있는 새야 새야의 짧은 멜로디 인용 말고도 백자영 스스로에게 나와 관객들게 드릴 수 있는 심금을 울리는 선물이 될 수도 있는것처럼. 오늘도 현대음악작곡계가 아닌 다른 사회적 연결망에서 필자는 깨닫고 왔다. 현대인 특히 MZ 세대들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곡가는 베토벤도 아니요 슈베르트도 아니요 더더군다나 불레즈, 베리오 등등은 진짜 문헌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럼 누구냐고? 백자영의 <날아다니는 섬>과 동일한 걸리버에 나오는 천공의 라퓨타를 쓴 히사이시 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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