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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새의 춤] 탈라스 전투-2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4.13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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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당나라 원정군 지휘소 막사에는 고선지를 비롯한 휘하 장수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마주앉아 있었다. 그 자리는 작전회의라기보다 그날의 패전에 대한 성토장이라고 해야 옳았다.    

“장난감 같은 월도를 든 야만인들이 그리도 강하단 말이더냐?”

대장군 고선지가 매우 진노한 표정으로 선봉장 고문세를 노려보았다.

“네, 장군! 이슬람군 대장 살리흐는 만만하게 볼 장수가 아닙니다. 몇 겹으로 둘러싸고 질서정연하게 군사를 지휘하는 방어전술에서 도무지 빈틈을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막상 성벽을 뛰어넘기는 했으나 너무 방어벽이 튼튼해 아무리 백병전으로 몰아붙여도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탈라스 강(사진=위키백과 갈무리)

 

고문세의 말에 고선지가 불끈 성을 내며 소리쳤다.

“그걸 말이라고 씹어뱉느냐? 너를 선봉에 세운 내가 잘못이다. 내일부터는 후군으로 돌릴 테니 그리 알거라.”

“네? 장군! 억울합니다. 내일 다시 선봉에 세워주신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일거에 탈라스성을 함락시키겠습니다. 오늘 성벽을 넘어 들어갔을 때 외성과 내성 사이에 나무 장벽이 있었습니다. 내성까지 침투해 들어가려면 나무 장벽을 이은 여러 개의 다리가 유일한 통로인데, 적들이 철저하게 다리를 방어하고 있어 접근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내일 소장을 다시 선봉에 세워주신다면 나무 장벽에 불을 질러 내성까지 완전히 점령하고야 말겠습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고문세는 대장군 고선지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저 서역 바다 건너 대진(大秦: 로마)이, 초승달을 숭상하는 녀석들에게 ‘사라센’이란 이름을 붙여준 이유를 너는 아느냐?”

고선지는 바라보기조차 싫다는 듯 고문세 쪽으로는 아예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제장들 쪽을 바라보고 말했다.

첫날 전투에서 실패했다고, 당나라군을 대표하는 선봉장으로서 이슬람군에게 잔뜩 겁을 집어먹어서는 안 된다는 게 대장군 고선지의 생각이었다. 전투는 기세 싸움이었다.

선봉군이 적의 기세에 눌렸다면 앞으로의 전투 양상은 난항이 예고될 수밖에 없었다. 고선지는 그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원정을 떠날 때 아무도 몰래 알타이 산 밀림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위구르의 카를룩 카간(葛邏祿可汗)에게 밀사를 파견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밀사는 원군을 보내달라는 고선지의 서찰을 갖고 떠났다.

“초원의 유목민을 얕잡아서 ‘사라센’이라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고 있던 고문세가 볼 부은 소리로 대답하자, 고선지는 다시 조카를 날카로운 눈길로 찔러보았다.

“오래 전부터 대진 놈들은, 초원을 찾아 헤매다 사막에서 실종된 유목민들을 잡아들여 노예로 팔아먹었다. 그때 그 노예들을 ‘사막의 아들’이란 뜻으로 ‘사라센’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 노예의 후예인 사라센 놈들에게 무슨 전략전술이 있겠느냐? 노예는 철저하게 노예로 다루어야 한다. 대체 선봉장이란 자가 저 하찮은 사라센 무리들에게 겁을 집어먹다니, 네가 정작은 실성을 한 것이 아니더냐?”

이렇게까지 나오자 고문세로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억울했다. 그동안 여러 차례의 서역 원정에서 선봉을 빼앗긴 적이 없었는데, 다음 번 전투부터 후군으로 밀려난다는 것이 그로서는 부쩍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억울합니다. 내일 다시 선봉장으로 출전할 기회를 주십시오.”

고문세는 아직 기가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고선지는 조카를 무시한 채 주위의 장수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내일 전투에서 선봉에 설 장수는 자원하시오. 오늘은 적의 군세를 알아보려고 일부 병력만 선봉에 세웠지만, 내일은 대군을 투입해 본격적으로 공성전투를 벌일 것이오.”

그러나 아무도 선뜻 나서는 장수가 없었다. 선봉대장으로 용맹을 떨치던 고문세가 실패했으므로, 내일 전투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악전고투의 난전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제장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실상 고선지가 이슬람 군대를 ‘사라센’이라 얕잡아보며 무시를 해버린 것은 당나라 제장들에게 겁먹지 말라는 뜻에서 한 얘기였다. 그 역시 언덕에서 멀리 탈라스성 안의 전투 양상을 바라보며, 이슬람군 대장 살리흐가 대단한 전략가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당나라 제장들 어느 누구도 선봉으로 나서려는 자가 없자, 고선지는 크게 실망해 핏줄선 눈을 지릅뜨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누구 없는가? 선봉에 설 장수는 어서 나서시오.”

고선지가 큰소리로 다그쳤다.        

“장군! 소장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면…….”

그때까지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고문세가 벌떡 일어나 고선지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꼴사납게 굴지 말고 네 자리에 가서 앉아라! 너는 내일부터 후군이다.”

고선지는 입을 한일자로 다문 채 제장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나서는 장수가 없자 마침내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 공격의 선봉은 변령성(邊令誠) 장군이 맡아주시오.”

그 순간, 이제까지 후군을 맡고 있던 장수 변령성은 깜짝 놀란 눈으로 대장군 고선지를 직시했다.

“뭐…, 뭣이요?”

얼떨결에 변령성이 나타낸 반응이었다.

변령성은 당나라 황제가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를 믿지 못해 감군(監軍)으로 파견한 장수였다. 따라서 대체로 위험이 덜한 후군을 맡아 뒷전에서 전투의 양상이나 살펴가며 마초와 군량미를 대주던 입장이었던 것이다.

지난 4차에 걸친 서역 원정에서도 고선지는 감군 변령성에게 후군을 맡겼었다. 제2차 원정에서 토번국(吐藩國: 티베트)을 공략하고 나서 곧바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소발률국(小勃律國: 파키스탄)을 정복하러 갈 때도, 고선지는 변령성에게 군사 3천을 주어 이미 점령한 토번의 요새 연운보(連雲堡)를 지키게 하였다. 황제가 특별히 파견한 감군이라 하여 그렇게 우대해주었는데도, 변령성은 사사건건 따지고 들고 시시때때로 시비를 걸어왔다. 그는 황제의 신하지 대장군 고선지 휘하의 장수가 아님을 애써 강변하기 위해 그런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고선지는 늘 선봉에 섰던 조카 고문세가 탈라스성을 공격하는 첫 전투에서 실패하자, 짐짓 변령성을 선봉에 세워 그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이번 전투가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되자, 내심 그를 골탕 먹이려는 심리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었다.

바로 고선지 옆에는 판관(判官) 봉상청(封常淸)이 붓을 들고 종이에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는데, 그가 하는 일은 전투 전개 양상을 비롯하여 작전회의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봉상청은 고선지의 책사였다. 위구르의 카를룩 카간 군대에게 밀사를 보내게 한 것도, 변령성을 선봉에 세우면서 고문세를 후군으로 돌리게 하는 편제조정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고선지 역시 원군을 보내올 때까지 기다려 협공을 해야 탈라스성을 정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 그때까지는 양군이 서로 밀고 당기는 심리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선봉장을 누가 하건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컸으므로, 이번 기회에 은근히 변령성의 실력을 평가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갑자기 대장군 고선지가 선봉에 서라고 하자, 변령성은 곧바로 답변을 하지 못한 채 주위만 두리번거리며 제장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눈이 고선지 바로 옆에 붓을 들고 종이에 무엇인가를 긁적대는 봉상청에게 가서 멎었다. 저절로 눈이 씰룩거려졌다.

‘저 절뚝발이 놈이……?’

변령성은 자신을 선봉에 세우는 잔재주를 부린 자가 봉상청일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그때 고선지가 다시 입을 떼었다.      

“변령성 장군은 황제 폐하가 인정하는 명장이 아니오? 이번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울 기회를 주는 것이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보기병 1만을 이끌고 나가 분전토록 하시오. 중군을 이끄는 본관이 바짝 선봉의 뒤를 쫓아 지원할 것이니, 전투가 오늘과 같은 양상은 절대로 되지 않을 것이오. 본관은 지금까지 원정 전투에서 모두 속전속결로 해결했소. 원정군은 장기전이 될수록 불리하므로, 내일은 반드시 탈라스성을 탈취해야만 하오. 이미 오늘 선봉에선 부대는 사기가 저하되어 있으므로 후군으로 배정한 것이오. 따라서 그동안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군을 선봉으로 내세운 것이니, 그리 알고 명령에 따라주기 바라오.”

대장군 고선지의 단호한 말에 변령성은 반대 의사를 표명할 수 없었다. 더구나 봉상청이 작전회의 기록까지 일일이 적고 있었으니, 전투가 끝나고 개선해 황제에게 올리는 첩서(捷書)에 자신의 기록이 불리하게 전해질까 봐 은근히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명색이 감군이지만 황제에게 올리는 전쟁 보고서인 첩서까지 이래라저래라 간여할 권한까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변령성은 감군이라는 직분을 내세워 고선지의 주장이나 명령에 대해 괜한 시비를 걸곤 했었다. 그러나 감군도 엄격하게 말하면 대장군 휘하의 부장(部將)일 뿐이니, 지금 당장은 고선지의 명을 거역하기 곤란했다.

“장군!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아직 제 자리로 돌아가지 않은 고문세가 고선지에게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서며 간청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패장으로서 부끄러운 줄 알아라.”   

“장군……!”

고문세는 그렇게 불러놓고 감히 뒷말을 잇지 못했다. 고선지는 더 이상 조카 고문세를 쳐다보지 않고, 변령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변령성 장군은 왜 대답이 없으시오?”

대장군의 다그침을 받은 변령성도 주변 장수들의 눈이 있어 더 이상 엉거주춤하고 있을 수 없었다.

“대장군의 명을 받아 내일 아침 선봉군을 이끌고 출전하겠습니다.”

변령성이 군례를 갖추었다. 그는 감군이니만큼 군법의 준엄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전장에서 대장군의 명을 어기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참수형에 처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좋소. 오늘 전략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소. 더 자세한 작전계획은 내일 새벽에 이 자리에서 알려주겠소.”

그러면서 고선지는 휘하 장수들보다 먼저 자리를 떴다.

‘개자식! 전투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까 조카를 보호하기 위해 나를 선봉에 세우는 것 아닌가?’

변령성은 지휘소 막사를 막 빠져나가는 고선지의 등을 노려보며 마음속으로 그렇게 뇌까렸다.

그때 낙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고문세가 대장군 고선지를 째려보는 변령성의 눈과 마주쳤다.

‘저 자식이 왜 저러지? 대장군에게 반심을 품고 있는 게 분명해.’

마음속으로 그렇게 뇌까린 고문세는, 맞은편의 변령성을 노려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변 장군! 내일 선봉에 서기 싫으면 소장에게 양보하시오.”

“뭐라? 젊은 고구려 놈까지 나를 놀리는 거냐?”

변령성은 고문세에게 ‘고구려 놈’이라고 하면서 은근히 대장군 고선지까지 싸잡아 욕을 하고 있었다.

“뭐 고구려 놈이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마시오.”

고문세는 울컥 화가 목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당나라 사람들이 ‘고구려 놈’이라고 씨부렁거리는 것은 은근히 자신은 한족임을 내세우면서 변방 민족 유민 출신을 들먹여 비하할 때 쓰는 욕이었던 것이다. 고문세는 등을 보이며 막 막사에서 사라지는 변령성을 향해 ‘사내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다시 목구멍 안으로 우겨 넣느라 막 구토할 것 같은 인상을 지우느라 애를 먹고 있고 있었다.

오래 전 변령성은 변방의 이름 없는 장수로 있다가 적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아군의 비밀 정보를 알려주었다. 다행히 나중에 감시망을 뚫고 적진을 탈출하여 귀환했을 때, 이미 그의 이적 행위가 알려져 장안으로 소환되자마자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러나 사형 집행 직전에 그는 궁형(宮刑)을 자처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궁형은 사형수가 자신의 고환(睾丸)제거를 자청하여 생명을 구걸하는 매우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다. 그는 궁형을 받고 환관이 되어 황제 가까이에서 내관으로 업무를 수행하다가, 고선지가 서역 원정을 나설 때 감군이 되어 전투마다 참여케 되었던 것이다.   

“네놈이 대장군 조카라고 마구 설쳐대는구나. 내가 혀 한 번만 놀리면 네놈 목이 더 이상 몸뚱이에 붙어 있을 수 없다는 걸 모르느냐?”

변령성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중성적인 목소리로 백태 낀 눈을 희번덕거리며 이죽거렸다. 그는 ‘커흠’하고 크게 기침을 하며 먼저 지휘소 밖으로 나갔다. 겸연쩍을 때 그가 오른 손으로 턱을 쓰다듬는 것은 옛날 염소 같은 턱수염이 있을 때 하던 버릇을 내시가 되어서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시가 되면 음성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턱과 코밑의 수염까지 다 빠져버렸다.

변령성의 뒷모습이 막사에서 사라지자, 그 뒤를 따라 다른 장수들도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 자리에 홀로 남은 것은 고문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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