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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새의 춤] 탈라스 전투-1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4.1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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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기로 번들거리는 검은 말이 갈기를 휘날리며 선두에서 질주하고 있었다. 그 기세가 마치 바람의 기류를 타고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다.

선봉장 고문세(高門世)가 칼을 높이 치켜든 채 질주하는 말의 옆구리에 박차를 가하며 외쳤다.

“최고 속도로 달려라. 뒤처지는 놈은 이 칼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두두두, 두두두두!

수천을 헤아리는 기마군단의 말발굽 소리가 들판을 가득 메웠다.     

둥, 둥, 둥, 둥!

기마군단 뒤에선 대장군 고선지(高仙芝)가 이끄는 당나라 원정군 본대의 북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검은새의 춤] 탈라스 전투-1 (사진=나무위키 갈무리)

 

멀리 탈라스(Talas: 잠블) 성이 아스라하게 시야에 잡혀왔다. 성벽을 가로막은 강물이 햇살에 반사되어 공중으로 하얗게 튀었다. 그 강을 건너야만 성을 공격할 수 있었다. 강 건너 너른 들판에 우뚝 솟은 성루가 자못 위압감을 주었다.

와, 와, 와!

당나라 기마군단의 외치는 소리가 하늘로 메아리쳤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말안장 뒤에 매단 기치가 뒤로 휘어지며 요란하게 펄럭였다. 붉은 테두리를 두른 황색 바탕의 천에 ‘당(唐)’ 자를 새겨 넣은 깃발이었다.

탈라스 성이 마주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서부터 기마군단은 점차 진군 속도를 높였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군은 4차에 걸친 서역 원정에서 속전속결로 전쟁을 결판냈다. 이번이 5차 원정이었다.

고선지의 친조카인 선발대장 고문세는 5천의 기마군단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20대 후반으로 이미 원정군 소속 장수들 중 가장 용맹스럽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특히 고문세의 기마군단은 고구려 유민 출신 군사들을 향도로 앞세워 당나라 기마병들을 이끌고 있었다. 고구려가 패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무수한 전쟁터에서 적들의 오금을 저리게 한 것이 미늘갑옷으로 무장한 철갑기병들이었다. 그 후예들이 서역에서 철갑기병의 옛 명성을 되살려주고 있었다.

고구려 패망 후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온 고선지의 부친 고사계(高舎鶏)는 철갑기병의 전술로 서역의 사진(四鎭)에서 용맹을 날렸다. 그 전술을 고선지가 그대로 전수받았고, 이제는 조련이 잘 된 기마군단을 그의 조카인 고문세가 이끌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퍼부어지면서 탈라스 들판의 안개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시야가 확 트이자, 고문세가 이끄는 기마군단은 더욱 속력을 높여 탈라스성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고문세는 털빛깔이 유난히 검은 말을 타고 새처럼 날아다닌다고 하여 ‘검은새’로 불렸다. 이름인 ‘고문세’와 발음이 비슷해서, 그 별명은 자타가 공인하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말 이름도 자신의 별명을 따서 ‘흑조(黑鳥)’라고 지었다.

애마 흑조를 향해 고문세가 소리쳤다.

“흑조야! 어서 달려라! 이랴, 이랴, 이럇!”

그 소리에 고문세를 따르던 기마병들도 서로 자신의 말머리를 한 치라도 다른 병사보다 앞세우기 위해 정신없이 고삐를 휘둘러댔다.

이히힝, 이히히힝!

말 울음소리가 들판 위의 하늘로 요동치듯 울려 퍼졌다. 기마병들뿐만 아니라 말들도 전투에 이력이 붙어, 경쟁에서 결코 뒤지려 하지 않고 앞 다투어 네 발을 놀려댔다.

이슬에 젖은 들풀은 땅바닥에 납작 들러붙었고, 어지러운 말발굽들은 여지없이 그 풀들을 마구 짓뭉개며 달려 나갔다. 말들은 땅에 발굽이 닿을 새 없이 뛰어올라 마치 한 뼘 위의 공중에 떠서 날아가는 것 같았다. 흙덩이들이 먼지와 함께 튀어 오르면서 재게 움직이는 말발굽을 가려주었던 것이다.

때는 751년 7월, 푹푹 찌는 한여름이었다. 탈라스 들판은 대부분 목화밭이었는데, 한창 연분홍색 꽃이 피어나고 있는 목화들이 말발굽에 여지없이 짓뭉개졌다. 말발굽이 지나간 자리에서 풋풋한 목화 향기가 공중으로 수증기처럼 발산되었다.

사실상 당나라군은 새벽부터 1차 공격으로 보병들을 출전시켰으나 탈라스성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견디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원래는 보병들이 성벽을 뛰어넘어 성문을 열면 그때 기마군단을 투입할 예정이었으나, 강을 건너면서부터 새카맣게 날아오는 화살 앞에선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쇠뇌(弩)로 쏘는 화살은 사거리도 길고 맞으면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강했다. 도강할 때는 보병들의 공격 속도가 더욱 느려 적의 쇠뇌가 쏘아대는 화살로 인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고민 끝에 선봉장 고문세는 보병들을 일단 후퇴시켰다. 그리고 미늘갑옷으로 무장한 기마부대가 적의 날아오는 화살에는 더 강한 점을 내세워, 2차 공격으로 철갑기병을 출진시킨 것이었다.

탈라스성에는 사방에 4개의 문이 있는데 모두 굳게 닫혀 있는 상태였다. 이 성을 방어하는 병력은 석국(石國: 타슈켄트)과 압바스조 이슬람(大食國: 사라센제국)의 연합군이었다.

석국의 젊은 왕 나구차비시(那俱車鼻施)와 이슬람의 지장(智將) 지야드 이븐 살리흐는 탈라스의 성루에서 아득하게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나라 기마군단이 질풍처럼 밀어닥치는 것을 보고, 그들의 얼굴엔 일순 긴장미가 서렸다. 보병의 공격은 가볍게 물리칠 수 있었지만,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기마군단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당황하지 마라! 우리는 목숨을 걸고 성을 사수해야 한다. 아무리 적의 기마군단이 전속력으로 달려오더라도 성벽을 쉽게 넘지는 못할 것이다. 적들은 결국 말을 버리고 각개전투로 성벽을 기어올라야 하는데,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렸다 일거에 척살하면 된다.”

휘하 장수들과 병사들을 격려하는 젊은 왕 나구차비시의 목소리는 사뭇 격앙되어 있었다. 부왕의 원수를 갚겠다는 의지가 너무 강하여 울분에 가득 찬 소리가 늑대 울음처럼 허공으로 울려 퍼졌다.

탈라스 성 위에서 바라보면 들판을 질주해 달려오는 당나라 기마군단은 마치 바다에 폭풍이 불 때 일어나는 격랑과도 같았다. 멀리서 보면 완만한 물결이 굼실거리는 듯하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키를 넘는 파도더미로 변해 거칠게 밀어닥쳤다.   

이슬람 장수 살리흐도 휘하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적들이 강을 건너기 시작하면 그때 일제히 쇠뇌로 활을 쏴라!”

석국-이슬람 연합군은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깃발을 성루 높이 매달고 있었다. 그 사이 사이 이슬람군의 상징인 검은 깃발도 바람에 펄럭였다. 검은 깃발에는 아랍어로 ‘라 일라하 일라 알라, 무함마드 라술룰라’라는 흰 글씨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슬람 병사들은 이 간단한 구절을 마음 깊이 아로새겼으며, 실제로 소리 높여 외칠 때 두려움이 사라지고 새로운 용기가 솟아난다고 여겼다. 이 구절은 무슬림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마법과도 같은 주문(呪文)의 일종이었다.

병사들은 각기 방패와 활, 초승달처럼 휘어지고 끝이 날카롭게 선 월도(月刀)나 길고 뾰족한 장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못 살벌한 분위기로 질주해오는 당나라 기마군단을 노려보았다.

마침내 당나라 기마군단이 성 가까이 들이닥치자, 이슬람 병사들이 무기를 든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어 올리며 일제히 외쳤다.

“라 일라하 일라 알라, 무함마드 라술룰라!”

당나라군 기마군단을 이끄는 고문세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려왔다. 이슬람군이 외치는 소리는 ‘알라 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신의 사자다’라는 뜻이었다. 선봉장인 그는 그 뜻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예 무시해 버렸다. 휘하 기마병들에게도 굳이 그것을 알려줄 필요조차 없었다. 여러 차례 서역 원정을 경험해 소문으로 들어서 아는 병사들도 있었으나, 그들도 이슬람군의 주문을 그저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쯤으로 여겼다.      

마침내 탈라스 강변 가까이 다다른 고문세는 일단 말을 멈추고 기마군단을 향해 소리쳤다.

“자, 이제부터 강을 건너야 한다. 속도를 늦추지 말고 그대로 진격하라.”

기마군단이 일제히 강물로 뛰어들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강물은 겨우 허리가 잠길 정도였고, 강폭도 조금 큰 하천 수준에 불과했다. 그동안 오래도록 지속된 가뭄으로 인해 강물의 수위가 아주 낮아 기마군단이 도강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말들은 헤엄치듯 물속을 달렸다. 그때마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햇살과 부딪쳐 무지갯빛 물보라를 일으켰다.

성벽 위에서 석국-이슬람 연합군 장수들이 휘하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적이 강을 건너고 있다! 제1진부터 일제히 화살을 쏴라!”

석국왕 나구차비시도 휘하 군사들의 분전을 독려하였다.

“적이 우리의 젖줄인 목화밭을 짓밟았다. 이제 우린 저들의 명줄을 끊어놔야 한다!”

석국-이슬람 연합군은 성벽 위에서 제1진부터 제3진까지 세 겹으로 방어진을 펼쳤다.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제1진이 화살을 쏘고 물러나면 제2진이 앞으로 나서며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 제3진이 대기하고 있다 전면으로 한 발 더 내딛으며 활에 화살을 메겼다.

탈라스성 위에서 쏜 화살은 까마득히 높은 하늘로 날아올라 포물선을 그리며 강물 가운데로 떨어졌다. 강을 건너는 당나라 기마병들은 머리를 말갈기 가까이에 처박고 정신없이 고삐를 내리쳤다. 재빠르게 도강을 해 성 가까이 접근해야만 화살의 세례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병이나 말이나 모두 미늘갑옷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화살을 맞아도 잘 꽂히지 않고 도리어 튀어나갔다. 말의 눈을 맞히지 않는 한 화살정도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기병은 말과 한 몸이 된 듯 바짝 등에 엎드려 더 안전을 기할 수 있었다.

당나라 기마군단은 제1진부터 제5진까지 전열을 갖추었는데, 이미 제1진은 성벽 밑까지 바짝 들러붙어 있었다. 말갈기에서는 더운 김이 나며 땀으로 인해 매우 번질거렸다.

애마 위에서 고문세가 기마군단 제1진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말안장 위에 올라가 갈고리를 던져라. 그리고 줄을 붙잡고 바짝 성벽에 매달려라!”

고문세는 자신이 먼저 시범을 보이듯 말안장 위에 두 발을 딛고 올라섰다. 그리고 곧 밧줄이 달린 쇠갈고리를 빙빙 돌려 성벽 위로 던졌다. 다른 기마병들도 그를 따라 쇠갈고리를 성벽에 걸고 밧줄에 매달렸다.

“돌덩이를 굴려라!”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군의 머리 위에 끓는 기름을 들이부어라!”

성벽 위에서 석국왕 나구차비시와 휘하 장수들이 소리쳤다. 그들은 햇빛에 번쩍이는 월도를 빼어들고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와아, 와아아!

우우우우, 히이히힝!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병사들의 함성과 말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탈라스성 안팎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성루에서 석국-이슬람 연합군은 악을 써대며 함성을 질렀고, 당나라 기병들이 성벽 위로 기어오르자 주인을 잃은 말들은 성벽 둘레를 이리저리 떠돌며 울어댔다.

선봉장 고문세가 가장 먼저 성벽을 넘었다.

“자, 다들 서둘러라!”

고문세는 그의 뒤를 따라 성벽을 기어오르는 병사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성을 방어하는 석국-이슬람 연합군 병사들을 향해 가차 없이 칼을 휘둘러댔다. 워낙 동작이 빨라서 그의 칼끝은 잘 보이지 않았다. 예리한 칼날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여기저기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고, 그와 함께 적병의 목이 수수목 잘리듯 떨어져 나갔다.

이때를 틈타 고구려 유민 출신 향도들도 성루에 올라와 달려드는 석국-이슬람 연합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성루의 방어병력을 물리쳐 어느 정도 공간이 확보되자 당나라 기병들이 차례차례 성벽을 넘어와 육박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석국-이슬람 연합군의 방어는 물 샐 틈이 없을 정도로 질서정연하고 강고했다. 당나라 기병들의 육박전으로 제1진 방어병력이 무너지면 뒤에서 제2진이 쇄도해왔다. 성루의 방어벽이 뚫리면 연쇄적으로 다른 병력이 투입되어 새로운 방어진을 펼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석국왕 나구차비시가 잔뜩 이를 갈아붙이며 소리쳤다.

“성내로 들어온 적들은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이슬람 장수 살리흐도 월도를 빼어들고 한꺼번에 두세 명씩 쓰러뜨리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마라! 성안에 있는 적들은 수효가 적고, 아군들은 수십 배 많다! 겁먹지 말고 적들을 도륙하라!”

그 소리에 겁먹을 고문세도 아니었다. 그는 나는 새처럼 가볍게 몸을 놀리며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이리 치받고 저리 달리면서 석국-이슬람 연합군들의 목을 베어 넘겼다. 어느 새 그는 이슬람 기병을 쓰러뜨리고 말을 빼앗아 탄 채 적의 방어벽을 뚫기 위해 전력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검은새의 칼을 받아라!”

선봉대장 고문세가 들이닥치는 곳에선 적의 시체들이 바람에 쓸리는 낙엽처럼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성을 방어하는 석국-이슬람 연합군 세력에 비하면 성벽을 타고 넘어온 당나라 기병들 숫자는 너무 적었다. 제1진 다음에 차례로 제2진과 제3진이 따라붙었지만, 그 중에서 성벽을 넘어오는 병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나라 기병 중 절반 이상이 성벽에 매달렸다 떨어졌다. 석국-이슬람 연합군의 뜨거운 기름과 돌의 세례를 받아 줄을 놓쳐 떨어져 죽거나 부상당하기 일쑤였다.

더구나 고문세를 당황케 한 것은 탈라스 성의 내부 구조였다. 이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되어 있는데, 그 두 성 사이에 높다랗게 나무 장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장벽은 나무로 된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수직으로 막아선 나무 장벽이라 다리를 통과하지 않고는 내성으로 접근할 길이 없었다. 힘들여 외성을 넘어온 당나라 선봉군은 내성으로 들어가는 나무 장벽 앞에서 금세 석국-이슬람 연합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고문세는 더 이상 적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게 되자 일순 당황했다. 백병전은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나, 점차 성벽 위로 올라온 당나라 기병대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제3진까지는 성벽을 넘어 적과 백병전을 벌였지만, 제4진과 제5진은 석국-이슬람 연합군의 방어전술에 막혀 성 밑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석국-이슬람 연합군의 방어는 그만큼 견고했다. 당나라 기마군단 제4진과 제5진이 성벽을 넘지 못하고 막히자, 먼저 성벽을 넘은 군사들은 자연적으로 포위되어 진퇴양란에 처했다.

‘아아, 이럴 수가!’

고문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대장군 고선지를 따라 출전한 4차에 걸친 서역 원정에서 그는 선봉장으로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제5차 원정은 그 양상이 달랐다. 예상외로 석국-이슬람 연합군의 전투력이 강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 당나라군의 후방에서 퇴각하라는 징소리가 울렸다. 고문세는 휘하 졸개들을 향해 외쳤다.

“일단 적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라!”

이미 아군의 기세가 꺾인 것을 느낀 고문세는, 더 이상 공격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멀리 탈라스 언덕에서 전투 양상을 지켜보던 대장군 고선지도 그걸 알고 후퇴명령을 내린 것이 틀림없었다.

고문세는 병사들을 이끌고 좌우로 마구 칼을 휘두르며 적의 포위망을 뚫기에 바빴다. 적병 10여 명을 베어 넘긴 뒤에야 그는 간신히 성루에 다다랐다. 급한 나머지 그는 말을 탄 채 성벽 아래로 뛰어내리려 했으나, 잡자기 말이 주춤하는 바람에 그의 몸뚱어리만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떨어지기 시작했다.

성벽 밑에는 당나라군의 시체가 즐비하게 쌓여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고문세는 뛰어내리다 다리가 부러졌을지도 몰랐다. 물큰, 하는 느낌과 함께 그는 몸을 굴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체 더미 속에 자신의 몸뚱어리가 떨어져 있었다. 동료들의 시체가 그의 목숨을 구해준 셈이었다.

벌떡 일어선 고문세는 휘파람을 불었다.

휘리릭, 휘릭!

그러자 저 멀리 성벽 밑에서 서성이던 검은말이 약속이나 한 듯 주인을 찾아 달려왔다.

“흑조야, 어서 가자!”

고문세는 반갑게 애마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날쌔게 안장 위로 뛰어올랐다. 그만큼 그는 다급했다.

숱한 전투를 겪으면서 고문세의 애마 흑조는 잘 길들여져 있었다. 휘파람 소리를 듣고도 주인이 어디에서 자신을 찾는지 곧바로 알아들었다.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에 애마는 그 뜻을 먼저 알고 재빨리 움직였다.

고문세는 허탈한 심정으로 탈라스 강을 다시 건넜다. 그가 이끈 당나라 선봉대의 보병과 기마군단은 첫날 탈라스 공성전투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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