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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전문 기자
  • 입력 2022.03.22 12:21
  • 수정 2023.04.1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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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의 시인

이육사(출처=네이버)
                           이육사(출처=네이버)

사진은 육사 님의 소년미 있는 모습을 올렸다.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음력 1904년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 도산면에서 차남으로 태어나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옥사한다.

본명은 이원록, 아명은 이원삼이며 형제들과 의열단에 가입한 독립운동가 시인, 평론가, 수필가, 시나리오 작가, 기자이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이고 어머니는 의병장 딸이다. 1920년 예안보문의숙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대구 교남 학교를 나와 조선혁명군사정치 간부학교를 다녔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대구형무소 수형 번호 264 이육사가 호다. 고기를 먹고 설사하다 한자 육사도 썼는데, 좋은 걸 먹어도 옳지 않으면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같다. 옳다고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퇴계 사상과 연결된다. 일제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는 한자가 다른 육사라는 이름도 다양하게 썼고 마지막으로 대륙의 역사 의미를 필명으로 했다. 섬나라 일본 역사가 아니란 뜻일 듯하다. 이활로 개명하고 이 한자를 뒤집어 사인으로 만들었다.

만주와 중국에서 독립운동할 때 중국 혁명 지도자이자 작가인 루쉰을 만나 글쓰는데 관심 가졌고 그의 소설 '고향'을 번역했다. 1926년 문예운동 창간호에 시 ‘전시(前時)’를 발표했고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도 유명하지만 그보다 덜 알려진 시를 소개하기 위해 번역했고 한글 현대어로 나온 기존 시도 조금 매끄럽게 고쳤다.

교목

푸른 하늘에 닿을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리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湖水)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ss에게........

Tall Tree​

Like reaching blue sky

burn over time and stand tall,

don't bloom in spring even!

Lapped in worn web,

fluttering alone in endless dream

mind never regret.

Feeling forlorn by black shadow,

falling in deep lake finally,

wind can't bear to shake you even.

 

                                              ........to ss.........

키 큰 나무를 말하는 교목은 high tree도 되지만 라임 맞춰 tall tree로 했다. 불타다는 의욕이나 정열이 끓어오르다도 된다. 육사는 각운을 라로 통일하지 않았는데 현대어로 고치며 사람들이 라임처럼 한 걸 필자가 시인의 원 의도대로 다시 아니리로 했다. 아니라로 하면 but 의미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f 슬랜트 처리했고 way finally도 각운이다. mind wind shadow shake 슬랜트 라임 맞췄다. 마지막 연이 현대 문법이다. 분사구문이 윈드를 꾸미는 게 아니라 문맥상 you가 실질 주어다. 현대 영어는 주어 자리 주어를 분사구문이 꾸미는게 아니라 문맥상 주어를 위치에 상관없이 꾸민다.

휘두르는 건 공중에 휘젓는게 아니고 휘감고 경상도 방언이다. 설내이는은 현대어가 아니라 바꿨다. 설레이는도 틀린 문법이고 설레는이 맞다.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은 검은 그림자처럼 어려운 상황이 힘들면 의미다. 쓸쓸하다에 막막하다 의미가 있다. 남아서셔 말어라 거꾸러저도 다 문법에 맞게 고쳤다. 호수 속도 띄어야 한다.

ss는 이육사의 삶의 롤모델이며 친구였던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석정 윤세주라는 말이 있지만 그가 호수 속 거꾸러질 일은 없고 오히려 '절정'이 더 어울린다. 서화가로 유명한 동생 수산에게가 아닐까? 연인기 수필에서도 동생을 칭송하고 타고 우뚝 선 나무와 검은 그림자 호수에 잠긴 나무가 서화처럼 느껴진다. s가 두 번이니 한 번 쓴 이니셜과 구분해 바로 아래 동생을 언급했고 쉬어가는 느낌의 시가 독립운동을 하는 동생을 걱정하듯하다. 시의 일부라는 말이 있지만 뒤로 밀린 위치상 시가 아니라 헌사로 보아야 한다. 한자인지 모르지만 산수화의 산수를 바꿔 수산으로 한 거 같다.

윤세주는 1901년 6월 24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1942년 6월 3일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본명은 윤소룡이며 별칭은 소용, 호는 석정이다. 백범일지에는 석정으로 적혀있다.

​절정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Peak

Whipped by severe season

I am whipped north finally;

wold where sky is exhausted and ended,

ice columns like blade, I stand on it

Where must I kneel?

I have even no foothold;

I think with eyes closed

winter maybe rainbow made of steel.

highland도 있지만 두운 맞춰 wold를 택했다. 채찍질 당하다를 lash와 채찍 scourge로 복잡하게 할 필요는 없다. 어느 기사엔 scourage로 잘못 썼다. 끝난이 지평선이지만 맞닿다보다 엔드 번역이 지친과 어울린다.

​절정(絶頂) 최고 경지, 일 경과의 최고점이고 산꼭대기를 끊다 의미도 있으니 끊어내도 되는 의미를 써야한다. 같은 단어라도 출생을 잘 생각해야 한다. 클라이맥스도 절정이지만 문학용어고 vertex는 정점, 꼭지점이고 수학 용어다. 버텍스로 번역한 건 어울리지 않는다.

절정과 정점은 다르다 절정은 상태, 상황을 얘기하고 정점은 위치를 얘기한다. 여름의 피크지 여름의 버텍스가 아니다. 한국어 전문가가 아니면 비슷한 단어는 같은 줄 안다. 뉘앙스가 다 다르다.

정점은 부정적 의미에도 쓰고, 절정은 긍정 의미에만 쓴다. 정점은 그냥 완성된 모양 의미가 강하고. 절정은 점점 다가가는 시기도 포함하고 자연물에 어울리고 하나하나 차곡차곡 변해감도 나타낸다.

정점은 수치적 단어에 쓰고 절정은 추상적 표현에 주로 쓴다. 계절의 정점을 찍었다 하지 않는다. 탑과 첩탑의 차이다. 절정은 탑이고 정점은 그 끝 첨탑이다. 절정의 정점은 있어도 정점의 절정은 없다. 절정은 약간 넓은 의미, 고비를 담고 정점은 절정의 끝이다. 절정은 문학적 의미​고 정점은 통계적 의미다.

절정은 좋은 상태에 쓴다. 전염병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쓰지 않고 전염병이 정점을 찍었다고 한다. 낙엽이 절정에 이르렀다고는 하나 낙엽이 정점에 다달았다고는 잘 하지 않는다. 문맥상 계절이 추운 건 좋고 나쁨이 없다, 자연이니. 의미는 독립운동과 연관되지만 번역은 자연물로 보고 해야 한다.

​결론은 정점은 이성, 부정 단어고 절정은 감성, 긍정 단어다, 단어도 다 긍부정을 내포한다. 정점을 긍정에도 쓰긴 하지만 나누자면 그런 변별이 있다. 한국어 전공자는 이런 언어학 공부를 한 학기 한다.

한국어를 정확히 설명하는 이유는 저런 차이를 모르고 번역들을 하기 때문이다. 시번역은 단어 하나하나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제목도 시다. 영어 단어 고르기도 시적으로 해야 한다.

소년에게​

차디찬 아침이슬

진주인가 빛나는 못 가

연(蓮)꽃 하나 다복이 피고

​소년(少年)아 네가 났더니

맑은 넋에 깃드려

박꽃처럼 자랐어라

큰강(江) 목놓아 흘러

여울은 흰 돌쪽마다

소리 석양(夕陽) 새기고

너는 준마(駿馬) 달리며

죽도(竹刀) 처 곧은 기운을

목숨같이 사랑했거늘

거리를 쫓아 다녀도

분수(噴水) 있는 풍경(風景) 속에 

동상답게 서봐도 좋다

서풍(西風) 뺨을 스치고

하늘 한 가 구름 뜨는 곳

희고 푸른 지음을 노래하며

그래 가락 흔들리고

별들 춥다 얼어붙고

너조차 미친들 어떠랴.

To Boy​

By pond with cold morning dew

shines like pearls

a lotus blooms beautifully,

boy, you were born;

in clear soul,

grew like gourd flower

Big river wails and flows,

rapids engraves sunset sound

on each white stones,

cantering courser

bamboo sword's straight strength

you loved like life;

chasing on street even,

in view with fountain

you may stand like statue even

West wind skims cheek,

place where clouds rise around sky

singing white and blue music,

​yes, rhythm is shaking,

stars freeze from cold,

what though even you are crazy?

1968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의 낙동강 옆 육사의 시비가 있고 생전 행적과 시 ‘광야’가 새겨져 있다. 서울엔 문화공간 이육사, 안동엔 이육사문학관, 대구엔 264작은문학관이 카페로 변해 전시는 볼 수 있다. 남산동 옛 집터도 개발로 사라졌다. 독일 안네 프랭크 기념관을 봤다. 작게 이곳저곳에 역사 기념관이 있다. 그런 장소가 많아야 한다. 수필도 뛰어나다. '계절의 오행'이 퇴계 이황 자손답다.

'시 한 편'만 부끄럽지 않게 쓰면 될 것을 그래 이것이 무엇이겠소. (중략) 아무리 거슬리는 꼴을 보아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지 않는다는 것이 군자의 도량이라고 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오. 그 군자란 말 속에 얼마나한 무책임과 무관심이 반죽이 되어 있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이오.

그러나 시인의 감정이란 얼마나 빠르고 복잡하다는 것을 세상치들이 모르는 것뿐이오. 내가 들개에게 길을 비켜 줄 수 있는 겸양을 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정면으로 달려드는 표범을 겁내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내 길을 사랑할 뿐이오. 그렇소이다.

내 길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나 자신에 희생을 요구하는 노력이오. 이래서 나는 내 기백을 키우고 길러서 금강심(金剛心)에서 나오는 내 시를 쓸지언정 유언은 쓰지 않겠소. 그래서 쓰지 못하면 죽어 광석이 되어 내가 묻힌 척토(瘠土)를 향기롭게 못한다한들 누가 말하리오. 무릇 유언이라는 것을 쓴다는 것은 80을 살고도 가을을 경험하지 못한 속배(俗輩)들이 하는 일이오.

그래서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쓰려고는 하지 않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그런데 이 행동이란 것이 있기 위해서는 나에게 무한히 넓은 공간이 필요로 되어야 하련마는 숫벼룩이 꿇어앉을만한 땅도 가지지 못한 내라, 그런 화려한 팔자를 가지지 못한 덕에 나는 방안에서 혼자 곰처럼 뒹굴어 보는 것이오. 이래서 내 가을은 다 지나가고 뒤뜰에 황화(黃化) 한 포기가 피어있으니 어느 동무가 술 한 병 들고 오면 그 꽃을 따서 저 술 한잔에도 흩어주고 나도 한잔 마셔 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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