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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음모-4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1.0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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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4. 거래의 법칙

 

다음 날 늦은 아침에 두충은 장터 마당으로 나가 전날 초피를 팔아 챙긴 은화를 모두 털어 고급 비단을 샀다. 뒤따라온 사기는 두루마리로 된 원단을 말 위에 실었다.

“이걸 어디로 가져가시려는지…?”

사기가 은근히 물었다.

“넌 알 것 없다. 말이나 끌고 따라오너라.”

두충은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었다. 해는 벌써 중천에서 놀고 있었다.

왕궁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기와집들이 즐비했다. 그 중 솟을대문이 높다랗게 올려다 보이는 집 앞에 당도한 두충은 기침을 크게 한 번 한 뒤 점잖게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문을 지키던 하인이 나와 두충과 사기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어디서 온 뉘시오?”

“화북의 전진과 물산을 교역하는 장사꾼이오. 국상 어른께 비단을 드리려고 이렇게 왔소이다.”

두충은 사기로 하여금 말 위의 비단 짐을 내려놓게 했다.

“잠시 기다리시오. 뉘신지 모르나 일단 국상 어른께 말씀을 올려야 할 거 같아서.”

하인이 말 위에 실린 비단 짐을 보고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됐소이다. 나는 심부름을 온 것이고, 장터마당 선술집에 가면 전진에서 온 석정이란 스님이 있을 것이외다. 그 스님이 이 고급 비단을 국상 어른께 드리라고 해서 이렇게 가져온 것이니 받아두시면 될 것이오.”

두충은 사기로 하여금 얼른 짐을 풀게 한 후 곧바로 그곳을 떴다.

다시 선술집 봉놋방으로 돌아온 두충은 그때까지 잠에 곯아떨어져 있는 석정을 깨웠다.

 

황해도 안악 3호분의 고구려 행렬도 일부

 

“금명간에 국상 어른이 사람을 보내 스님을 만나자고 할 것이외다. 국상은 태자비의 아버지, 즉 구부 태자의 장인이 됩니다. 스님이 구부 태자를 만나고자 한다면 틀림없이 국상 어른이 다리를 놓아 줄 것이오.”

두충은 그렇게 말해놓고 돌아섰다.

“헛허! 역시 그대는 장사꾼 기질을 타고났군! 거래의 법칙을 잘 이해하고 있어!”

석정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그럼, 시생은 이만!”

두충은 허리를 굽혀 석정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돌아섰다.

“아니, 이대로 그냥 가면 어쩌란 말이오? 소승에게도 거래의 법칙은 지키게 해줘야지!”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겠지요.”

두충은 돌아보지도 않고 어깨너머로 대답을 던졌다.

“허긴, 그러 하오만……. 고구려가 태평성대를 누릴 때 이 석정을 찾으시오. 그러면 그때 본격적으로 거래의 법칙을 논해 봅시다.”

석정은 그러면서 또 껄껄대고 웃었다.

장터거리로 나온 두충은 이제 국내성을 빠져나와 책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두충은 사기에게도 말 한 필을 구해주었다. 두 마리의 말은 압록강을 따라 난 강변길을 질주했다. 녹음 짙은 들판이 출렁거렸다. 이제 한창 진초록으로 빛을 뿜어내는 보리가 키 재기를 하듯 우쭐우쭐 자라나고 있었다. 그 사이로 두 마리의 말이 물결을 가르듯 율동을 만들어내며 달렸다. 질주하는 말들은 바람을 몰고 지나가는 듯했고, 그에 따라 보리들은 허리를 휘청거리며 생명의 물결을 치고 있었다.

보리밭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 때 두충은 말의 고삐를 늦추고 뒤따라오는 사기를 바라보았다. 사기 역시 속도를 줄이면서 두충과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보리가 한창 자라고 있군요. 대궁에 물이 올랐어요. 한두 달 후면 곧 이삭이 올라올 것 같습니다.”

사기가 거친 숨을 돌리면서 두충을 쳐다보았다.

“그러게 말이다. 한창 농사철이 돌아오고 있는데, 백제와 전쟁을 한다며 모병을 하고 있으니 큰일이 아니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 한창 일할 장정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나면 누가 농사일을 하느냔 말이다.”

두충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자락에 붙은 약간 비탈진 보리밭에서 종달새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새가 날갯짓하는 하늘은 옥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맑고 투명했다.

“그런데 대장님! 아앗, 나리! 이것 참 어색해서 부르기가 좀 쑥스럽네요.”

사기는 슬쩍 두충의 기색을 살폈다.

“국내성을 벗어났으니 이젠 괜찮다. 그런데 왜?”

“백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묻는 것이냐?”

“석정 스님의 말처럼 고구려와 백제가 고제동맹을 맺는 것이 옳다고 보시는지요?”

“어젯저녁에 세상모르고 잠만 잔 줄 알았더니 들을 건 다 들었구나?”

“헤헷, 대장님도. 그저 말만 다룰 줄 안다고 무시하시는 겁니까? 소인도 열린 귀가 있어 민심 돌아가는 거 대충은 안다구요.”

“그래, 그동안 국내성에서 유리걸식하며 귀동냥을 해보니 민심이 어떻던가?”

“석정 스님이 말하는 그대롭니다. 백성들은 전쟁보다 평화를 원해요.”

“흐음…….”

두충은 사기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제 넘는 말이지만, 재작년 백제와의 전쟁 때 동부에서 군사를 내지 않은 것은 잘한 일 같아요. 하대곤 장군께선 군사대신 말만 1백 두를 보내셨잖아요? 소인은 그때 말먹이꾼으로 따라갔었지만, 당시 전쟁 상황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구요.”

“그때 너는 전쟁터에 있었으니 알겠구나. 고구려군이 왜 백제군에게 패했다고 생각하느냐?”

“한마디로 고구려군은 백제군에 비하여 싸우려는 의지가 부족했어요. 백제군은 의기충천하여 강공으로 나오는데, 고구려군은 전쟁이 무서워 그저 도망치기에 바빴으니까요.”

“네놈도 그래서 도망친 거냐?”

“네에? 기마부대가 무너지는데, 말먹이꾼 주제에 별 수 있겠어요?”

사기는 움찔한 표정으로 두충을 바라보다가 곧 얼굴을 펴고 헤헤거리며 웃었다.

“어쩌다 고구려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구나!”

두충은 한숨을 깨물었다.

“그런데 참, 오늘 아침 그 값나가는 비단은 왜 국상 어른께 갖다 바친 것입니까?”

사기는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네놈이 그런 건 알아 뭘 해?”

두충이 사기의 옆얼굴을 흘겨봤다.

“말에 초피를 잔뜩 싣고 와서 은화와 바꿨는데, 그 귀한 은화를 몽땅 털어 고급 비단을 사서 국상 어른께 널름 갖다 바치니 너무 아깝잖아요?”

“허허헛! 나는 은화보다 더 귀한 걸 얻었다.”

“대체 대장님이 무엇을 얻었다는 것이옵니까?”

“석정을 얻었지 않느냐?”

“네에?”

“앞으로 네놈도 석정 스님을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한자의 뜻 그대로 풀면 ‘돌솥’이 되지만, 그 괴승이야말로 금덩이보다 더 가치가 있는 보배다. 국상은 분명 석정을 만나고자 할 것이고, 석정은 국상을 통해 그토록 소원하던 구부 태자를 알현하게 되겠지. 장래에 대왕이 될 구부 태자는 실세, 그 연결고리를 쥐게 될 사람이 바로 석정이니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냐? 앞으로 우리 고구려가 그 ‘석정’이란 돌솥에 무엇을 담아 익혀내고 구워낼 지 두고 볼 일이다. 나는 그저 그 돌솥에 장작불을 지피면 되는 것이지.”

두충은 그 스스로 석정에게 투자한 일에 대해서 지극히 만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석정 스님이 그냥 돌팔이 중만은 아닌 모양이죠? 스님이란 자가 머리도 깎지 않고 그 행색은 또 뭡니까?”

사기는 그러면서 다시 흘끔 두충의 반응을 살폈다.

“척 보면 모르겠느냐? 그것이 위장술이란 것을. 아직 고구려에선 스님 복장을 하면 일단 첩자로 의심부터 하고 보질 않느냐? 백성들 사이에 불교를 믿는 신도들이 꽤나 있긴 한 모양이다만,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불교를 공인한 바 없기 때문에 출가한 스님들도 깊은 산속의 동굴에 들어가 면벽수도를 하고 있는 것이지. 백주대로에 나다니는 스님을 보기 어려운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니라.”

“위장술이라면?”

“아무래도 전진의 부견이 보낸 밀사가 아닌가 싶구나. 나도 이번에 초피 장사꾼이 되어 보니, 장사도 잘만하면 쏠쏠한 재미가 있을 것 같구나. 그래서 하대용 대인 어른이 장사에 그렇게 열심인 모양이야.”

두충은 석정을 만난 이후 생각하는 바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마음속에서 그런 변화가 일어난 데 대하여 그 자신도 은근히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두충의 속마음을 사기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푸웃, 하고 입 밖으로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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