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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음모-2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1.12.29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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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괴승

 

대사자 우신의 집 근처 골목에 몸을 숨긴 삿갓 쓴 사내는 대문을 바라보며 두충이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벌써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이었다. 해가 지자 서쪽 하늘에 개밥바라기별이 떴고,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쪽 하늘에도 달이 둥실 떠올라 길바닥을 훤히 비추었다.     

두충은 우신의 집을 나서면서 조심스레 좌우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말을 타고 천천히 큰 거리로 나섰다. 삿갓 쓴 사내는 그의 그림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재바른 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그러나 큰 거리로 나서면서 삿갓 쓴 사내는 두충을 놓치고 말았다. 기와집들과 골목이 많은 곳이었다. 큰 거리에서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릴 때 문득 사내는 목덜미에 와 닿는 선뜩한 칼날의 느낌을 받았다.

“네놈은 누구냐?”

두충이 삿갓 쓴 사내에게 단도를 들이대고 있었다.

“저, 저 혹시, 두, 두충 대장님 아니십니까?”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삿갓 쓴 사내는 말부터 더듬었다.

“어찌 네놈이 나를 안다 하느냐? 아까 낮부터 몰래 내 뒤를 밟은 모양인데, 네놈 정체가 뭐냐? 바른대로 대지 않으면 목줄을 끊어버리겠다.”

“그, 그 칼을 치워주셔야 마, 말씀을 드립지요.”

삿갓 쓴 사내의 말에 두충은 칼을 거두고 상대의 몸을 홱 돌려세웠다. 그는 거칠게 사내의 삿갓을 들쳐 올렸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두충은 달빛에 비친 삿갓 쓴 사내의 얼굴을 보고,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애썼다.

“저 하가촌의…….”

“음? 하가촌? 아니, 그러고 보니 너는? 전에 하대용 대인 어른 댁에 있던?”

두충은 금세 삿갓 쓴 사내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네, 맞습니다요. 종마장에서 말먹이꾼으로 있던 사, 사기(斯紀)라고 하옵니다.”

“너는 전에 우리 고구려가 백제를 치러갈 때 하대용 대인이 말 1백 두와 함께 말먹이꾼으로 딸려 보낸 놈이 아니더냐?”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휴우…….”

사기는 그제야 안심된다는 듯 어둠 속에서 씨익,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여기는 좀 어둡군. 저자 거리에 나가 요기라도 하면서 네놈의 사연을 듣고 싶구나.”

두충은 골목에 숨겨두었던 말을 끌고 나와 사기를 데리고 장터로 갔다. 어둠이 내리면서 떠들썩하던 장마당은 다 파하고 선술집만 불빛이 환했다.

선술집으로 찾아든 두충은 주인을 불러 말에게 먹일 건초를 주라 이르고, 사기와 더불어 마당 평상에 놓인 탁자를 두고 마주앉았다. 마당 가장자리에는 화톳불이 벌겋게 피워져 있었다. 참나무 장작이 타오르면서 타닥 탁, 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불똥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며 강렬한 불꽃을 일으켰다. 기둥에 매달린 등불보다 그 불꽃 때문에 마당은 더욱 환했다.

두충은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만약 사기가 하가촌에서 보낸 밀정으로 자신의 뒤를 염탐하고 있던 것이라면, 그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단한 심산이었다. 동부 욕살 하대곤이 대사자 우신과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하가촌의 하대용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술이 나오자 사기가 먼저 두충에게 술을 따랐다.

“그래 네놈은 전쟁이 끝나고 어디 숨어 있다 이제야 나타났단 말이더냐?”

두충이 술을 한 사발 들이켜고 나서 물었다. 만약 사기가 전쟁 이후 다시 하가촌으로 돌아갔다면, 그는 내일 아침에 해를 볼 수 없을 것이었다.   

“고구려가 백제에게 지고 나서 숨어 버렸습죠. 다시 종마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저 유리걸식하며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습니다요.”

사기는 배가 고픈 듯 술안주로 나온 장국밥의 건더기를 듬뿍 떠서 쩝쩝거리며 게걸스럽게 먹었다.

“네놈의 말이 사실이렷다?”

“그러문입쇼? 어느 안전이라고.”

“내 뒤를 미행하라고 하 대인께서 보낸 것이 아니더냐?”

“결단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요. 대인 어른이 무서워서 감히 종마장에는 돌아가지도 못했다니까요. 소인 때문에 전쟁터에서 말 1백 두를 잃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임을 면키는 어렵지 않습니까요?”

사기는 장국의 국물까지 후루루 마셔 깨끗이 비우고 나서 입맛을 쩝쩝 다셨다.

“주모, 거 푸짐하게 장국밥 한 그릇 더 말아주시오.”

두충은 선술집 주인에게 다시 장국밥을 시켰다.

장국밥이 나오자 두충은 사기 앞으로 그릇을 밀어주었다.

“대장님도 드셔야죠.”

“난 술 몇 잔이면 된다.”

두충이 사양하자, 사기는 다시 허겁지겁 장국밥 그릇에 얼굴을 처박았다.

“허헛! 그놈 며칠은 굶은 것 같구나.”

두충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입술을 비틀었다.

“헤헤, 아까 낮에 대장님이 초피 파는 걸 보고 그때부터 뒤를 좇았지요. 불순한 생각은 없었고, 은화 한 닢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이제 조금 정신을 차린 듯, 사기는 입안의 밥알을 우물거리면서 주절대기 시작했다.

“네놈이 나를 미행한 이유가 그것뿐이란 말이더냐?”

“또 있기는 있지요.”

“그것이 무엇이냐?”

두충은 얼굴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소인이 대장님 말구종 노릇을 하면 어떻겠습니까요?”

“쉬잇! 아까부터 대장님, 대장님, 하는데……. 그 말버릇부터 고쳐야겠다. 이제부턴 나리라고 불러라!”

주변을 의식한 두충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네에? 그러면 이제부턴 소인을 말구종으로 써주시는 겁니까요?”

사기는 어느 사이 두 번째 장국밥 그릇을 깨끗이 비운 채 배를 쓸어내리며 헤헤거리고 웃었다.   

“아직 확답을 한 것은 아니다.”

두충은 도무지 사기의 정체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잘만 부리면 요긴한 데 쓸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곁에 붙여두고 보기로 했다.

“전쟁보다 안정이 우선이야! 전쟁에 광분하다니, 나라에 망조가 들었어!”

선술집 저 귀퉁이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두충이 그쪽을 바라보니 낮에 대사자 우신을 만나러 갈 때 그의 앞을 가로 막고 허튼 수작을 하던 봉두난발 사내였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전쟁 운운하며 같은 소리를 지껄여대고 있었다.

“저 작자가 죽으려고 환장을 한 모양이군!”

두충이 혼잣말처럼 씨부렁거렸다.

“내버려 두세요. 저 작자는 벌써 오래 전부터 시장바닥을 떠돌며 같은 소리를 지껄여대고 있어요. 이제 사람들이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요. 미친놈이에요.”

사기는 나무젓가락을 분질러 이빨 사이에 낀 음식물 찌꺼기를 파내고 있었다.

“대체 저 늙은이의 정체가 뭐냐?”

“중원과 서역을 정처 없이 떠돌던 돌중이라는 소문도 있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살짝 미쳐서 저런 꼬락서니가 됐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신빙성 있는 것은 없습니다요.”

그러면서 사기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가관이었다. 봉두난발 사내는 자신이 직접 구부 태자를 만나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말려야 한다고 떠들어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백제를 치겠다고 전쟁에 광분해 있는 대왕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구부밖에 없다는 것이, 그 작자가 반드시 태자를 만나야 할 이유라고 했다.

두충이 사기로부터 대충 봉두난발 사내의 사연을 듣고 보니 아주 엉뚱한 소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져보면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고, 그만큼 설득력도 갖고 있었다.

국내성은 한창 전쟁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고구려 각 지방에서 모병을 해 국내성으로 집결한 청장년들이 압록강변 들판에서 한창 전쟁 준비를 위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 말을 탄 기병들이 깃발을 세우고 어디로 가는지 급히 서둘러 달려가는 광경도 자주 목격되곤 했던 것이다. 사실상 두충이 초피 장사꾼 차림으로 국내성에 들어온 것은 대사자 우신을 비밀리에 접촉하는 일 외에 전쟁 분위기를 파악하고 동부에서 어느 정도 군사를 지원해야 할지 판단하기 위한 목적도 갖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마당가의 화톳불은 꺼져가다 활활 타오르기를 반복했다. 선술집 주인이 사위어가는 불길 속에 자꾸만 마른 장작을 가져다 던져 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화톳불을 한동안 주시하고 있던 두충은 마음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백제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라면 고구려는 꺼져가는 재다.’

불길한 생각이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고구려 대왕 사유는 오래 전 연나라 모용황에게 대패한 후 기사회생을 해보려고 몸부림쳐보았지만, 그 기세는 시르죽은 화롯불처럼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 대왕 구(餘句: 근초고왕)는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 요서지역까지 진출하여 발해만을 장악하는 등 세력을 크게 확장해가면서 고구려에 위협을 가해오고 있었다.

이에 고구려 대왕 사유는 서북방 경계에 있는 군사들까지 차출하여 남방의 백제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자칫하면 서쪽 경계의 선비나 또는 북쪽 경계의 거란과 부여 세력에게 침공의 기회를 줄 우려가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두충은 두 해 전 동부욕살 하대곤이 숙신의 발호를 이유로 군대를 파견하지 않은 것이 바른 선택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었다.

봉두난발 사내의 말처럼 지금 고구려는 전쟁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내정의 안정을 취해야 할 때인지도 몰랐다. 두충은 그 사내를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두충은 전대에서 은화 몇 닢을 꺼내 사기의 손에 쥐어주었다.

“저 사내에게 갖다 주고 오너라.”

“예에? 이 귀한 은화를?”

사기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손바닥 위의 은화를 바라보았다.

“어서!”

“네, 대장님! 아, 아니, 나리!”

사기는 은화를 들고 선술집 마루 끝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봉두난발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자넨 뭔가?”

사기가 앞에 와서 얼찐거리자 봉두난발 사내가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물었다. 그 눈에서는 잉걸불 같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술을 마셔 불콰해진 얼굴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저, 저기 마당 평상에 계신 나리께서 갖다 드리라고 해서…….”

은화 몇 닢을 내미는 사기를 일별한 봉두난발 사내는 슬쩍 마당의 평상 쪽을 바라보더니 한 마디 했다.

“보시를 할 줄 아는 자로군! 이 국내성 바닥에도 저런 불자가 있었던가? 나무관세음보살!”

사기의 손에서 은화를 낚아채 허리춤에 챙겨 넣은 봉두난발 사내는 멀리 보이는 두충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당시 고구려는 정식으로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백성들 사이에서는 불심 깊은 신도들이 꽤나 있었다.

잠시 후 봉두난발 사내는 벌떡 일어나 마루로 내려서더니 성큼성큼 마당을 가로질러왔다. 그는 두충의 맞은편에 가서 털썩 주저앉으며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오! 아까 낮에 만났던 바로 그 장사치로군! 바쁜 걸음이던데, 그래 볼 일은 다 마쳤소?”

“낮엔 몰라 뵙고 실례가 많았소이다.”

두충은 봉두난발 사내에게 점잖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땡초 석정(石鼎)이오. 돌 석자, 솥 정자를 쓰지. 그래서 혹자는 ‘돌솥’이라고 하고 또는 ‘돌중’이라고도 하지. 헐, 헐, 헐!”

봉두난발 사내 석정은 보기보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부룩한 머리털과 수염 때문에 좀 늙어 보이긴 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얼굴 피부가 팽팽했다. 나이 마흔 줄에 들어선 그 얼굴에선 술기운 때문일까, 어떤 열기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눈은 시릴 정도로 맑았고, 갓 벼린 칼날처럼 예리한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예사 스님이 아니야. 알아둬서 나쁠 것 없겠군!’

두충은 이렇게 생각하며, 상대가 먼저 이름을 밝혔으므로 이제 자신의 차례임을 깨달았다.

“난 초피 장사꾼 조충이오.”

얼핏 생각나는 대로 가명을 대려고 했는데, 성만 바꾸었지 이름자인 ‘충’ 자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평상에 걸터앉은 사기가 그 모습을 보고 싱끗 웃었다.

“우리 고구려는 미천대왕 사후 근 40년 가까이 이웃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하며 살아오고 있소. 내실을 기해야 할 마당에 현재 대왕께선 백제와의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있소이다. 이는 지극히 잘못된 일이오. 부처님은 백성들이 피 흘리는 걸 원치 않소. 평화롭게 사는 걸 원하오. 고구려를 불국토의 세상으로 만들면 반드시 평화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오.”

괴승 석정은 마치 석상이나 된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옳으신 말씀……. 시생도 그리 생각합니다.”

두충은 한참 동안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하는 눈길을 보냈다.

두 사람은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았다. 그 옆에서 방관자처럼 평상에 걸터앉아 딴 곳을 주시하는 척하고 있는 사기는, 그 자세와는 달리 실상 알게 모르게 눈과 귀를 모아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두충은 다시 주막집 주인을 불러 술상을 새로 차리게 했다. 술과 안주도 푸짐하게 내오라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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