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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영웅 리더십] 장건(하)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1.12.2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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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로 부(富)를 창출하는 리더십

 

처음 장건이 한무제(漢武帝: 재위 기원전 156~141년)의 명을 받고 사신으로 서역을 다녀온 것을 ‘제1차 서역착공(西域鑿空)’이라고 한다. 착공은 ‘아무도 가지 않은 곳을 뚫는다’는 의미다. 가지 않은 길은 뚫으면, 그 길을 통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문명교류’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장건은 ‘제1차 서역착공’ 이후 다시 무제의 명을 받아 제2차 서역착공을 수행한다. 그는 먼저 제1차 서역착공을 다녀와서 무제에게 자신이 두루 거쳐 온 서역 여러 나라에 대해 보고했다. 그는 대원·대월지·대하·강거 등을 직접 가보았고, 그 외에 인접국 대여섯 국에 대해서도 전해들은 바가 많았다.

장건이 무제에게 처음 보고한 나라는 대원국이었다.

“대원은 흉노의 서남쪽에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정서 쪽으로 1만 리가량 떨어진 곳입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한 곳에 머물러 살며, 밭을 갈아 벼와 보리를 심습니다. 포도주를 생산하고, 한혈마(汗血馬)라는 명마를 기릅니다. 그 말의 조상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마(天馬)의 새끼라고 합니다.”

무제는 장건의 보고 내용 중 대원의 한혈마 이야기에 심취했다. 전에도 언뜻 한혈마에 대하여 들은 바가 있어,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말이 전속력으로 달릴 때면 귀 뒤에서 땀처럼 피를 흘린다는 그 말은, 하루 천 리를 달려도 끄떡하지 않는다는 명마라고 했다.

“강거는 대원의 서북쪽 2천 리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정착하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며 유목생활을 합니다. 월지와 풍속이 비슷합니다. 활 쏘는 군사가 8~9만은 됩니다. 나라가 작아 남쪽은 월지, 북쪽은 흉노에 복속되어 있습니다.”

무제는 장건의 말에 빨려들었다. 서역 여러 나라의 풍속이나 물산에 관심이 많았다.

“대월지는 대원의 서쪽 2천~3천리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 남쪽은 대하, 서쪽은 안식, 북쪽은 강거입니다. 유목생활을 하며 흉노와 풍속이 같습니다. 처음에는 흉노를 매우 우습게 여겼는데, 묵돌선우가 등장해 월지를 격파한 뒤 원수지간이 되었습니다. 묵돌의 아들 노상선우 때는 흉노가 월지의 왕을 죽여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습니다. 당초 월지는 돈황(敦煌)과 기련(祈連) 사이에 있었는데, 흉노에게 패하여 멀리 달아나 대원을 지나고 계속 서진해 대하를 쳐서 신하국으로 삼았습니다.”

무제는 전에 흉노의 포로들 입을 통하여 ‘노상선우가 월지의 왕을 죽여 두개골로 술을 마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사실상 장건을 파견하여 한나라와 월지가 중간의 흉노를 치는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고자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

 

'장건출사서역도', 둔황 막고굴 323굴 북벽. 한(漢) 무제(武帝)의 명에 따라 서역으로 떠나는 장건(張騫) 사절단의 모습

 

장건은 계속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서역의 이야기를 무제에게 보고했다.

“대하는 월지에게 쫓겨 서남쪽으로 이동해 성곽과 집을 새로 짓고 삽니다. 인구는 1백만에 가깝습니다. 이 나라의 수도는 남시성(藍市城)인데, 큰 시장이 있어 여러 물건을 사고팝니다. 신이 대하에 있을 때 공(邛) 땅의 대나무 지팡이와 촉(蜀) 땅의 옷감을 보았습니다. 상인에게 ‘어디서 얻었는가’ 묻자, ‘우리나라 상인이 신독(身毒: 지금의 인도)에 가서 사온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신독은 대하 동남쪽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코끼리를 타고 싸웁니다.”

무제는 장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대원이나 대하 모두 대국이구나. 진기한 물건이 많고 정착생활을 해 산업의 발달로 문물이 우리 한나라와 매우 비슷하구나. 다만 군사는 약하고 재물을 소중히 여긴다. 그 북쪽에 있는 대월지와 강거 등은 군사력이 강하다고 하나, 귀한 물건을 보내주고 이익을 미끼로 회유하면 능히 입조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인의를 베풀어 이들을 예속시키면 1만 리에 걸쳐 영토를 넓힐 수 있다. 말이 다르므로 수차례에 걸친 중역(重譯)을 통해 만나면, 의사소통이 가능한 매우 다양한 풍속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천자의 위엄과 은덕이 세상에 두루 미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무제는 곧 장건에게 명하여 밀사를 뽑아 네 길로 나누어 그 먼 이국땅에 보내도록 했다.

그러나 밀사들은 도중에 막혀 목적한 곳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당초 한나라는 서남쪽 이민족들과 통하고자 했으나 비용이 많이 들고 길도 통하지 않는 까닭에 이내 포기했다.

한무제 원수 원년에 장건은 장군 이광(李廣)과 함께 흉노를 치러갔다. 무제가 흉노 땅으로 가는 길을 잘 아는 장건에게 한나라 군사들의 길안내를 맡긴 것이다. 그 전해에도 대장군 위청(衛靑)이 흉노를 칠 때 장건이 길안내를 맡았었다.

장건이 이광과 함께 우북평으로 나가 흉노를 상대할 때였다. 이광은 적은 군사를 이끌고 적진을 살피러 나갔다가 흉노의 대군에게 포위되었다. 이때 한나라 군사들 많은 수가 살상당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으므로, ‘비장군(飛將軍)’라 소문난 날쌘 이광도 어쩔 수 없이 포로가 되었다. 이광은 팔이 길어 명궁으로 소문이 났다. 북송(北宋)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수호지(水湖志)》에 활 잘 쏘기로 유명한 화영(花榮)의 별칭이 ‘소이광(小李廣)’인 것도, 한나라 명궁인 이광에게서 따온 만큼 당대에도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한무제는 이광이 흉노에게 굴복하고, 그곳에서 선우의 청에 따라 흉노군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노했다. 나라를 배반한 이광의 가족을 모두 처형시키려고 할 때였다. 사마천이 이광의 죄 없음을 비호하다 참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스스로 궁형(宮刑)을 받고 살아난 바 있었다.

장건도 회군하여 장안으로 돌아왔을 때, 무제는 그를 참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많은 속죄금을 내고 풀려나 평민이 되었다.

무제는 흉노를 제거할 묘수가 없어 다시 장건을 불러 서역 나라들에 대해 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서역의 강한 나라와 손을 잡고 공수동맹을 맺어야만 시시때때로 준동하는 흉노 세력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신이 흉노 땅에서 들은 바로는 오손(烏孫)의 왕 곤모(昆莫)가 있습니다. 흉노가 그의 부친을 공격해 죽인 까닭에 곤모는 태어나자마다 들에 버려졌습니다. 그때 까마귀가 고기를 물고 와 그 위를 날고, 늑대가 그에게 젖을 주었습니다. 흉노의 선우는 기이하게 여겨 그 아이를 데려다 키웠습니다. 장년이 된 곤모는 전쟁터에 나가 공을 많이 세울 정도로 무술이 뛰어났습니다. 선우가 그의 부친이 다스리던 백성을 곤모에게 넘겨주고 오랫동안 서쪽 변경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를 기른 선우가 죽고 나자 곤모는 부친의 원수인 흉노와 대적해 싸웠습니다. 그만큼 오손은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오손의 왕 곤모에게 후한 예물을 보내주어 우리나라와 형제의 의를 맺게 된다면, 이는 흉노의 오른팔을 끊어놓는 것이 됩니다. 또한 오손과 연합할 경우, 그 서쪽에 있는 대하 등도 모두 끌어들여 속국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무제는 장건의 주장을 옳다 여겼다. 뿐만 아니라 오손에는 ‘서극마(西極馬)’라는 명마가 있는데, 이 또한 ‘천마(天馬)’로 알려져 있다는 말에 관심이 쏠렸다. 대원의 한혈마와 오손의 서극마를 가질 수 있다면 서역의 ‘천마’를 모두 얻게 되는 셈이었다.

마침내 무제는 장건으로 하여금 ‘제2차 서역착공’을 떠나라고 명했다.

장건은 중랑장이 되어 기병 300여 명을 이끌고, 한 명당 말 두 필씩을 나누어 주어 서역착공의 길에 올랐다. 이들이 가지고 간 예물은 소와 양이 수만 마리에 이르렀으며, 금과 비단은 수천만금의 가치가 있을 정도였다.

오손 땅에 도착한 장건은, 그곳의 왕 곤모를 만나 예물을 바쳤다. 그러나 곤모는 이미 연로하여 흉노를 칠 생각이 없었다. 오손의 대신들까지도 흉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결국 장건은 300여 명의 사신단 중에서 여러 부사들을 뽑아 대원·대하·안식·신독·우전·우미 등과, 그 밖의 인접국에 사자로 보냈다. 오손의 왕 곤모가 사자로 떠나는 한나라 부사들에게 안내인과 통역인을 붙여주었다.

장건이 귀국길에 오를 때 오손의 왕 곤모는 사자 수십 명과 답례로 말 수십 필을 보냈다. 당시에도 곤모는 한나라가 얼마나 큰 나라인지 잘 모르고 있어, 사자들로 하여금 정보를 얻어오도록 했던 것이다.

장건이 장안으로 돌아오자, 무제는 그를 구경(九卿)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그는 죽었다.

한편 장건과 함께 장안에 들어온 오손의 사자들은 한나라의 인구가 많고 물자가 풍부한 데 놀랐으며, 귀국 후 이를 왕에게 세세하게 보고했다. 장건이 죽은 뒤 약 1년 후에는 그가 당초 대하 등 여러 나라에 파견했던 사자들이 각기 임무를 띠고 간 나라들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다. 동서 간의 인적 교류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이후 서역의 각국과 한나라 간에는 정식으로 사신 왕래를 하고 물산을 유통하는 ‘문명교류’의 길이 열렸다.

 

 

■ 실크로드의 역사

 

오아시스 남로와 북로

 

중국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동서 교역의 길이 처음 열린 것은 한나라 무제 때 장건에 의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전에는 북쪽으로 천산산맥(天山山脈), 남쪽으로 곤륜산맥(崑崙山脈), 그리고 그 사이에 타클라마칸 사막이 가로놓인 타림분지가 있어 사람들이 오가는 동서의 길목을 꽉 틀어막고 있었다.

이처럼 사람의 접근이 어려울 정도로 지리적 여건이 좋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나라 당시엔 그 중간에 흉노 세력이 가로막고 있어 인위적으로 동서 교통로가 차단되기도 했다. 장건의 서역사행도 흉노 세력을 제거하려고 한무제가 서역의 대월지나 오손과 공수동맹을 맺기 위해 보낸 것인데, 그것이 동서 교통로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고대에는 흔히 전쟁로가 종종 교통로 역할을 했으므로, 전쟁과 문명교류는 마차의 양쪽 수레바퀴 같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결국 장건은 두 번의 서역착공에서 공수동맹에 실패했지만, 동서 교통로의 숨통을 트여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장건 사후 서역의 사신과 대상들이 문물이 발달한 한나라와 교역을 시작하면서 동서의 문명교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한나라는 오아시스로를 통하여 이란·아라비아·로마·인도 등지로 사절들을 파견하였다. 1백~수백 명에 이르는 사절단을 한 해에 5~10여 차례까지 보냈다. 오고가는 길이 멀었으므로, 이 사절단들은 적어도 2~3년에서 많게는 10년 가까운 기간을 통해 왕래하였다.

서방에서도 오아시스로를 통하여 사절단과 상인들이 한나라 수도 장안으로 몰려들었다. 한무제는 그들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었으며, 그들이 가져온 상아·호박·향료·유리·양탄자 등과 중국산물인 비단·도자기·계피·대황·청동거울 등을 교역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 시기에 동서 대상들이 왕래한 길인 오아시스로는 대체로 남로와 북로 두 갈래였다. 남로는 돈황의 옥문관(玉門關)이나 양관(陽關)으로부터 선선(鄯善, 누란)을 지나 곤륜산맥의 북쪽 기슭을 따라 타림분지의 우전(于闐) 등 오아시스 제국들을 거쳐 가는 노정이다. 북로의 경우 역시 옥문관이나 양관에서 출발해 지금의 투루판을 지나 천산산맥의 남쪽 기슭을 따라 타림분지의 언기(焉耆: 카라샤르), 구자(龜玆: 쿠처) 등 오아시스 제국을 지나 소륵(疏勒: 카슈카르)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대원까지 이르는 노정이다.

이 오아시스로는 후에 19세기 후반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F. von Richthofen)에 의해 ‘실크로드’로 명명되었다.

 

 

미국에서 CNN 방송국을 설립한 테드 터너는 일찍이 ‘정보’의 중요성을 안 사람이었다.(사진=위키백과 갈무리)

 

■ CNN 설립자 테드 터너의 ‘모험 리더십’

 

정보가 부(富)를 창출하는 시대

 

21세기 정보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세계는 글로벌 경제 시대를 맞았다. 인터넷과 모바일의 발달로 전 세계의 누구나가 동시다발적으로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21세기의 ‘제3의 물결’이라 할 수 있는 정보가 부(富)의 창출을 주도하는 IT 시대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보’의 중요성은 변한 것이 없다. 중국 한나라 때의 장건이 두 차례에 걸친 서역착공에 나서지 않았다면, 동서 교류의 물고를 트는 일은 그만큼 늦어졌을 것이다. 물산의 교역을 통한 동서 각국들이 문명교류를 할 수 있는 기회도 한 세기 이상 뒤로 미루어야 했을 것이다. 그만큼 산맥과 사막으로 가로막힌 동서의 길을 뚫은 장건의 모험은 오늘날에도 유의미한 공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CNN 방송국을 설립한 테드 터너는 일찍이 ‘정보’의 중요성을 안 사람이었다. 옥외광고 회사를 경영하던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여 권총으로 자살했을 때, 테드 터너의 나이는 25세였다. 한창 젊은 나이의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실로 충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빚더미에 올라앉은 아버지의 옥외광고 사업을 떠맡았지만 앞날이 캄캄했다.

테드 터너는 나이 40이 될 때까지 아버지가 물려준 빚을 갚는 일에 청춘을 다 소비했다. 10여 년 간 노력했지만, 옥외광고 사업에는 큰 진전이 없었다. 돈이 되는 주요 광고는 공중파 텔레비전에서 다 가져갔던 것이다.

어느 날 테드 터너는 자신도 방송국을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1980년 당시 미국에서는 지방 유선방송국들이 지역마다 생겨나고 있었다.

“이제 정보가 중요한 시대가 다가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뉴스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나는 뉴스만 24시간 내보내는 방송국을 설립할 것입니다.”

당시 공중파 텔레비전을 비롯한 언론의 관계자들은 테드 터너의 그런 꿈  같은 발상을 비웃었다. 고객들은 다양한 재미를 가미한 프로그램을 원하지, 하루 종일 뉴스만 내보내는 방송을 누가 보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테드 터너는 자신의 발상을 믿었고, 미국 각 지방의 유선방송사와 체인을 맺어 뉴스 송출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자신감이 있었다.

“비행기가 발명되기 전에 누가 ‘날아다니는 물체에 돈을 내고 타겠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새로운 발명의 경우는 일반 용품처럼 수요에 따라 공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테드 터너는 반드시 24시간 뉴스를 내보내는 방송이 히트를 칠 때가 오리라고 자신했다.

그 기회는 의외로 빨리 왔다.

1989년 12월 미국이 파나마를 공격했을 때, 당시 소련 외무부는 공식 외교통로가 아닌 CNN 모스크바 지사를 찾아가 카메라 앞에서 미국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미국의 부시(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도 “나는 중앙정보국보다 CNN 방송을 통해 훨씬 빨리 정보를 얻고 있다.”는 고백을 한 바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CNN방송의 뉴스가 진가를 발휘한 것은 1991년 1월 16일 걸프전이 발생했을 때였다. 당시 미국의 미사일이 꼬리에 불을 달고 어둠을 가르며 날아가 바그다드를 폭격하는 장면이 CNN방송을 타고 전해졌을 때, 전 세계 텔레비전 방송국들은 그 뉴스 화면을 따서 내보내기에 바빴다.

실제로 걸프전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첩보위성을 통해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이 발사됐다는 정보를 입수할 때마다 부하 직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빨리 CNN 채널 돌려 미사일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아 봐!”

CNN 방송국 개국 초기 170만 가구에 지나지 않던 가입자가 걸프전 이후 전 세계 95개국 7,500만 가구로 늘어났다. 말 그대로 CNN이 ‘지구촌 방송국’이 된 것이다.

“내가 국경 없는 지구촌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는데, 그것을 실현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걸프전 직후 캐나다 매스컴 이론가 허버트 마셜 매클루한이 테드 터너를 만났을 때 한 말이다.

테드 터너는 CNN 방송을 통하여 뉴스의 개념을 ‘과거에 일어난 일’이 아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로 바꾸어놓는 사람이다. 그는 공중에 떠도는 정보가 수익을 창출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한나라 때 장건이 먼 길을 걸어가서 얻은 정보를 통해 교역의 길을 텄던 것처럼, 오늘날 테드 터너는 CNN 카메라만 보내고 나서 자신은 앉아서 정보를 통해 거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사업을 하였던 것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두 번이나 서역착공에 나선 장건이나, 24시간 뉴스를 내보내는 CNN 방송국을 만든 테드 터너나 ‘모험의 리더십’으로 성공을 이끈 사람들이다. 모험 앞에는 캄캄한 막이 드리워져 있지만, 용기를 내어 그것을 뚫고 나가면 의외로 환한 세상이 있음을 그들은 믿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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