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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음모-1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1.12.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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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피 장사꾼

 

말 잔등에 짐을 잔뜩 실은 사내가 국내성 시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초피로 된 벙거지에 짐승가죽으로 옷을 해 입은 그는, 그 차림새만으로도 금세 초피 장사꾼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말에 싣고 온 짐도 모두 초피였다. 태백산과 개마고원 일대에서 나는 초피는 짐승의 가죽 중에서도 최상품으로 치고 있었다. 초피는 담비가죽으로, 날씨가 추운 북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특히 인기가 좋았다.

시장은 제법 시끌벅적했다. 미천왕 시절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했을 때에는 발해만을 통하여 큰 배들이 압록강 중류까지 닿았으므로, 당시엔 요서지역의 상인들까지도 국내성으로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백제가 요서로 진출하여 요동까지 위협하게 되면서 서해와 발해를 모두 장악하자, 졸지에 고구려의 바닷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육로로 요동을 거쳐 들어온 전진의 상인들과 북방 초원로나 대흥안령(大興安嶺)을 넘고 대릉하(大凌河)를 건너 입성한 서역 상인들만 국내성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초피 장사꾼은 신기한 듯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는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시장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든 곳은 시장 바닥 너른 마당 한가운데 가설한 상설 무대였다. 바닥에 나무 판을 깔고 삼면을 천막으로 둘러친 무대에서는 한창 각종 기예가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그 뒤에 한 남자 악사가 완함(阮咸: 비파)으로 반주곡을 타고 있는데, 그 소리에 맞춰 무동(舞童)들이 춤을 추는 모습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무동의 나무다리춤은 두 개의 목발에 의지해 몸의 중심을 잡는 기술도 놀랍지만, 땅에서 두 발로 걷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공중 높은 곳에서 온갖 재주를 부리는 묘기는 특히 압권이었다. 그렇게 높이 올라서면 어지러울 법도 한데, 춤까지 덩실덩실 추는 것을 보면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피나는 연습을 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예는 손재주 기술로, 짤막한 막대기 서너 개와 작은 공 대여섯 개를 서로 엇바꿔 던져 올리고 받아내는 재주 또한 기가 막혔다. 단 한 번도 여러 개의 공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고 막대기로 가지고 노는 장면을 보고, 거기 모여선 장꾼들은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나무다리춤이나 손재주기술을 가진 기예사들은 모두 눈이 들어가고 코가 큰 서역인들이었다.           

또 다른 장터 마당에서는 모래판 위에서 씨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눈이 들어가고 코가 큰 서역인과 뱃구레가 불뚝 튀어나온 고구려 장정이 맞붙었는데, 두 장사 모두 황소처럼 콧김을 뿜어내며 용을 써대고 있었다. 그 한쪽 편에 마련된 식당들의 무쇠 가마솥에서는 새벽부터 끓는 토장국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구수한 냄새를 사방으로 풍겨대면서 사람들의 식욕을 자극했다.   

초피 장사꾼은 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여러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삿갓을 쓴 한 사내가 아까부터 몰래 엿보고 있었다.

서역 장사꾼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간 초피 장사꾼은 말에서 물건들을 내렸다.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할 모양이었다. 서역 장사꾼들은 은화를 주고 초피를 구입했다. 서역의 소그드 은화가 고구려에서도 통용되고 있었다.

초피는 말에서 내려놓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가지고 온 물품이 다 팔리자 말은 가벼워졌고, 초피 장사꾼은 전대에 가득 은화를 채운 뒤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조금만 그의 수작을 유심히 살펴보면 어딘지 장사꾼으로서는 서툴러 보였다.

거래란 흥정이 중요한데, 그는 대충 달라는 가격대로 주고 초피를 팔아버렸다. 그래서 가져온 물건을 후딱 팔아치운 후 그는 말을 타고 서서히 장터를 빠져나갔다.

삿갓을 쓴 사내는 멀리서 초피 장사꾼의 뒤를 밟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디론가 서둘러 가는 초피 장사꾼은 누가 보더라도 수상한 낌새가 역력했다. 그런데 그 뒤를 몰래 삿갓 쓴 사내가 좇고 있는 것 또한 의심스러웠다.

그때 초피 장사꾼 맞은편에서 봉두난발을 한 사내가 나타났다. 왼손에는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등에는 걸망태를 짊어지고 있었다. 걸망태의 배가 홀쭉한 것을 보면 그 안에 별로 들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멋으로 그렇게 메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봉두난발 사내는 초피 장사꾼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전쟁을 일으키면 안 되느니! 나라가 망할 징조여. 안 그런가?”

“이 자가 미쳤나?”

초피 장사꾼이 소리쳤다.

“지금은 나라 안정이 제일! 전쟁은 백성의 근심을 만들뿐!”

“지금 누가 전쟁을 일으킨다고 그 난리요?”

“대왕 폐하가 지금 한창 군사를 모으고 있질 않소?”

봉두난발 사내는 체머리를 흔들었다. 그때마다 검불 같은 것이 묻은 사내의 턱수염이 바람에 날렸다. 모양새는 지저분해 보였지만, 그러나 사내의 눈빛만은 예사롭지 않았다.

“이 자가 궁궐에 잡혀 들어가 치도곤을 당해야 정신을 차리려나?”

초피 장사꾼이 삿대질을 하며 츳츳, 혀를 찼다.

“지금 정신을 차려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 나라 대왕이야!”

“가만 보니 큰일 낼 자로세. 난 갈 길이 바쁜 몸이니 저리 비키소.”

초피 장사꾼은 봉두난발 사내와 잘못 얽히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두려운 듯, 길을 비켜 말을 바삐 몰았다.

초피 장사꾼의 뒤를 따라붙던 삿갓 쓴 사내는 나무 뒤에 숨어서 두 사람이 노닥거리는 소리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봉두난발 사내를 뒤로 한 초피 장사꾼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 어느 큰 솟을대문이 있는 집 앞에 섰다. 곧장 가면 더 빠른 길을 애써 돌아서 간 것이 아무래도 수상했다. 그의 뒤를 몰래 밟던 삿갓 쓴 사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 오너라!”

말에서 내린 초피 장사꾼이 제법 큰 목소리로 집안에 대고 외치자, 문지기 하인이 나와 그의 행색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냈다.

“뉘시오? 감히 이 집이 뉘 댁인 줄 알고 저자 거리 사람이 ‘오너라’를 외치는 것이오?”

“대사자(大使者) 어른 계시느냐?”

문득 초피 장사꾼의 목소리가 근엄해졌다. 그의 입에서 ‘대사자’란 말이 튀어나오자 문지기 하인이 갑자기 자세를 낮추었다. 차림새는 장사꾼 같지만 예사 사람이 아님을 눈치로 알아챈 것이었다.

“뉘시온지?”

“동부욕살 하대곤 장군이 보내서 왔다고 전하게.”

초피 장사꾼은 목소리를 낮추어 은근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부터 그의 뒤를 미행하던 삿갓 쓴 사내는 골목 뒤에 몸을 숨긴 채 좀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문지기 하인은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와 초피 장사꾼을 안내했다.

사랑채 거실에는 대사자 우신(于伸)이 정좌한 채 내방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부욕살 해대곤 장군의 호위무사 두충이옵니다.”

초피 장사꾼 차림의 사내는 바로 하대곤의 집사였다.

“헌데, 어찌 그런 차림으로 왔는가?”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해 변장을 한 것이옵니다.”

“허어? 내게 무슨 기밀을 요하는 전언이라도 갖고 왔단 말인가?”

우신은 두충을 깊숙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먼저, 이것부터 받아주십시오.”

두충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온 비단 보자기에 싼 선물 상자를 건넸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대곤 장군께서 보내신 녹용과 웅담이옵니다. 책성 가까이엔 삼림이 우거져 사슴과 곰들이 많이 삽니다. 동부의 군사들이 직접 사냥을 해서 채취한 보약이옵니다.”

“허허! 이런 귀한 것을…….”

우신은 비단 보따리를 끌러보지도 않고 옆으로 밀쳐놓았다.

“그리고 이것은 하대곤 장군의 서찰이옵니다.”

두충이 가슴 깊숙이 간직했던 서찰을 꺼내 우신에게 올렸다.

우신은 밀봉된 서찰을 뜯어 읽어보았다. 글의 내용을 읽다가 가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두충은 가슴 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이련 왕자가 어느 새 결혼할 나이가 됐다?”

혼잣말처럼 되뇌던 우신이 번쩍 고개를 들어 두충을 쳐다보았다.

“하대곤 장군의 종제인 하대용 대인에게 딸이 있사온데, 이련 왕자와 가까운 사이라고 하옵니다.”

“허면, 동부욕살로선 조카딸을 고구려 왕실로 보낼 기회이니 좋은 일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사옵니다. 그 전에 하대곤 장군의 양아들 해평과 하대용 대인의 딸 연화 사이에 혼담이 오간 적이 있사온데, 이련 왕자를 만나면서부터 그 약조가 깨졌사옵니다. 두 집안이 이젠 원수지간이 되다시피 했사옵니다.”

두충은 우신에게 보낸 하대곤의 서찰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우신은 대대로 고구려 왕실의 왕후를 배출해낸 연나부(椽那部) 출신이었다. 산상왕 때의 우씨 왕후가 그의 가문 출신이며, 이후 서천왕 때의 우씨 왕후 역시 그의 증조부인 우수(于漱)의 딸이었다. 그러다가 봉상왕과 미천왕을 거치면서 연나부가 아닌, 다른 부에서 왕후가 나왔다.

그런 연후에 다시 태자 구부가 연나부 출신인 국상 명림수부(明臨秀夫)의 딸을 태자비로 얻었다. 한동안 끊어졌던 인연이 이어져 다시 연나부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태자에게선 불혹에 가까운 나이에도 자식이 없었으므로, 태자가 왕위에 오른 다음의 후계자가 또한 문제였다.

결국 왕자 이련이 형제상속으로 왕위를 이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 왕자비로 누가 간택되느냐에 따라 권력의 향방이 달라질 수 있었다. 바로 하대곤은 우신의 딸을 왕자비로 세워 연나부의 전통을 잇도록 하자는 계략이었다. 대사자 우신이 같은 연나부 출신인 국상 명림수부의 힘을 빌리면 왕자비 간택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대곤은 급히 서둘러야 할 일이라고 서찰 끝머리에 적고 있었다. 만약 우신이 자신의 딸을 왕자 이련의 왕자비로 앉힐 수만 있다면, 앞으로 그의 출세 길은 탄탄대로나 다름없음을 하대곤은 거듭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하대곤 장군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우신은 깊은 생각에 몰두하며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두 가지 얻는 바가 있을 것이옵니다. 우선 하대곤 장군은 양아들 해평을 조카딸 연화와 결혼시켜 종제이신 하대용 대인과 화해를 하게 되니, 그것이 첫 번째 득입니다. 그리고 이를 기회로 해서 대사자 어른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중앙 관직을 얻고자 함이니, 그것이 두 번째 득입니다. 만약 대사자 어른이 왕자 이련을 사위로 얻는다면, 주변에 시기하는 부류가 늘어날 것입니다. 하대곤 장군은 동서남북 각 부의 욕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지략을 가지고 있고, 그 중 특히 동부의 군대는 막강합니다. 충분히 대사자 어른을 보좌할 만한 든든한 군사력을 우리 동부는 갖고 있사옵니다.”

두충은 하대곤의 특별 지시대로 밀약의 내용을 줄줄 엮어내고 있었다.

대사자 우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두충은 그 미소를 보면서 밀약이 이루어졌음을 직감했다.

“한번 깊이 생각해 봄세. 동부의 하대곤 장군에겐 내가 따로 사람을 보내겠다고 전하게.”

우신은 얼굴에 떠오르던 미소를 지우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무슨 생각을 거듭하는지 그의 고개는 연신 끄덕거려지고 있었다.

두충이 물러가고 나서, 우신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며칠 전 그의 집에 머물며 딸에게 무술을 가르치던 우적(于寂)이 뜬금없이 동부로 보내달란 요청을 해왔다. 떠돌이 무사였던 그는 문중의 먼 친척으로 연전에 우신의 집에 찾아와 객식구가 되었다. 그런데 이유를 묻지 말하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우적은 갑자기 동부에 가서 군사들을 가르치는 무술사범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는데, 때마침 동부 욕살 하대곤이 서찰을 보내왔으니 우적을 그곳으로 보내는 일이 지극히 자연스러워졌던 것이다.

‘동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결코 나쁘지는 않은 일이지. 더구나 우적이 그곳에 가서 무술사범 노릇을 하게 된다면, 나와 하대곤의 다리 역할을 해줄 터이니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우신은 혼잣말을 목구멍 안으로 삼키며, 일이 잘 되려면 하늘도 돕는다는 말이 그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번 일이 외동딸을 왕자비로 내세울 수 있는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라고 굳게 믿었다.

 

고산동고분군 앞방 서벽 북쪽부분의 사람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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