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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싹트는 연정-6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1.12.2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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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무언의 약속

 

들판에는 파릇한 풀들이 한창 돋아나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저 먼 곳에선 풀냄새 싱그러운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푸릇푸릇한 새싹이 한 뼘쯤 자라난 초록 들판을 말 두 마리가 달리고 있었다.

나란히 달리는 말 위에는 남녀가 각자 타고 있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들판을 가로 질러 강가에 닿자 두 사람은 말을 멈추었다. 왕자 이련과 연화였다.

“이 강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태백산이 나온단 말이지요? 태백산 정상에 천지가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정상에 그런 큰 호수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이련이 연화와 말머리를 같이한 채 서서 압록강을 바라보았다.

“네, 왕자님! 태백산 천지의 물은 늘 흘러넘친답니다. 달문 아래로 흐르는 폭포는 우렁찬 소리를 내는데,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에요.”    

연화는 어린 시절부터 압록강이 흐르는 강가에서 자라났다. 그래서 태백산 천지도 자주 가보았고, 강줄기를 따라 난 길로 말을 달려본 경험도 많았다.

이련은 어려서부터 말로만 듣던 태백산 천지에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전렵 행사에 부왕을 따라나섰던 것인데,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그만 좋은 기회를 놓쳤다.

다리가 완쾌된 후 연화에게 태백산 천지를 보고 싶다고 먼저 말한 것은 이련이었다.

“낭자! 나를 태백산 천지까지 안내해줄 수 있겠소?”

이련은 천지를 보겠다는 욕심도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연화와 단둘이 봄나들이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왕자님, 그 일이라면 아버님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연화가 말했다.

“하 대인께는 내가 허락을 받겠소.”

이련은 하대용을 찾아가 연화와 함께 태백산 천지를 구경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지난 번 천제 때 참여치 못한 게 못내 서운하셨던 모양이군요. 왕자님께서 그리 원하신다면 소원을 들어드려야지요. 다만 연화만 데려갈 경우 왕자님 신변이 걱정되오니, 추수도 함께 가도록 하시지요.”

하대용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태백산 자락에는 말갈족의 무리도 많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냥꾼들도 자주 출몰했다. 그리고 혹여 호랑이나 곰 같은 맹수라도 만날 경우에 대비하여 사냥의 고수인 추수를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다.

“아버님, 이 연화의 실력을 못 믿으시는군요. 추수까지도 필요 없어요.”

왕자 이련 옆에 있던 연화가 얼른 끼어들었다. 추수가 동행하게 되면 두 사람에게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 대인! 나도 앞가림 정도는 할 줄 압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이련도 연화와 단둘이서만 떠나고 싶었다.

하대용은 두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염려가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련과 연화가 태백산 천지를 유람하기 위해 떠난다고 결정했을 때, 하대용은 바로 그 전 날 몰래 추수를 불러 당부했다.

“아무래도 두 사람만 보내는 것이 불안하다. 너는 내일 아침 두 사람이 집을 나설 때 몰래 뒤따르며 멀리서 보위토록 하거라. 알겠느냐? 두 사람이 눈치를 채면 곤란하니, 그 점 특히 명심하고.”

“……네! 대인 어른!”

추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왜? 마음에 내키지 않느냐?”

“아니옵니다. 명심코 대인 어른의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추수는 예를 올린 후 물러나왔다.

사실 추수는 왕자 이련과 연화가 태백산 천지를 유람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편한 심기를 어쩌지 못했다. 도중에 그들을 해코지 할 무리들이나 호환을 만날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추수의 마음을 더욱 흔들어놓았던 것이다.

추수는 하대용의 명이라면 불속에라도 뛰어들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련과 연화의 뒤를 미행하라는 명을 따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대인 어른의 명이니 따를 수밖에…….’

추수는 마음속으로 되뇌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추수는 왕자 이련과 연화가 집을 나설 때 그들의 뒤를 몰래 밟았다. 앞서 가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먼 거리에서 천천히 말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련과 연화는 멀리 뒤에서 추수가 미행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한가롭게 강줄기를 따라 천천히 말을 몰고 있었다.

“태백산 천지를 보려면 좀 더 서둘러야 할 것 같아요.”

연화가 먼저 앞질러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랴, 이랴!”

이련도 뒤따라 말에 채찍을 가했다.

두 마리의 말은 들판을 질주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주하듯 달리다가, 나란히 보조를 맞추기도 하는 등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연초록의 산야를 누볐다. 말과 사람이 한 몸으로 출렁이면서 만들어내는 그 속도감과 유연한 동작은 자연 속의 유영(遊泳)이라고 해도 좋았다. 앞에서 두 마리의 말이 달리는 동안, 나무에 가려졌다 보이고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나타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추수는 노심초사하며 뒤를 밟고 있었다.

태백산 자락으로 접어들자, 밀림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 하늘을 향해 우뚝 선 나무들은 저마다 키 재기를 하듯 꼿꼿하게 직립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밀림 지대를 지나자 산등성이가 훤히 드러났다. 비탈진 산을 오르면서 정상이 가까울수록 나무들은 듬성듬성 서 있었고, 키도 점점 작아졌다. 나중에는 작은 풀들만 산등성이를 온통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산 정상 가까이에 이르자, 이련과 연화는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경사가 심해 말들조차도 힘이 들어 헉헉대며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던 것이다.

태백산 정상 조금 못 미친 곳에 평탄한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두 사람은 말들을 풀어놓아 마음대로 풀을 뜯게 하고 곧 정상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평지 같은 초원에서 산 정산으로 오르는 길을 매우 가팔랐다. 자칫 발을 잘 못 딛게 되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모래 같은 돌가루들 때문에 길은 더욱 미끄러웠다.   

“자, 내 손을 잡아요.”

이련이 연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왕자님도 힘드실 텐데…….”

그러면서도 연화는 이련에게 손을 주었다.

 

하늘세계, 각저총(角抵塚) 널방 천장 중심

 

말 타기에선 연화가 앞선다 하더라도 경사진 산비탈을 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남자인 이련의 발걸음이 더 가벼웠다.

천지가 보이는 태백산 정상에 올라서자, 이련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과연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서린 명산이로군! 이번에 천제를 지낼 때 와보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았었는데, 오늘 이렇게 연화 낭자와 함께 천지를 바라보니 감개가 또한 남다르구려.”

“어떻게 남다른가요, 왕자님?”

연화가 이련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련이 갑자기 긴장된 얼굴로 연화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천지를 보는 순간, 연화 낭자를 나의 배필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했소. 나는 이 자리에서 태백산 천지와 약속을 하겠소. 연화 낭자와 반드시 결혼을 하기로. 이는 천지신명과의 맹세이기도 하오.”

이렇게 말하는 이련은 열세 살의 소년답지 않고 의젓했다. 이미 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말을 비로소 꺼낸 것처럼 뜸을 들이거나 더듬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 이련은 슬그머니 연화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런 일이었으나 연화는 잡힌 손을 애써 빼내지 않았다.

“왕자님! 소녀의 나이가 왕자님보다 네 살이나 많은데 괜찮겠어요?”

연화는 은근히 걱정스런 얼굴이 되어 물었다. 아직 왕자가 결혼을 생각할 나이는 아니라서 가까이 있어도 크게 떨리지 않았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이상스레 가슴이 벌렁거렸다. 열세 살의 왕자가 이성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오. 나는 연화 낭자가 병간호를 해줄 때 어머니를 많이 생각했소. 네 살 때 돌아가시고부터 나는 어린 시절을 친모 없이 자랐지요. 모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다가 모처럼 연화 낭자를 만나 그 비슷한 느낌을 받았소. 모성애와 비슷한 느낌, 며칠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사랑이었소. 낭자, 사랑하오.”

이련은 연화의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어머!”

연화가 화들짝 놀라 몸을 떼려고 하자, 이련은 상대의 입을 자신의 입술로 막았다. 실상은 그 순간, 연화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올까 내심 두려웠던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한 몸이 된 채 서 있었다.

천지 위로 안개가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도 맑은 날씨였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덮었고, 수면 위로 퍼지던 안개가 자욱하게 천지를 점령해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이처럼 태백산 천지의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곧 비가 오려나 봐요.”

연화가 이련에게서 몸을 떼어내며 안개 자욱한 천지를 바라보았다.

“하느님께서 천지에 축복의 비를 내려주실 모양이오.”

“축복의 비요?”

“천제를 지내러 오기 전에 폐하께서 내게 말씀하셨소. 태백산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아버지 환웅천왕(桓雄天王)이 하늘에서 내려와 신시(神市)를 연 곳이고, 지금은 각기 나라가 갈라져 나갔지만 고구려를 위시한 우리의 주변국들은 모두가 단군왕검의 자손이라고. 추모왕께서도 구토(舊土)를 회복하겠다는 ‘다물정신(多勿精神)’의 꿈을 갖고 고구려를 건국하셨소. 구토는 바로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을 말하나, 지금은 고구려·부여·백제·신라·가야 등으로 갈라져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소. 우리가 결혼하기로 약속하는 순간, 하늘이 축복의 비를 내려주신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겠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구토를 회복할 영웅을 점지해주신다는 뜻 아니겠소?”

이럴 때 이련은 열세 살의 소년답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 청장년이었고, 나라를 걱정할 만큼 인격적으로도 충분히 왕자지도(王者之道)를 갖추고 있었다.    

이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둑우둑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어느 새 천지는 안개로 가득 덮여 수면조차 보이지 않았다. 먹구름과 안개가 한데 뒤엉키면서 땅의 기운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 번쩍, 하며 번개가 치더니 쿠르르릉, 천둥이 울었다.

번개의 불빛이 먹장구름을 가르고 천지로 내리꽂히는 바로 그 순간, 그 반작용처럼 수면에서 꿈틀대며 황룡이 하늘로 용솟음치는 것을 두 사람은 보았다. 번개가 치면서 안개와 구름의 조화가 빚어낸 결과이지만, 그 번뜩이는 빛깔과 꿈틀대는 움직임과 형용키 어려운 형상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어머, 왕자님! 방금 황룡을 보았어요!”

연화가 먼저 소리쳤다.

“오, 나도 보았소. 연화 낭자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국모의 품위를 갖추었다고 생각했소. 폐하의 뒤를 이어 태자이신 구부 형님이 왕위를 잇게 되겠지만, 태자께선 아들이 없기 때문에 그 다음 순서는 내가 될 것이오. 내가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고구려를 강국으로 만들어 추모왕의 다물정신을 실천할 아들을 낳을 것이오.”

이련은 다시 연화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잡은 손에는 강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무언의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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