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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영웅 리더십] 장건(상)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1.12.14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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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信賴)와 인고(忍苦)의 리더십

한무제(漢武帝) 때만 해도 서역은 멀고 먼 이방(異邦)이었다. 거리도 멀고 고산지대와 사막이 가로 막고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큰 장벽은 흉노(匈奴)였다. 흉노는 두만선우(頭萬單于)와 묵돌선우(冒頓單于)를 거쳐 노상선우(老上單于)가 지배할 때였다.

두만선우가 서북방의 흉노족을 결집해 세력을 키우자, 진시황은 그들을 방어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장자였던 묵돌은 두만선우가 후처의 아들에게 대를 물려주려고 하자 아버지를 살해하고 선우가 되었다. 묵돌선우는 흉노 세력을 더욱 결집해 동북쪽의 동호(東胡)와 서북쪽의 월지(月氏)를 격파,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세웠다. 묵돌선우 시절 중국은 한나라 때였는데, 한황실(漢皇室)의 딸을 선우에게 주고 매년 견직물 등 많은 재물을 보내는 조건으로 흉노와 화의를 맺기도 했었다.

 

장건의 원정(BC 138~BC126)(사진=위키백과 갈무리)

 

그러한 화친 정책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는 오랜 기간 흉노에게 호시탐탐 변방을 침략당해 제위에 오른 황제마다 큰 근심덩어리 중의 하나로 여겼다. 한무제는 16세의 어린나이에 제위에 올랐는데, 더 이상 흉노의 도발을 방치해선 안 된다고 결심하였다. 이때 흉노는 이미 묵돌선우가 죽고 3대 노상선우가 즉위하여 서방의 숙적 월지와 자주 격돌했으며, 결국에는 월지를 공격하여 이리(伊犁) 지방으로 내쫓았다. 이때 노상선우는 죽임을 당한 월지왕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만들어 쓰는 등 위력을 과시했다. 또한 한나라에서 항복해온 중행열(中行說)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국가정비를 해나갔다. 뿐만 아니라 호시탐탐 한나라 서북 변경을 쳐서 약탈을 일삼았다.

한무제는 흉노를 제거할 계책을 세웠다. 때마침 흉노에서 투항해온 자로부터 계책을 꾸밀만한 정보를 얻었다. 노상선우가 월지왕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리강 남쪽으로 쫓겨나 국가를 재건한 대월지(大月氏)가 크게 분노하여 복수할 기회만 노리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무제는 대월지에 사신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서쪽에서 대월지가 동쪽에서는 한나라가 협공하면, 가운데 든 흉노 세력은 결국 무릎을 꿇고 말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이때 한중(漢中) 출신의 낭관(郎官) 장건(張騫: 기원전 167?~114)이 자원하여, 기원전 138년에 사신단을 이끌고 대월지를 향해 출발했다.

장건의 서역사행(西域使行)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전해지고 있다. 《사기》 ‘대원열전(大宛列傳)’에 나오는 이야기를 다시 엮어 보면 다음과 같다.   

한무제의 명을 받아 장건이 사신단 약 100명을 이끌고 대월지로 떠날 때, 그는 흉노의 일원인 당읍지(堂邑氏) 출신의 노비 감보(甘父)를 동행시켰다. 흉노 세력이 주둔한 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건 사신단 일행은 농서(隴西) 지역을 거쳐 흉노 땅으로 접어들었다. 한나라와 서역 가운데 장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흉노 세력 때문에 일단 어디를 택하든 쥐도 새도 모르게 그 틈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약 100명의 사신단이 흉노의 감시망을 뚫고 서역까지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장건 일행은 흉노 군사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한나라 사신단임이 발각나자, 그들은 곧 노상선우 앞으로 끌려갔다.

노상선우는 장건이 왜 대월지로 가는지 알고 곧 그를 억류시켰다. 오만무례한 노상선우도 한나라 사신에게는 대우를 해주었다. 죽이지 않고 흉노 땅에서 살게 했으며, 여자를 주선해 결혼까지 시켰다. 중행렬처럼 나중에 크게 쓰일 수 있다고 판단해 선처를 해준 것인지도 몰랐다. 장건은 흉노에서 자식까지 낳아 기르며 10년 세월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장건은 호시탐탐 감시망을 벗어나 대월지로 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겉으로는 거의 흉노 사람이 다 된 듯이 행동했지만, 그는 단 한 시도 사자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잊은 적이 없었다.

한편 장건이 10여 년 간 묵묵히 가정생활을 꾸려가며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범부의 모습으로 살아가자, 점차 흉노의 감시망이 느슨해졌다. 내심 도망칠 기회만 노리던 장건은 야심한 시각을 틈타 감보와 자신을 따라왔던 일부 사신의 무리를 이끌고 아내와 자식도 모르게 몰래 거처를 빠져나왔다. 마침내 흉노의 경계를 벗어나자 말을 달려 대월지를 향해 줄달음질쳤다.

무조건 서쪽을 달려간 지 수십 일 만에 장건은 대원(大宛)에 이르렀다. 대원은 지리적으로 천산산맥(天山山脈) 서단과 시르다리야강 상류의 파미르 고원 북단에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장건은 대원의 왕을 만나 자신이 한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대월지까지 사신단을 이끌고 가다 흉노에 억류되었고, 10여 년의 세월을 보낸 끝에 도망친 길이라고 말했다. 대원왕은 크게 반가워하였다. 일찍부터 한나라에는 융성한 문화가 있고 물산이 풍부하다는 얘기를 들었으므로, 양국 간에 무역의 길을 트고 싶었다. 그러나 중간에 흉노 세력이 가로막고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때마침 장건의 무리를 만나자, 그들을 크게 환대하였다.

장건은 자신들이 대월지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했고, 대원왕은 흔쾌히 안내인과 통역인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길안내를 해주도록 했다. 장건은 기쁜 나머지 자신이 대월지로 가서 임무를 마치고 한나라로 귀국하면 반드시 대원국에 많은 재물을 선사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맺었다. 대원왕이 원하던 바였다.

대원왕이 딸려 보낸 안내인과 통역인 덕에 장건 일행을 강거(康居)에 이르렀다. 강거는 오늘날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남부 지역에 세워진 나라였다. 대원의 안내인과 통역인은 강거 사람들에게 장건 일행이 대월지까지 간다는 뜻을 전하고 돌아갔고, 이번에는 강거 사람들이 그들을 대월지까지 안내했다.

이렇게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지역에서 대원과 강거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장건 일행은 대월지에 도착해 그 나라 왕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대월지는 흉노의 노상선우에게 죽임을 당한 월지왕의 태자가 왕위를 이었는데, 대하국(大夏國: 박트리아)까지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 땅이 힌두쿠시 산맥까지 이어질 정도로 광활했다.

장건은 한무제의 제안을 대월지 왕에게 전했다. 흉노를 동서에서 공격해 한나라는 오래도록 서북 변경을 위협당하는 근심을 덜고, 대월지는 부왕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기회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월지 왕은 생각이 달랐다. 흉노에게 쫓기는 바람에 대하를 굴복시켜 신하로 삼았고, 그 기세를 몰아 힌두쿠시 산맥 북서쪽 땅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그 넓은 땅이 비옥한 데다 주변에 대월지와 겨룰 만한 세력이 없어 안전하게 나라를 경영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애써 군사를 일으켜 흉노를 쳐 복수할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장건은 인내심을 갖고 계속 대월지 왕을 설득해 보았으나 차일피일 미루며 끝내 확실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장건은 1년여 간 대월지에 머물며 두루 곳곳을 돌아보면서 물산이 풍부하고 살기 좋은 곳임을 알고 비로소 왕의 속마음을 깨달았다.

결국 장건은 대월지를 떠나 귀로에 올랐다. 천산산맥을 따라 강족의 땅을 거쳐 한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는데, 또다시 흉노 무리에게 잡혀 노상선우 앞으로 끌려갔다. 이때 노상선우는 장건 따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와병 중이었던 것이다. 장건은 이번엔 반드시 노상선우가 자신을 죽일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노상선우는 그를 너그러이 용서하여, 옛날처럼 흉노 출신 아내와 자식을 부양하며 함께 살도록 선처해주었다.

장건이 다시 흉노에 1년여 기간 억류되어 있을 때, 마침 병을 앓던 노상선우가 죽고 좌 녹리왕이 태자를 몰아낸 후 왕위를 빼앗았다.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장건은 아내와 자식까지 데리고 노비 감보와 함께 탈출, 흉노 세력의 감시망을 벗어나 한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장건은 한무제에게 자신이 서역사행을 하면서 겪은 온갖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서역 여러 나라 사람들의 사는 모습과 물산, 지리, 이색적인 문화까지 다방면에 걸쳐 보고들은 정보들을 털어놓았다. 평소 말(馬)을 좋아했던 한무제는 그중에서도 특히 대원의 명마인 한혈마(汗血馬) 이야기에 관심이 끌렸다.

일단 한무제는 장건이 대월지 왕의 설득에 실패했지만, 10여 년에 걸친 서역사행과 그 충성심을 높이 사서 태중대부(太中大夫)에 봉했다. 그리고 길안내를 맡아 함께 갔던 노비 감보는 봉사군(奉使君)으로 삼았다.

 

 

■ 실크로드의 역사

사막의 식수원이 된 지하수로 ‘카레즈’

《사기》와 《한서》의 기록을 유추해 장건의 서역사행 노선을 따라가 보면, 당시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 여정이었는지 금세 파악할 수 있다. 한나라 수도 장안에서 출발한 장건의 사신단은 농서~무위~선우정을 거쳐 음산을 우측으로 끼고 돌아 노구수까지 갔다가 흉노 세력에게 잡혀 10여 년간 억류 생활을 한다. 음산과 알타이산맥 사이에 있는 광활한 고비사막을 통과하지 못하고 우회를 하다가 흉노에게 잡힌 것이다.

흉노에서 탈출해 대월지까지 가는 여정 역시 고난의 연속이었다. 먼저 알타이산맥을 넘어야 했고, 수십 일을 서쪽으로 달려 오손~대원~월지~대하까지 이어지는 노정은 순탄치 않았다.

장건이 한나라로 귀국하는 노정 또한 험로의 연속이었다. 대하에서 타클라마칸 사막과 곤륜산맥 사이의 길을 통과해 누란~돈황~청해~무위~선우정~태원~장안으로 들어오는 노정은 흉노 세력의 감시망을 피하다 보니 우회할 때가 많아 도처에 사선을 넘나드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흉노도 그렇지만 더위와 열병 등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이와 같은 장건의 사행길은 오늘날 ‘실크로드’라 불리는 오아시스의 중요 교역로가 되었다. 장건 사신단의 사행길에 가장 심했던 고통은 무엇보다도 식수 문제였을 것이다. 사막의 땅에서는 물이 생명수였다. 그렇다면 그들을 어떻게 식수를 구해가며 그 먼 노정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일까, 매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서 경항운하(京杭運河), 만리장성과 함께 3대 역사(役事)로 꼽고 있는 ‘카레즈’가 바로 고비사막의 식수 공급원이었다. 카레즈는 지하수로(地下水路)를 말하는데, 오랜 옛날부터 중국과 서역을 오가는 노상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사는 사람들은 천산산맥부터 지하로 땅굴을 뚫어 설산의 눈 녹은 물을 끌어다 식수와 농사를 짓는 데 썼다. 수천 년에 걸쳐 조금씩 공사가 진행되어 오늘날 무려 천여 갈래의 물길이 지하수로를 통해 오아시스도시에 공급되고 있는 것이다. 고비사막 수십 길 밑은 진흙땅으로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데, 그래서 굴을 파놓으면 물이 흘러도 쉽게 무너지는 법이 없었다.   

원래 이러한 인공수로는 세계 여러 건조지대에서 발달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700년경 이란 동부 사막지대의 지하수로를 꼽고 있다. 지하수로를 건설하는 기술이 조로아스터교의 전파와 함께 동쪽으로 전달되어 페르가나를 거쳐 중국 신장 지역까지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사기》나 《한서》 등의 고서에 우물을 파서 물이 통하게 했다던가, 수로를 파서 물이 솟아오르게 했다는 기록 등을 근거로 삼아 카레즈 기술이 서방에서 전해진 것이 아닌 자생설(自生說)임을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중국에는 카레즈 굴착에 쓰였던 흙을 나르는 광주리인 ‘운토광(運土筐)’이 있는데, 그것이 중국어 이름이란 사실을 자생설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신장 투루판의 카레즈 형태는 관광 코스로도 각광받고 있는데, 그 구조를 보면 4개 부분으로 되어 있다. 거친 사막 땅에서 수직으로 파내려간 우물인 수정(垂井), 그 우물과 우물을 연결하는 물길 통로인 암거(暗渠), 하구로 내려오면서 비로소 땅위로 드러난 물길인 명거(明渠), 그리고 물길의 종점에서 물을 저장하고 배수하는 방죽인 노파(澇垻)가 있다. 이 방죽의 가두어두었던 물로 오아시스도시에선 포도·무화과·석류 등 과수농사와 온갖 채소를 기르는 밭농사를 경작했던 것이다.

땅에서 지하를 향해 수직으로 뚫은 수정은 우물 역할을 하여 지상에서 두레박을 드리워 물을 길어 올릴 수도 있으며, 지하수로가 막힐 경우 사람이 그 우물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 흙을 퍼서 자상으로 올리는 작업 용도로도 사용했다. 고비사막에는 바람이 많이 부는데, 모래와 자갈이 바람에 쓸려 우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우물 가장자리에 빙 둘러 돌무더기를 쌓아놓았다. 그러한 우물이 지하수로 노선을 따라 약 100미터 간격으로 지상에 띄엄띄엄 드러나 있어, 사막을 지나는 대상들을 그것을 보고 물이 있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중국 신장 자치구의 천여 갈래 카레즈 물길 중 긴 것은 수 킬로미터 되는 것도 있으며, 모두를 합하면 약 5,000킬로미터나 된다고 한다. 가히 중국에서 3대 역사라고 할 만하다.

 

 

■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과 ‘신뢰의 리더십’

실패의 뿌리를 잡으면 성공이 보인다

장건의 서역사행이 동서 교류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오아시스로의 개척이다. 흉노 세력에게 잡혀 10여 년간 억류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한무제로부터 받은 사신으로서의 사명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흉노가 지배했던 지역이 장건에게는 서역사행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흉노 세력에게 억류된 곳이 그에게는 오히려 한나라 장안에서 서역까지 가는 길의 중간 기착지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처음 신천지를 밟는 사람은 뼈아픈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기업경영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건설업이 외국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교두보를 만든 것은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이다.

 

누구든 처음 신천지를 밟는 사람은 뼈아픈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기업경영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건설업이 외국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교두보를 만든 것은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이다.(사진=위키백과 갈무리)

 

현대건설은 1965년 9월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해 한국 최초로 해외 진출을 하는 기록을 세웠다. 고속도로 공사 경험이 전무(全無)했던 현대건설은 국내에서 미군들이 쓰던 중고 건설 장비를 가지고 태국에 건너가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애초 세계 굴지의 건설사들과 수주 경쟁을 벌여 가장 낮은 가격으로 따냈으므로, 아무리 돌관작업으로 공사를 진행한다고 해도 이득을 남기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주영 회장은 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 곧바로 작업에 돌입하였다. 난관은 여기저기서 뜻하지 않게 터져 나왔다. 임금이 체불되면서 태국 현지 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태업 상태가 지속되면서 공사 지연은 계약된 공기를 맞추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공사 진척도 제대로 안 되면서 시일을 끌게 되자 빚만 늘어나 공사를 완공해봤자 손해가 막심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간부들은 모두들 공사를 포기하고 귀국하자고 정주영에게 건의하였다. 당시로선 계약조건대로 도중에 공사를 그만둘 경우 물게 되는 위약금을 주는 것이, 억지로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투여해 공사를 완공하는 것보다 이득이라는 계산이 명약관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정주영 회장은 달리 생각했다. 그는 기업경영에서 신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일단 맡은 공사이므로 완벽하게 마무리를 지어주어야 신뢰를 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앞으로 계속 해외에서 공사를 따내려면 처음 해외공사인 태국의 고속도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내야만 했다.

정주영 회장은 간부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무조건 공사를 진행하라 명령했다. 그리고 그가 직접 공사 현장에 나타나 그야말로 돌관작업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부들의 작업을 독려하였다. 이렇게 하여 간신히 공사를 완공하기는 했으나, 이로 인해 산더미처럼 빚이 늘어나 현대건설은 일대 위기에 봉착했다.

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있었다. 그래서 태국에서 고속도로 건설을 마치고 돌아온 정주영 회장과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관한 것을 논의하기 위해 마주앉은 자리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정주영 회장에게 태국에서 많은 손해를 보았다는 얘길 들었다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정주영 회장이 껄껄 웃으면서 비싼 수업료 좀 냈다고 대답했다. 이어서 앞으로 동남아시아에서 건설 공사를 많이 수주해 이번에 손해를 본 외화의 수십 배를 벌어들일 테니 너무 적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실제로 정주영 회장은 그로부터 얼마 후 태국의 파타니 나랏티왓 공사를 마무리해준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 무렵 한국이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1960년대 후반에 미국의 월남 군사기지 항만공사가 많이 있었다. 이들 공사 중 대표적인 것들을 현대건설이 도맡아 진행하면서 ‘월남특수’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월남특수’는 현대건설이 1970년대에 동남아시아 각국으로 건설 시장을 확대해나가는 계기가 되었고, 그 기류가 곧바로 1970년대 후반 ‘오일 머니’를 벌어들이는 ‘중동특수’로 연결되었다.

정주영 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 공사를 9억 4,000만 달러에 수주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우리나라 정부 예산의 25%에 해당하는 거금으로, 해외 언론들까지 나서서 20세기의 대역사(大役事)라고 대서특필할 만큼 큰 공사였다.

장건이 서역사행 때 흉노 세력에게 붙잡혀 10여 년 억류생활을 한 인고의 세월은 서역인들에게 신뢰를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대월지에 가서 왕을 설득시키지 못해 사신의 사명을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귀국 길에 다시 흉노에게 잡혔을 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에 10여 년간 억류생활을 하며 신뢰를 쌓은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건의 서역사행 노선이 나중에 동서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된 것도, 그가 교두보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주영 회장도 태국 고속도로 건설을 중도에 그만두었다면 현대건설은 국내의 건설이나 수주하는 중소기업 정도로 머물 수도 있었다. 신뢰를 쌓으면서 미래의 더 큰 세상을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었기에 인고를 하며 참고 기다려 마침내 ‘월남특수’와 ‘중동특수’를 만나, 오늘날 현대를 대그룹으로 우뚝 서게 한 것이다. 실패의 뿌리를 붙잡고 놓지 않으면 성공이 보인다는 리더십이 다시금 장건의 서역기행과 정주영 회장의 일화에서 되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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